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34 >
개봉 첫날 성적.
그것을 듣고 성우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요한을 향해 재차 자신이 들은 수치가 맞는지 확인했다.
“8천만 달러?”
“아직 확정은 아니에요. 잘하면 8천 5백까지도 가능하데요.”
“예스!”
성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소파 위로 올라가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만큼 요한이 전해준 그 수치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이 정도면 박스 오피스의 상위권에 안착하는 것은 확실했다.
지금까지 불안했던 이유.
그것은 자신이 아시아인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아시아인이 주인공으로 성공한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거의 없었다. 브루스 리 이후에 사실상 처음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었다.
-꺄아아아!!! 도대체 한국 돈으로 그게 얼마야?
두부의 반응도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 돈이 모두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아크로 첫 편을 계약하면서 러닝 개런티는 넣지 않았다. 그래도 관객 수가 많을수록 좋은 일이었다. 향후 촬영될 남은 2편의 몸값이 올라가는 소리가 벌써 들려왔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제 안심 좀 되죠?”
“그래. 갑자기 배고파지네.”
“피자라도 시킬까요?”
“오늘 같은 날에 그런 거를 먹을 수는 없지.”
어느새 최정과 우현도 내려왔다.
특히 같이 출연했던 우현은 무척 초췌해 보였다. 내려오기 전에 요한한테 이야기를 들었는지 녀석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무척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 영화 하나만 보고 미국에서 1년 가까이 고생한 녀석이었다. 앞으로 아크로의 동생으로 활약이 예고되어 있다지만, 그게 확실하게 보증되는 미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늘어나는 비중에 비해 실력이 늘지 않는다면 도태될 것이 분명했다.
“좋은 날에 울지 마.”
“안 울어요. 누가 울었다고 그래요.”
“늦었지만, 다 같이 나가서 축하주나 할까요?”
“지금?”
최정이 시계를 바라봤다.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어지간한 식당들은 이미 문을 닫으려 준비할 시간이었다. 성우도 그걸 눈치채고 간단하게 홈파티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먹거리는 냉장고에 충분히 있었다. 직접 요리하는 것이 조금 귀찮을 뿐이었다.
30분 후.
식탁 위에는 성우가 뚝딱 차린 음식이 올려졌다.
워낙 급하게 한 터라 즉석요리도 몇 개 보였지만,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마지막으로 김치찌개가 놓이자 다들 자리에 앉았다.
“와~ 그 짧은 시간 동안 이게 가능하네요.”
“우현이 너는 두 배로 먹어. 충분히 자격 있어.”
“감사합니다.”
“아! 잠시만. 오늘은 축하하는 자리니까 술이 빠질 수 없지.”
성우는 와인냉장고로 향했다.
그곳은 일종의 보물 창고에 가까웠다.
그 안에는 온갖 와인과 위스키가 채워져 있었다. 이번에 월드 투어를 다니며 선물 받은 것도 있고 성우가 취미로 모은 것도 제법 되었다. 수많은 병들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마침내 하나를 선택했다. 병의 라벨에는 시가를 피우고 있는 할아버지가 그려져 있었다.
-퍼피 반 윈클즈?
23년산의 무척 귀한 몸이었다.
성우는 그걸 쥐고 식탁으로 향했다.
가격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것은 그 역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해에 고작 7,000 케이스(21,000병)만 출하되는 술이지만, 워낙 인기가 좋아 출하 시기마다 긴 줄을 서야 겨우 살 수 있는 버번위스키였다. 덕분에 실제 판매가는 249달러에 불과했지만, 막상 구하려면 몇 배 이상은 줘야 했다.
“오~! 그거 드디어 꺼내는 거야?”
“그게 뭔데요?”
“역시 형만 이 술의 가치를 알아보는군요.”
“비싼 거예요?”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요한과 우현.
둘과 달리 최정만은 눈을 반짝이며 성우의 손에 들린 병을 바라봤다. 그 역시 이 술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차였다. 보통의 술이라면 별도의 통보 없이 그냥 마셔도 성우가 신경도 안 쓰겠지만, 차마 손댈 수 없었던 몇 병 가운데 하나였다.
“아마 저거 구하려면 2~3천 달러 정도는 줘야 할 걸?”
“허억!”
“무슨 술이 그렇게 비싸요.”
“어후 저는 그런 거 못 먹어요. 먹다가 체하겠어요.”
“오늘을 축하하기에는 이게 딱 적당해.”
성우는 주저 없이 뚜껑을 비틀었다.
그러자 짙은 향이 올라와 그의 코를 강타했다. 그것을 본 요한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온더록스 잔과 각얼음을 꺼내왔다. 다들 취향이 스트레이트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서서히 잔이 채워졌다.
투명한 얼음을 타고 짙은 갈색의 알코올이 흐른다. 어느덧 마지막 잔을 채울 무렵에 누군가 대문 앞에서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오기로 했어?”
“아니요.”
“제가 나가볼게요.”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에 우현은 렉스와 함께 들어왔다. 렉스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성우를 껴안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덕분에 그의 반짝이는 머리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엄청 부담되는 장면이었다.
“대박! 이 정도 스코어가 나올 줄은 몰랐어.”
“이거는 좀 놓고 말씀하시죠.”
“마음 같아서는 키스라도 해주고 싶은데 참겠어.”
성우는 그 말을 듣고 그를 밀어냈다.
갑자기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렉스는 그런 성우의 반응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식탁 위에 놓인 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호기롭게 외쳤다.
“다음 작품 계약으로 우리 대박 내자!”
*
오프닝 데이 이후.
아크로는 박스 오피스의 정상을 차지했다.
혹자는 마벨 스튜디오의 영화이기 때문이라 평가를 낮추기도 했다. 그러나 대세가 아크로라는 것은 의견이 없었다.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흥행의 가속도는 높아졌다.
물론 이것이 미국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동시 개봉된 영화는 순식간에 온갖 차트 1위에 올라섰다. 특히 한국과 아시아 내에서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애초에 주연인 성우의 활동 기반이 이쪽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대만 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개봉 1주 후, 아크로의 압도적인 박스 오피스 1위 유지.]
[북미에 이어 아시아, 유럽에서도 순항 중인 아크로]
[새로운 유형의 히어로! 대중이 열광하는 심리는?]
[할리우드에 부는 아시아 돌풍]
성우의 아크로바틱한 액션.
흥행을 이끄는 가장 큰 요소가 그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액션의 수준은 지금까지 마벨에서 보여주지 못한 수준의 것이었다. 과거 태국의 어느 무술 배우가 돌풍을 일으켰던 영화가 떠오를 정도였다. 거기에 마벨의 촬영팀과 CG까지 합치니 그 시너지 효과는 대단했다.
그 흐름은 할리우드의 거리에서도 보였다.
벌써 아크로의 복장을 입고 거리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 최근 인기가 좋은 캐릭터이니 당연히 일이었다. 그들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팁을 받았다.
슈트를 입은 한 명의 아크로.
그는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다 어디론가 향했다. 그는 상당한 거리를 걸어 으슥한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주변을 확인한 이후에 그는 가면을 벗었다.
“아오··· 힘들다.”
머리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
그것이 그의 고충을 그대로 대변했다.
30대 초반의 백인 남성의 이름은 제프. 올해로 벌써 4번째 이 생활을 하고 있는 거리 공연자였다.
타악.
제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이 흡연 욕구였다. 코스프레를 하기 때문에 담배도 마음껏 피우지 못했다. 만약 슈트를 입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면 단번에 항의가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그래도 오늘은 성적이 좋네.”
기분 좋은 웃음이 났다.
모처럼 주머니는 두둑했다.
적어도 수백 달러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한 사람당 1~2달러씩 받았지만, 워낙 요즘에 아크로의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제프는 과거에 입었던 여러 히어로 복장보다 이 슈트가 마음에 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색감이었다.
노란색의 슈트는 멀리서도 눈에 띄기 마련이다. 바로 이전에 입었던 검은 슈트는 워낙 눈에 띄지 않아 나름 고생했던 그였다. 더구나 캐릭터의 인기도 많이 꺼져서 수입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때 골목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담배를 물고 그쪽을 바라본 제프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곳에 서 있는 남자는 최근 죽어라 피해 다니던 남자였다. 제프는 위험 신호를 느꼈고 그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퍼억.
복부를 강타하는 주먹.
그 통증에 저절로 몸이 굽어졌다.
제프는 반대편으로 몰래 다가온 다른 남자의 존재를 그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입구를 가로막은 남자와 한패였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해야 했다. 도망칠 곳도 없는 이 골목에 온 것이 실수였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조금 더 멀더라도 다른 골목에 가서 담배를 피웠을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이 벌겠다는 욕심이 그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멀찍이 입구에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조엘 킨나만.
그는 이 거리의 숨겨진 주인이었다.
화려한 거리의 뒤편에는 온갖 향응과 마약 그리고 사채가 숨어 있었다. 그는 어슬렁거리며 걸어와 제프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제프의 얼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어이 제프. 요즘 얼굴 보기 힘들어.”
“아구구. 말로 하자고.”
“그럼 비즈니스 이야기를 해볼까? 나한테 빌려 간 돈은 언제 갚을 거야?”
“며칠만 시간을 줘.”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의 얼굴에 주먹 몇 방이 더 꽂혔다.
한 대 맞을 때마다 제프는 눈앞이 번쩍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상황이라 맞은 쪽보다 반대편 얼굴이 갈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자칫 이렇게 맞아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심이 들었다.
“잠···잠깐! 오늘 번 돈 다 줄게. 그러니 제발.”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잖아. 내가 강도도 아니고 말이야.”
“부탁이야. 딱 열흘만 시간을 줘.”
제프는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그 순간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떠올랐다.
만약 아크로처럼 뛰어난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여겼다. 저 녀석들의 품에 총이 있는 것을 뻔히 아는 그로서는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얼마인지 꺼내봐.”
제프는 서둘러 슈트를 열었다.
그리고 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바닥에 내려놨다. 아까의 예상대로 수백 달러는 되는 것 같았다.
“오호. 제법 많은데. 그런데 이걸로 이자나 낼 수 있겠어?”
“원금이 얼마인데 이자가 그렇게 높아. 나는 천 달러밖에 안 빌렸어.”
“지금은 3천 달러야.”
“말도 안 돼!”
“그러게 누가 도망 다니래?
조엘은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주웠다.
그것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 쭈욱 빨아들였다. 그리고 연기를 내뿜으며 담배로 제프의 목을 지지려 했다. 하지만 조엘은 그대로 멈춰야 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보스 갑자기 왜 그래요?”
“이상하네. 누가 보고 있는 기분인데.”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조엘은 주변을 둘러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3층 건물 위에 걸터앉은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는 무릎을 꿇고 있는 제프와 똑같은 노란 슈트를 입고 있었다.
“어이 거기.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갈 길이나 가지.”
“싫은데.”
“하여간 코스프레하는 녀석들이란. 그런 촌스러운 옷을 입고 히어로가 되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조엘은 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그를 겨눴다.
그 총은 그가 평소 즐겨 사용하는 콜트 1911이었다. 콜트 특유의 검은색의 바디는 무척이나 위협스러웠다. 그제야 건물 위에 앉아있던 남자도 반응했다.
“워~ 알겠으니 그것 좀 치워.”
“시끄럽게 하기 싫으니까 어서 꺼져!”
“알았어.”
건물 위의 남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제야 조엘은 총을 다시 품속에 넣었다.
제프를 상대로 그걸 사용할 이유는 없었다. 이 녀석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런다고 돈이 저절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조엘은 옆에 멍하니 서 있는 부하를 시켜 돈을 줍게 했다.
“얼마나 돼?”
“380달러 정도는 되는 거 같아요.”
“좋아. 제프 이 정도면 이자는 되는 거 같네.”
“알았어. 나머지 돈은 최대한 빨리 갚을게.”
“그럼 이번 주말까지 시간을 줄게. 그 정도 시간을 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그렇지 않아?”
그제야 조엘은 제프의 멱살을 풀어줬다.
그리고 일어서려던 찰나 옆에서 거친 신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며 그쪽을 보니 덩치가 산만 한 자신의 부하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노란 옷을 입은 아까의 그 남자가 나무 막대기 하나를 쥐고 서 있었다.
“미친 새끼!”
조엘은 다시 품에 손을 넣었다.
이번에는 정말 쏠 생각을 품었다.
하지만 그걸 꺼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타악!
정확하게 팔목을 노리는 찌르기.
그걸 정확하게 맞는 순간 조엘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찌릿한 고통이 손목이 골절된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그리고 곧 뒤통수에 고통을 느끼며 그는 기절하고 말았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옆에 있던 제프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친구들 깨어나기 전에 가봐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그것까지 알려드리기는 조금 어렵네요. 그저 같은 아크로 끼리 도운 거라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그 골목을 벗어났다. 한참 말없이 걸어 그 블록을 벗어난 이후에야 그는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침내 마스크를 벗었다.
< 광끼 -13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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