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43 >
홍근석 작가.
그를 향해 성우가 걸어갔다.
그 역시 성우를 발견했는지 미소지었다.
먼 타향에서 만나는 거라 굉장히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그 짧은 사이 그의 표정이나 몸짓이 전과 많이 달라진 것을 성우는 느낄 수 있었다. 전에 드라마를 작업했을 때 느껴지던 냉철하고 차가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작가님을 여기서 또 뵙는군요.”
“오랜만이에요. 성우 씨.”
“거의 2년 만인가요?”
“시간 참 빠르죠. 아! 아크로는 정말 재미있게 잘 봤어요.”
“이번에 찍는 영화도 작가님의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요.”
“부담 주기는 싫지만, 이번 영화도 기대하고 있어요.”
“사실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누가 쓴 건가 싶었어요. 그런데 홍 작가님이라니 신기하네요.”
진짜로 그랬다.
지난번에 연극 극본도 그렇고 매번 놀라움을 전해주는 그였다. 이 작품에 성우는 무척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각본과 시나리오가 망한 경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써낸 [저승에서 온 차사]도 그랬다. 그 당시 그 드라마는 이른바 전례 없는 대박을 내며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써 내려 갔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디에 계세요? 미국에 계신 거 알았더라면 종종 찾아뵙고 그랬을 텐데요.”
“저는 이 근처에 살아요.”
“뉴욕이요?”
“그건 아니고요. 체스터라고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에 살아요. 여기는 거주비용이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성우가 아는 이 근처의 지명은 브루클린과 롱 아일랜드 등이 거의 전부였다. 그런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근석은 설명을 보충했다.
“브로드웨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한적한 마을이에요.”
“오! 부러워요.”
“부럽긴요. 서전트 감독님 이야기를 들으니 성우 씨는 아주 거대한 저택에 사신다고 들었는데요.”
“그게 뭐 제집인가요. 아는 지인 집에 잠깐 신세 지고 있었던 거죠. 이 근처에 살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도 자주 볼 텐데 말이죠.”
“사실 그것 때문에 이 근처에 머무는 거에요.”
그 말에 성우는 잠시 고민되었다.
다시 집을 구하면 그처럼 이 근처로 옮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브로드웨이는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매일 저녁에 펼쳐지는 수많은 연극과 뮤지컬.
뉴욕에 머물고 있는 것이 벌써 2~3주가 되었지만, 아직 못 본 작품이 허다했다. 적어도 몇 개월은 머물러야 마이너라 할 수 있는 ‘오프 브로드웨이’의 것들도 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프 브로드웨이’
그곳은 실험적이며 또 문학적이었다.
오락성이 강한 브로드웨이와는 궤를 달리해 차별성을 두는 무대를 ‘오프 브로드웨이’라 칭했다. 그 외에도 ‘오프오프 브로드웨이’도 있었으나 그쪽은 예술성만을 추구하며 극단적인 모습이 강하기에 사실 성우의 취향은 아니었다.
“혹시 오프 브로드웨이 작품도 많이 보시나요?”
“물론이죠. 저는 사실 브로드웨이보다 그쪽이 더 끌려서 온 걸요.”
“그럼 나중에 좋은 작품 좀 추천 부탁드릴게요.”
“굉장히 어려운 부탁인데요. 그쪽의 작품은 워낙 호불호가 강해서 말이죠.”
근석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우는 그런 그에게 너무 부담 갖지는 말아 달라고 했다. 그저 작가님이 어떤 작품을 보시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살짝 언급하자 그는 마지못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알겠다고 한 건지 그냥 그렇게 넘어가려는 건지 성우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성우 형. 촬영 시작한다고 연락 왔어요.”
요한이 다가오며 말했다.
성우가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이미 세팅은 완료되었다. 해도 제법 떨어져 그림자의 키가 상당히 커져 버렸다. 서둘러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오늘은 첫날이지만, 해 질 무렵부터 촬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작가님 저 가볼게요.”
“촬영 잘하세요.”
“감사합니다. 아 맞다! 전화번호 그대로 인가요?”
“미국에서 쓰는 번호는 달라요.”
“그럼 요한이한테 연락처 꼭 남겨주세요.”
“알겠어요. 종종 놀러 올 테니 그때 봐요.”
성우가 등을 돌린 이후.
근석과 요한은 연락처를 교환했다.
한편 성우가 향한 곳에는 서전트 감독이 촬영감독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촬영에 대해 협의하는 것 같았다. 이번 영화에서는 어떻게 뉴욕 밤거리의 분위기를 담아내냐에 따라 확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성우가 나타나자 그 둘은 웃으며 반겼다.
“작가랑 아는 사이였어?”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의 인연을 간단하게 설명하자 서전트는 깜짝 놀랐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면서 성우는 자신 역시 놀랐다며 말해주었다. 잠시 그런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촬영 감독의 신호를 받고 서전트는 성우의 등을 밀며 말했다.
“자! 첫 촬영 가볼까?”
*
달이 환한 밤.
공원의 어두운 곳.
그곳에 한 남자가 기타를 껴안고 있었다.
남자는 기타를 쓰다듬다가 하늘을 바라봤다. 공허함이 가득한 그 눈빛은 연민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그런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한참 그렇게 앉아있던 그는 멀리서 들리는 총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 망할 새끼들. 하룻밤도 조용히 보내지를 못하네!”
남자의 이름은 ‘조’
그는 미국이란 이 나라가 싫었다.
누군가는 미국 시민권이 있는 그에게 부럽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빈민가에서 홀로 자라난 그에게 있어 미국은 시궁창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그가 백인이나 흑인이었다면 또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조는 동양인에 불과했다.
미국의 인종차별?
그것은 상당히 심했다.
백인과 흑인 사이에도 끼지 못하는 존재가 그였다. 당연히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유가 그것일 수도 있었다.
학교를 같이 다니던 동창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벌써 죽거나 감방에 간 녀석들도 많았다. 그것도 아니면 약에 쩔어 있을 것이다. 지금 그에게 친구라고는 품에 안고 있는 기타가 전부였다.
따라랑.
손이 움직이며 낸 소리.
조는 그 소리를 무척 좋아했다.
이 악기로 연주할 때면 어린 시절 행복하던 때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사실 이것은 그의 것은 아니었다. 조가 8살 되던 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것이었다.
[There is no exit deep in the dark.]
조는 작게 노래를 불렀다.
어둠 속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는 상당히 감미로웠다. 하지만 재차 울리는 총소리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간헐적이지만, 점점 더 그 거리가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미친놈들. 총알이 남아도나?”
그 외에도 여러 욕설을 뱉어냈다.
그중에는 한국어로 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입에 베어버렸지만, 이제 어떤 뜻인지도 모를 그런 욕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한국어는 써본 적이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모조리 저속한 영어만 구사할 수 있는 그런 빈민가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는 천천히 걸어 조에게 다가왔다.
조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긴장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 거친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순간에 쫄았다는 것을 들키면 그대로 끝이었다. 절대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이미 깨달아버린 그였다.
“저기요. 혹시 한국 사람인가요?”
귀에 익은 언어.
하지만 확실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조는 멍하니 그 남자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한국인이 분명했다.
“제가 길을 잃어서 그런데 여기가 도대체 어디죠?”
“영어 몰라?”
“아··· 혹시 중국 사람인가요?”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건지 몰라도 그렇게 멍하니 다니다가 다쳐.”
조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아마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덕분에 조는 옛날에 어린 시절 쓰던 말을 기억해내야 했다.
“여기 위험해. 다쳐.”
“한국인 맞으시군요! 저 좀 도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두 발자국.
그 거리를 더 다가오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였다. 그를 보자 조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물론 그래 봤자 조 역시 이제 20대 초반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타를 등에 멨다. 그런 이후에 애송이에게 손짓하며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따라오라고요?”
“영어 좀 쓰지. 나 한국어 잘 몰라.”
“아! 영어... 제가 영어를 잘 못 해요.”
둘은 어두운 공원을 걸었다.
조가 안내하는 곳은 그나마 덜 위험한 곳이었다. 번화가 쪽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자 애송이의 표정은 그나마 밝아졌다. 하지만 둘 사이에 대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영어를 못 하는 한국인.
한국어를 못 하는 재미 교포.
둘의 상황은 어찌 보면 코미디 같았다.
그래도 모처럼 듣는 한국어에 조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았다. 옆에서 아버지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머니는 더 어린 시절 돌아가셨고 전해 들었다. 그러니 기억이라고는 단 한 조각도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 조는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여기까지. 저 앞으로 가면 택시 잡을 수 있을 거야.”
“저 죄송하지만, 차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뭐?”
“차비··· I don’t have taxi fee. 이해되나요?”
애송이는 핸드폰은 물론 지갑도 없다고 했다.
느낌상으로 이미 누군가에게 털린 것 같았다. 거친 이 동네를 밤늦게 멋모르고 돌아다니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누군가는 제법 횡재한 것 같았다. 조는 그걸 왜 자신한테 부탁하냐며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부탁 좀 드릴게요. 제가 내일 바로 갚겠습니다.”
“뭐래.”
“같은 한국인이잖아요.”
“나? 미국인이야.”
조는 자신이 한국인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미국 속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연결 고리도 없었다. 오히려 뻔뻔하게 요구하는 애송이의 행태가 우스웠다. 도대체 뭘 믿고 이런 부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2초 동안.
조는 애송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간절한 표정이 가득했지만, 자신의 주머니 역시 빈곤했다. 고작 50달러 가지고 며칠을 살아야 하는 인생이었다. 어쩌면 거리의 노숙자와 별 차이가 없는 삶이었다. 그런 그가 선행을 베풀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애송이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가 도대체 어딘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조는 침을 뱉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고민했다.
주머니 속에 10달러 지폐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그 심정을 대변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내일 아침 뒷골목 어딘가에서 시체로 발견될 것 같은 불안함이 밀려왔다. 잠시의 고뇌 끝에 조는 스스로 타협점을 찾아냈다.
“숙소가 어딘데?”
“타임스퀘어 부근이요!”
“거기는 30달러면 가능할 거야.”
“감사합니다.”
“대신 내일 이 자리에서 두 배로 갚아. 만약 그대로 째면 뉴욕 어디에 숨어있든지 찾아낼 거야.”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만큼 그 30달러는 조에게 소중한 돈이었다.
애송이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을 거듭했다. 그제야 조는 녀석의 손바닥에 그 지폐를 올려놓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아까움에 손끝이 떨렸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꼭 갚겠습니다. 제 이름은 태식이에요. 공태식.”
“공···택시(Taxi)”
“뭐 마음대로 부르세요.”
“내일 이 자리. 잊지 마.”
그렇게 말하며 조는 돌아섰다.
애송이는 서서히 사라져가는 그의 등 뒤에 걸린 기타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때 메가폰으로 소리치는 한 남자의 음성이 거리에 울렸다. 그 남자는 바로 서전트 감독이었다.
“컷! 수고했어요.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성우는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뒤돌아 각 스태프에게 인사를 했다. 이로써 오늘 촬영도 끝이 났다. 그런 그에게 애송이 Taxi를 맡고 있는 배우가 다가왔다. 키가 훤칠한 그는 성우 곁에 서도 절대 작게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에 그 공포에 질린 표정은 사라지고 웃음만이 가득했다.
“수고하셨어요. 선배님.”
“어··· 내 대사 어색하지 않았어?”
“글쎄요. 저는 좋았는데요.”
“한국어 못하는 척하는 것도 힘드네.”
“저는 원래 영어를 못 해서 다행이에요. 흐흐.”
신인 배우 조동주.
그는 이번 영화에서 성우와 함께 출연하는 배우였다. 얼굴도 조각 같은 녀석이 연기력도 상당히 좋았다. 아니 그 정도라 말하기 어려웠다. 그 나이대 연기자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다.
그래도 놀랍지는 않았다.
녀석의 아버지를 성우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주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라 칭해지는 조강철이었다. 어쩌다 보니 성우는 이 두 부자와 함께 각각의 작품을 찍게 된 것이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 광끼 -143 > 끝
ⓒ l살별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