< 광끼 -144 >
[버스커]의 촬영은 순조로웠다.
너무 쉽게 진행되어 오히려 걱정될 정도였다.
덕분에 성우를 보는 스태프의 시선도 달라졌다. 과거 액션만 소화 가능한 배우로 보면 왜곡된 시선도 서서히 사라졌다.
음악에 대한 성우의 재능.
그것도 액션 못지않았으니 당연했다.
서전트 감독이 한 눈에 발견한 그것은 이 순간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가 한적한 공원에 앉아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면 그 공간이 아예 바뀌어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촬영을 하면서 아예 문제가 없는 현장이란 없었다.
“이거 큰일이네...”
촬영 스케줄을 관리하는 타일러.
그는 옆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한참 이것저것 뒤져보던 그는 마침내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모니터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서전트 감독 방향이었다.
“감독님 오늘 촬영 1시간 남았습니다.”
“벌써?”
“정확하게는 67분입니다.”
타일러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서전트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같은 장면만 몇 번째 촬영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예정된 일정을 벗어나면 제작사에서 전 스태프에게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게 이 바닥의 룰이자 조합과 맺은 절대적인 룰이었다.
돈은 제작사에서 낼 것이다.
하지만 그 책임은 전적으로 감독에게 돌아온다. 오늘 촬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일정이 밀릴 줄은 몰랐다. 성우와 동주에게 예정된 오늘 촬영 분량은 이미 끝냈다. 오히려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거란 예상도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조연에서 터졌다.
주인공인 ‘조’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는 아역 배우.
이 친구가 잔뜩 얼어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거의 촬영이 진행이 안 될 수준이었다. 아이 엄마가 달래고 있지만, 가능성이 보이지는 않았다. 전작 중에 어떤 영화도 아역이 나온 경우는 없었다. 덕분에 서전트 감독도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누가 쟤 좀 어떻게 해봐!”
스태프도 난리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무너져버린 멘탈은 도저히 수습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두어 컷만 더 찍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서전트와 타일러 등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했다.
“분위기가 왜 이래?”
성우의 질문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오늘 자신의 촬영은 끝난 그였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옷과 화장을 지우고 나오니 뭔가 분위기가 싸한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스태프 한 명이 이 상황을 설명해줬다. 그제야 성우는 이 분위기가 이해가 되었다.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 톱니바퀴.
미국의 시스템은 효율성을 중요시했다.
아무리 주연이라도 컨디션이나 다른 스케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무조건 영화에 올인하는 것이 이쪽의 생리였다. 당연히 아역이라 해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요한아. 너 혹시 동전 있니?”
“음료수라도 뽑아다 드릴까요.”
“아니 그럴 용도는 아니고... 그냥 트레일러에 붉은색 가방 좀 가져다줘.”
“그거를 지금 왜요?”
요한은 의문이 들었다.
그 가방은 그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그걸 왜 꺼내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재차 말하는 성우의 말을 듣고 등을 돌렸다. 요한이 트레일러 방향으로 사라지자 성우는 아역 배우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다가서는 것도 모르고 아이는 펑펑 울고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와 제작진.
그것은 다 큰 어른도 버거워 하는 것이었다.
괜히 카메라며 무대 울렁증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성우처럼 처음부터 아예 그런 것이 없는 이들도 있지만, 현직 연예인 중에서도 힘겨워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그때 촬영장에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지훈! 너 도대체 왜 이래~! 내가 너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
“흐윽···”
“오디션 때도 그렇고 선생님들이랑 연습할 때도 잘했잖아. 너 이 기회 그냥 날리고 싶어? 너 이거 때문에 미국까지 왔는데 그냥 이렇게 돌아갈 거야?”
“죄송해요.”
“지훈아. 잘 할 수 있지?”
“···”
거의 애를 쥐잡듯 잡고 있었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그녀는 목청껏 소리쳤다. 물론 상황이 다급하니 당황스러운 것은 알겠지만, 미국에서 촬영하면서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미간을 찡그리며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해도 너무 과했다.
조금 더 놔두면 아동 학대로 신고당할 것 같았다.
성우는 그 두 모자 곁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펑펑 울던 아이가 깜짝 놀라 성우를 바라봤다. 그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그득했다.
“잘 생겼네~ 혹시 아저씨 누군지 알아?”
“호호호. 당연히 알죠. 저 지훈이 엄마 엘레나 송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지훈이는 나 모르는 거야?”
“아니요! 우리 지훈이 방에 배우님 출연한 아크로의 사진이며 장난감이 얼마나 많은데요. 지훈아 맞잖아? 말 좀 해 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것도 능력이라 여겨졌다.
모처럼 불쾌지수가 확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성우는 고개를 돌려서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서전트 감독을 찾은 그는 소리쳤다.
“감독님. 10분만 쉬었다가 가죠.”
“50분 후에 접어야 해. 시간 없어.”
“이런 상태로 찍기도 힘들잖아요.”
“에휴··· 알았어. 10분이면 되는 거야?”
“그리고 다들 자리 좀 비켜줘요. 진정을 시켜야 하는데 다들 이렇게 둘러싸고 있으면 어떡해요.”
성우가 버럭 외쳤다.
그러자 다들 머쓱해 하며 사라졌다.
지금까지 그가 이처럼 화를 내는 경우는 없었다. 언제나 예의 바르고 스태프부터 챙기던 그였다. 그런데 한 번 화를 내니 불같았다. 그런데 단 한 명만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성우는 두 손을 들어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귀를 막았다. 험
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기 아주머니.”
“네에? 그냥 훈이 맘이라고 불러주세요. 늙어 보이게 아주머니는 뭐예요.”
“연기자 빼고 비켜달라고 하는 말 못 들었어요? 아! 영어를 못 하는 건가. 한국어로 다시 말해드려요?”
“무슨 소리예요! 저 미국에서 2년이나 유학한 여자예요.”
“알아들으셨으면 좀 가세요. 직접 출연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은 주말 드라마에나 나올 듯한 무척 과장된 그런 것에 속했다. 그녀는 지랄발광이 뭔지 몸소 보여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아이의 울음은 더 커졌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해! 주연 배우면 다야? 싸가지 없이 말이야. 나이도 나보다 어린 거로 알고 있는데.”
“애 놀라니까 적당히 하시죠.”
“우리 애 걱정을 왜 당신이 해? 당신만 배우야? 우리 아들도 배우라고!”
거침없이 이어지는 삿대질.
그것을 보고 성우는 아예 아이를 돌려 껴안았다.
그러자 가슴팍에서 뜨거운 물기가 느껴졌다. 옷이 젖겠지만, 성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지훈이를 껴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그러면 학대로 신고 들어가요. 걱정해서 말씀드리는 거니 적당히 하세요.”
“누가 나를 신고해? 해보라고 해!”
“안 그래도 마침 저쪽에 경찰이 도착했네요.”
성우의 시선은 그녀의 뒤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입을 꽉 다물었다. 뭔가 말을 하려다 참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성우가 한 말을 확인했다. 물론 그게 거짓말은 절대 아니었다.
두 명의 경관.
그들은 멀리서 서전트 감독과 이야기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쪽을 향해 흘깃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봤을 때 심상치 않아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엄마는 순식간에 표정을 확 바꿨다. 어느 사이에 얼굴에 내려앉은 미소는 무척 가식적이었다.
-이야~ 저 연기력! 연기는 아들이 아니라 이 여자가 해야겠네.
모처럼 두부의 말에 공감이 되었다.
주말 드라마에 악연으로 출연하면 딱 맞았다.
그러면 온갖 쌍욕은 다 먹을 수 있을 캐릭터가 그녀였다. 그 순간 아이 엄마는 손을 뻗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마 다들 보라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손길에 움찔하는 아이의 떨림이 가슴을 통해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안중에도 없는 듯
그녀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 일 잊지 않을 거예요.”
“그러시던지요.”
“형! 아까 말씀하신 가방 가져왔어요.”
마침 요한이 다가왔다.
녀석은 가방을 내려놓고 아이 엄마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럴 때는 눈치가 참 빨라서 다행이었다. 사실 서전트 감독과 이야기 나누는 경관은 촬영 현장에 상주하는 분들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과 현장 통제를 위해 뉴욕시에서 편의를 제공한 것이었다.
그걸 오늘 처음 촬영하는 이가 알 리 없었다.
성우는 지훈이를 내려놓고 두 눈을 마주했다.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어 엉망이었다. 하지만 아까 처음에 봤던 것에 비하면 조금 진정된 것으로 보였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누군지 뻔히 보였다.
“아저씨가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
아이는 아이인 것일까?
지훈이는 아직 울먹이고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성우는 웃으며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품이 몇 개 있었다. 성우는 그 가운데 은색의 동전을 꺼냈다.
“이게 뭘까?”
“동전이요.”
“아저씨가 이걸 먹을 거야.”
“안 돼요. 그거 먹으면 배 아파요.”
“지훈이는 그러면 안 되지만, 아저씨는 마술사라 괜찮아.”
성우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동전을 쥔 손을 입을 향해 움직였다. 입 전체를 손바닥으로 가린 이후에 성우는 손을 펼쳐 동전이 없다는 것을 아이한테 보여줬다. 그리고 목울대를 움직여 꿀꺽 삼키는 듯한 모션을 보여줬다. 물론 동전은 소매 속으로 사라진 이후였다. 아직 아이는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동전에 세균 많다고 배웠는데···”
“어! 소화가 다 됐다. 그런데 이 동전이 어디 있을까?”
“배 속에 있겠죠.”
“아닌데~ 어! 어디 있는지 찾았다. 지훈이 귀에 있네.”
“제 귀요?”
“짤랑거리는 소리 안 들려?”
성우는 반대편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이의 귀 뒤편을 한차례 훑고 돌아왔다. 어느 사이에 그의 손에는 동전 두 개가 쥐어져 있었다. 그걸 본 지훈이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아~”
“신기하지? 또 다른 것도 보여줄까?”
“네!”
“음··· 뭐가 좋을까?”
성우는 가방을 한차례 헤집었다.
그런 이후에 그의 손에는 인형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성우의 손에 쥐어진 그 인형은 마치 살아있는 듯이 움직였다. 물론 인형이 직접 움직일 리는 없었다. 그 모든 움직임은 성우의 손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안녕. 내 이름은 밥이야.”
그 목소리에 지훈은 깜짝 놀랐다.
정말 인형이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인형과 성우를 번갈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성우는 그저 입을 다물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인형이 말을 걸어왔다. 그 목소리는 성우가 복화술로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나한테 이야기해줄래?”
“촬영하는 게 너무 힘들어.”
“밥이 조언을 해줄까?”
“응!”
“그냥 나하고 말하듯 편하게 해.”
“그게 힘들어. 모두가 나만 바라보고 있잖아. 무서워.”
아이는 아까의 상황을 떠올린 듯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을 본 성우 아니 밥은 괜찮다며 다독였다. 그렇게 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차 아이가 진정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슬슬 촬영을 시작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럼 다시 도전해 볼까?”
“괜찮을까? 다들 나 때문에 화가 난 것 같아.”
“아니야~ 아무도 화나지 않았어. 옆에 있는 성우 아저씨한테 물어봐.”
“저엉말?”
“당연하지. 그리고 내가 옆에 있어 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밥은 한 차례 춤을 췄다.
촐랑대는 그 모습에 아이는 그제야 한 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갑작스러운 그 웃음에 다들 이쪽을 바라봤지만, 아이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제야 성우는 본연의 목소리로 말했다.
“밥도 지훈이와 함께 촬영할 건데 재미있겠지?”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 촬영 마칠 때까지 함께 있어도 돼.”
“감사합니다!”
성우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마침 서전트 감독이 슬쩍 그들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이의 눈치를 보고 있는 그에게 성우가 낮게 속삭였다.
“어서 촬영 준비하시죠.”
< 광끼 -14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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