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38 >
호텔 내부의 체육관.
그곳에는 제법 넓은 별도의 공간이 있었다.
전면에 거울이 설치된 것을 봤을 때 요가 등을 하는 곳으로 보였다. 그 내부는 약 20평은 될 것 같았다. 공간이 제법 넓어 마음에 들었다. 성우는 호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그곳에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요한과 아놀드가 뒤따랐다.
“이 정도면 될까요?”
“충분하죠.”
“2시간 후에 정규 프로그램이 있으니 그전까지 사용하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어휴 뭐 이런걸... 감사합니다.”
성우가 건넨 백 달러 짜리 지폐 두 장.
그것을 받아든 직원은 배시시 웃으며 인사하고는 자리를 피해줬다. 호텔리어로 살면서 눈칫밥을 제법 먹고 산 그였다. 이 팁의 의미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방해하지 않도록 직원들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성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중간에 방해받기 싫다는 자신의 의사를 곧장 캐치한 것이었다. 그가 나가자 내부 공간은 차가운 적막감만 내려앉았다. 성우는 바닥에 철썩 주저앉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몸 다 풀면 이야기해요. 우현이 너도.”
“넵!”
“저는 언제든지요.”
아놀드는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상체를 가리고 있던 그것을 벗자 통나무 같은 그의 상체가 드러났다. 셔츠로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을 본 성우마저 놀랍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제대로 한 방 걸리면 그냥 끝나겠는데?”
“안 맞으면 되죠.”
“다치지 않게 조심해.”
“설마 제 실력을 의심하시는 거예요? 저 우현이에요.”
“아니 나는 저 친구를 걱정하는 건데.”
성우는 슬쩍 아놀드를 보며 말했다.
그는 한국어로 대화하는 둘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우현을 바라보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우현도 그걸 느꼈는지 아놀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기껏 하는 게 눈싸움이냐?
오죽하면 두부가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결국 성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둘 사이에 섰다. 대련의 룰은 간단했다. 서로 다치지 않을 수준에서 알아서 하기로 했다. 좀 더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이미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아 뒤로 물러섰다.
“시작!”
그 신호가 떨어진 이후.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우현이었다.
확실히 스피드에 있어서는 그가 우세였다. 반면에 아놀드는 굳건한 맛이 있었다. 크게 질러오는 주먹은 성우가 봐도 위협적이었다.
-싸워라~ 싸워라~ 이기는 편 우리 편!
‘시끄러워. 이게 무슨 동네 개싸움도 아니고.’
-그거나 이거나.
‘네가 봤을 때는 누가 이길 것 같아?’
성우는 심심풀이 삼아 두부에게 의견을 물었다.
녀석은 잠시 고민하더니 아놀드가 이길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딱 한 대만 맞으면 끝나버릴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다르게 생각했다.
우현이 호리호리하게 보여도 제법 파워는 좋았다. 더구나 센스마저도 굉장히 뛰어난 녀석이었다. 사실 아놀드의 주먹을 피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워낙에 크게 휘두르기 때문이었다.
정말 비효율적인 모습이었다.
다른 일반인이 봤다면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지만, 성우나 우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대련은 거의 일방적인 형태로 흘러갔다. 거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풋워크를 살리는 아웃 복서 스타일. 그 역동적인 몸놀림을 흉내 내며 우현은 차근차근 데미지를 주었다.
“잠깐 스톱!”
성우가 대련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 아놀드를 향해 다가섰다.
벌써 5분이 넘었는데 일방적으로 아놀드가 당하고 있었다. 괜히 더 질질 끌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성우는 당사자의 의견을 묻기로 했다. 본인이 납득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제 테스트는 끝났는데 아직 더 보여줄 게 있나요?”
“아니요. 이게 제 한계인 것 같습니다.”
“시원시원하니 좋네요. 저는 일단 합격입니다.”
“합격이요?”
“대신 저와 이 친구 말고 다른 두 친구를 경호해주세요.”
아놀드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기 젊은 친구는 그렇다고 쳐도 성우 씨는 안 됩니다. 저희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계약된 사람들이니까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성우 씨와 대련 한 번 해봐도 될까요? 직접 확인해야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랑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우는 싱긋 웃으며 알겠다고 말했다.
안 그래도 피습을 당한 이후에 스트레스가 제법 쌓여 있었다. 자신이 아끼는 동생이 다친 것은 물론이고 자신 역시 호텔에 거의 반쯤 감금당한 기분이었다. 성우는 한두 차례 몸을 간단하게 풀고 손짓했다.
“들어오시죠.”
우당탕!
아놀드는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손을 섞기 시작한 지 단 5초 만의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혼란스러워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 일어서며 성우에게 물었다.
“방금 뭐죠?”
“뭐가요?”
“제가 갑자기 왜 쓰러진 거죠?”
“글쎄요. 제가 쓰러뜨렸으니까 그런 거겠죠.”
성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손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놀드를 쓰러뜨린 방법은 사실 택견의 한 수였다. ‘허벅밟고 무릎밟기’라는 기술인데 일반 대련에서 사용하기 꽤 힘든 것이었다. 그 기술은 상대방의 허벅지를 밟고 등 뒤로 올라 반대 발로 무릎 안쪽을 찍어 눌러 뒤로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두 가지의 동작.
그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아놀드의 입장에서는 귀신에 홀린 기분일 것이 분명했다. 그는 다시 일어나 성우에게 덤볐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성우는 택견 기술을 이용해 그를 연거푸 쓰러뜨렸다.
그러자 아놀드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도대체 무슨 기술이냐며 되물었다.
성우는 아놀드에게 간단하게 그 기술을 설명해줬다. 하지만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성우는 우현을 대상으로 직접 보여줬다. 그 모습을 보고 아놀드는 눈을 반짝였다.
“이거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글쎄요. 아놀드 씨는 지금 실력으로도 충분한데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꼭 배우고 싶어요.”
그는 굉장히 절실했다.
과거 특수부대에서 복무했을 때도 이런 무술은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온갖 무술을 경험하고 배웠지만,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누군가를 경호하는 입장이었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서 지금처럼 순식간에 제압이 가능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뭐··· 시간이 될 때 조금씩 알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경호를 맡은 나머지 두 분도 아놀드 씨와 실력이 비슷한가요?”
“부끄럽지만 저보다 조금 떨어집니다.”
“그래요?”
“하지만 사격 실력은 저보다 무척 뛰어난 친구들이에요.”
성우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사실 총을 들고 나타나는 괴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격 실력이기는 했다. 순간 성우는 모처럼 사격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호하실 때 저한테도 총을 주시나요?”
“아니요!”
“엄청 단호하게 말씀하시네요.”
“의뢰인에게 총을 맡긴다는 것은 경호의 실패를 뜻하니까요.”
“혹시 연습 사격은 해볼 수 있을까요?”
성우는 집요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황량한 곳에서 연습 사격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봤던 탓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아놀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가 추천하는 곳은 실내의 사격 연습장이었다.
“야외에서는 불가능한가요?”
“그것도 가능하죠. 대신 캘리포니아 말고 조금 더 멀리 가야 해요.”
“왜죠?”
“주마다 방침이 조금 다른데 유타나 네바다의 라스베가스가 조금 느슨한 편이죠.”
성우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바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적어도 요한이 퇴원할 때까지 그의 옆에 있을 예정이었다. 물론 퇴원이 그리 멀지 않았기에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성우는 그 자리에서 아놀드와 경호에 대한 의논을 나눴다.
하지만 쉽게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다.
성우는 자신 외에 다른 이들의 경호를 중심으로 뒀다. 반면에 아놀드는 그와 반대였다. 결국 둘은 인력을 조금 더 늘리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물론 그에 대한 비용은 성우가 낼 예정이었다. 성우는 아놀드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
1주일 후.
요한은 드디어 퇴원했다.
총에 맞았지만, 중요 부위는 피한 덕택이었다.
거의 3주 동안 옴짝달싹 못 했던 때문인지 녀석은 무척 시무룩해 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이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엄청난 병원비였다.
-와~ 대박! 무슨 병원비가 이렇게 비싸?
두부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성우 역시 그 영수증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이 정도로 비싼 줄 몰랐던 그였다. 당장 치료가 급해 묻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실제 알려주지도 않는 것이 미국 병원이었다.
뭐 이유는 분명히 있기는 했다.
각자 든 보험이 워낙 복잡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요한의 경우에는 미국에서 적용되는 보험이 없기에 조정할 수 있는 부분도 없었다. 그래서 나온 금액이... 3억이 조금 안 되었다.
-날강도가 따로 없네. 3억이 어느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러게. 이거 무서워서 병원 가겠어?’
-역시 건강이 최고다.
성우도 두부의 의견에 동의했다.
물론 그 정도의 비용은 충분히 내줄 수 있었다.
그래도 이거는 좀 아닌 것 같았다. 돈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나름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의 의료 시스템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금액이란 것이 문제였다.
왜 이런 금액이 나왔는지 항목을 살펴봤다.
중환자실 1일 사용료가 2천만 원이었다. 거기에 나중에 성우가 요한을 위해 마련한 1인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걸 아놀드에게 하소연하니 오히려 그는 생각보다 적은 편이라 했다. 그 이유는 갖가지 검사를 하다 보면 몇천만 원쯤은 쉽게 나온다는 것이었다. 보험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성우는 그 자리에서 즉시 수납했다.
원래는 우편으로 처리한다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이제 요한이 퇴원했으니 당장 이곳 LA를 떠날 생각이었다. 아직 그들을 피습한 이들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갈까요?”
아놀드가 다가오며 물었다.
그는 요즘 성우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거의 집에도 안 가고 24시간 붙어있는 수준이었다. 그 이유는 경호하겠다는 것보다 택견의 유술을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의도가 짙었다. 성우도 그걸 알고 있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그 마음을 충분히 알기 때문이었다.
“다들 잘 출발했겠죠?”
“물론이죠. 아까 비행기에 탔다는 연락 왔어요.”
“저희는 출발하기 전에 잠시 ACA에 좀 들렀다가 가죠. 늦진 않겠죠?”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괜찮습니다.”
잠시 후.
둘은 ACA 건물에 도착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의 시선이 쏟아졌다. 좀처럼 에이전시에 들어오지 않는 성우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렉스의 비서가 성우를 향해 다가왔다.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어요.”
“안내해드릴까요?”
“어딘지 알고 있으니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성우는 성큼성큼 걸었다.
사무 공간을 지나가 렉스가 앉아있는 회의실이 보였다. 환한 조명 아래 그의 머리는 무척 반짝였다. 물론 자신의 옆에 있는 아놀드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 둘을 놓고 두부는 몹쓸 농담을 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성우는 문득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조선 시대에는 탈모가 없었나?’
-명재 윤증 선생님이 초상화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겠지만, 있기는 했어. 그런데 지금과 같은 수준은 아니었지.
‘너는?’
-나는 숱이 아주 풍성해서 오히려 힘들 정도였지. 하하하!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말은 무시했다.
또 두부가 즐기는 자기 자랑 시간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겼다.
“비행기 시간도 촉박할 텐데 왜?”
“부탁할게 있어서요.”
“또?”
“제가 언제 뭘 부탁한 적이 있나요?”
렉스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기는 했다.
그래도 제법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 바로 성우였다. 이 녀석이 ACA와 계약한 이후에 벌어진 일을 떠올리면 정말 할 말이 많았다.
격투기 챔피언과 싸웠던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국에서는 소방관 옷을 입고 불길 속에 뛰어들었고 또 이번에는 총기 기습을 당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에 온갖 기인이 있다고 해도 이처럼 버라이어티한 삶은 사는 인간은 또 없을 것 같았다.
“하여튼 뭘 해주면 되는 거야?”
“사립 탐정 좀 알아봐 주세요.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솜씨 좋은 사람으로요.”
“너 설마?”
렉스는 깜짝 놀라 말했다.
그런 그를 보며 웃으며 성우는 답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무척 진지했고 매서웠다.
“당한 만큼 돌려줘야죠.”
< 광끼 -13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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