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32 >
호텔의 입구.
그곳에는 제법 많은 카메라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기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일반인들이 더 많이 보였다. 성우는 그것을 보고 손을 흔들어줬다. 그러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크로다!”
“미스터 유. 사인 한 장만 해주세요.”
“오늘 정말 멋졌어요.”
“혹시 다른 도시에서도 다시 진행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성우는 말없이 웃었다.
그런 것을 섣불리 말하기 어려웠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서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인터뷰 시간이 촉박하여 그럴 수는 없었다. 성우는 어린아이들에게 서둘러 사인 몇 장을 해주고 차에 올라탔다.
차에는 이미 에스테반이 타고 있었다.
그는 성우가 타자 운전석에 앉은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탔으니 출발하죠.”
그제야 차가 움직였다.
모처럼 에스테반의 표정은 무척 좋았다.
그 역시 북유럽 홍보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공항에 취재진 하나 안 나올 줄은 몰랐던 그였다. 마벨의 홍보 투어는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케이스는 또 처음이었다.
총책임자로서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다.
모처럼 진급해서 하나의 팀을 책임지게 된 그였다. 오죽하면 자존심까지 접어 두고 기존에 투어를 책임지던 담당자에게 전화하려 했다. 그의 머리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후의 퍼포먼스가 통한 것 같았다.
안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이 몰릴 이유가 없었다. 마침내 북유럽권에 작지만 의미 있는 바람이 부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성우 씨가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그러게요.”
“사실 저는 반신반의했어요. 아마 이 성과가 본사에 알려지면 앞으로 월드 투어의 형태도 많이 바뀔 것 같네요.”
“아하하. 벌써 배우들의 원성이 들리네요.”
아마 킬리안부터 난리를 떨 것이다.
녀석은 요즘 [레오파드 2]를 찍을 준비 중이었다.
아마 자신의 영화가 개봉할 때 정도면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갈 것 같았다. 그 바쁜 와중에 얼마 전에 있었던 자신의 팬미팅에 참여해준 것이었다.
20분 후.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오늘 인터뷰를 할 장소는 식당이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맛있는 향이 성우를 괴롭혔다. 시계를 슬쩍 보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북유럽에 와서 가장 적응 안 되는 것이 바로 극야였다.
해가 지지 않는 기간.
극야는 정말 극악한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가장 밤이 길었던 순간은 지났지만, 해가 뜨는 순간이 너무 짧았다. 덕분에 생체 시계도 살짝 고장이 난 기분이었다. 그런 그를 현지 방송국의 스태프가 반겨주었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제가 늦은 거는 아니죠?”
“딱 맞춰서 잘 오셨어요.”
손을 내미는 남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악셀이라 밝혔다.
성우가 미리 알아본 바로는 스웨덴에서 제법 인기 좋은 리포터였다.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아 곧바로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오늘의 인터뷰는 식사와 함께 하는 컨셉이었다.
“이 요리는 이름이 뭔가요?”
성우는 자신의 앞에 높인 요리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접시 위에는 생선 토막이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제법 잘 꾸며놓기는 했지만, 왠지 구룡포에서 먹었던 과메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하하. 조금 생소한 음식이죠?”
“조금 그렇네요.”
“실탈릭(Silltalrik)이라고 절인 청어로 요리된 음식이에요. 혹시 거부감이 드시면 다른 거로 내오라고 할까요?”
“아니요. 저는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요. 사실 한국도 청어를 말려 먹기도 하죠.”
성우는 일단 하나를 먹어봤다.
옆에서 악셀이 알려주는 데로 삶은 달걀을 곁들여서 하나를 씹어봤다. 생각보다 깔끔한 맛이 좋았다. 보이기는 과메기와 비슷했지만, 식감은 아주 달랐다.
“오~ 좋아요. 상당히 맛있는데요.”
“그럼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할까요?”
“어이쿠 제가 음식에 한눈을 팔았군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좋습니다. 첫 월드 투어를 스웨덴부터 한 이유가 있을까요?”
악셀의 질문에 성우는 미소지었다.
그 이유를 사실대로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이미 그런 질문이 나올 것이란 예상은 했었다. 어차피 뻔한 내용이라도 립서비스가 필요했다.
“제대로 된 겨울을 만날 수 있는 곳이어서 그렇죠.”
“그럼 제때 오신 것 같네요. 이제 극야도 끝나가고 있고 본격적인 겨울이 다가오고 있죠.”
“제가 사는 한국에도 겨울이 춥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하면 봄이었더군요.”
“혹시 오로라는 본 적이 있나요?”
“아쉽지만 아직은 없어요. 지금이라도 나가면 볼 수 있을까요?”
성우의 개인적인 바람이었다.
이 시기에 북유럽에 왔는데 오로라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만약 이번에 보지 못하면 개인적으로 와서라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악셀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성우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스톡홀름에서는 오로라 보기가 어려워요. 조금 더 위로 올라가야 하죠.”
“그렇군요.”
“스케줄이 가능하시면 이번 기회에 가보시길 권해드리고 싶은데 불가능하겠죠?”
성우는 슬쩍 에스테반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안된다고 했다. 성우도 스케줄이 빡빡한 것을 알기에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두부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못 보면 나중에 꼭 오자.
‘알았어.’
-정말 약속한 거다. 나 오로라 보는 게 꿈이야.
두부는 신신당부했다.
성우는 누차 알겠다며 답했다.
그 이후에도 악셀의 질문은 이어졌다.
당연히 질문 대부분은 마벨 스튜디오의 새로운 영웅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과거에 잠시 출연했던 유니버스 시리즈에 대한 것도 상당했다.
“혹시 그럼 다음 유니버스 시리즈에 출연하게 되시나요?”
“그건 아직 확정된 것이 없어요.”
“아쉽네요. 레오파드와 아크로의 대결에 제가 무척 관심이 많거든요.”
“저도 마찬가지로 아쉬워요.”
아직 그 내용은 정해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 정해졌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밝히기는 어려웠다. 이번 투어에서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범위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 상황에서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어떻게 올리느냐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레오파드를 연기하는 킬리안 터커와 매우 친하다고 알려져 있어요. 맞나요?”
“물론이죠. 서울에서도 함께 살았죠.”
“같은 집에서요?”
“그건 아니고 바로 앞집이었어요. 문을 열면 바로 그 친구의 현관문이 보였죠.”
“베스트 프렌드였나 보군요.”
“사실 저는 거기로 이사 오는지 알지도 못했어요.”
성우는 그날의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악셀은 무척 흥미롭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둘이 같이 익히고 있다는 위례검에 대한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저도 그걸 배워보고 싶군요. 혹시 알려주실 수 있나요?”
“짧은 기간 내에 배우기는 어렵죠. 서울에 오시면 위례검을 익히실 수 있는 도장이 있어요.”
“그럼 저도 킬리안처럼 서울로 가야겠군요.”
“서울은 언제나 여행자를 환영합니다.”
“하하하. 실례지만 서울의 홍보 대사를 맡고 계신 거는 아니시죠?”
고개를 저었다.
서울에서 그런 위촉장 하나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악셀은 다른 질문을 하나 더 꺼냈다.
“이번 영화에 캐스팅된 비화도 재미있었어요.”
“사실 평범하지는 않았죠.”
“미국이나 한국도 아니고 콜롬비아에서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그곳에서 한국의 방송 프로그램을 촬영 중이었어요. 그런데 마침 그곳에 캐스팅을 담당하시는 분이 휴가차 와계셨죠.”
성우는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사실 당시를 생각해보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자신은 그걸 움켜잡았고 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어쩌면 그때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3번 주어진다던 찬스가 아니었을까 생각되었다.
“처음에 캐스팅 제안을 받으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드디어 저한테 어울리는 역이 왔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이유에서요?”
“제가 그 당시에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부분이 액션이었거든요.”
둘의 대화가 이어질 무렵.
마침내 본격적인 메인 디쉬가 나왔다.
연어와 감자가 주가 되는 그 음식의 이름은 무척 길었다. 성우는 악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연어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오! 이런 맛이···
연어 스테이크.
그것은 한국에서도 종종 먹었다.
성우가 직접 요리해 먹었던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현지 쉐프가 해주는 맛은 또 색달랐다. 입에서 터지는 상큼한 맛이 느끼함을 잡아줘 인상적이었다. 성우가 반쯤 먹을 때 악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사실 조금 더 먹고 싶은데 참겠어요.”
“고맙습니다. 사실 오늘 오후에 거리에서 보여주신 퍼포먼스에 많은 관심이 쏠렸어요.”
“다행이네요. 슈트만 입고 돌아다니는데 엄청 추웠거든요.”
“이곳의 겨울을 우습게 보시면 안 돼요.”
“제가 그래서 큰코다쳤죠. 그래도 무척 재미있었어요.”
성우의 말에 악셀은 웃었다.
사실 그로서는 이 동양인 배우에게 호감이 갔다.
지금까지 마벨 스튜디오에서 여러 배우가 방문했지만, 그와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준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물며 인터뷰만 간단히 응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티켓 파워가 낮은 나라.
그것은 악셀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었다. 매번 인터뷰할 때마다 뭔가 겉핥기식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배우는 자신이 직접 원해서 그런 퍼포먼스를 했다고 들었다. 악셀은 그 생각을 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혹시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퍼포먼스를 하실 생각인가요?”
“아직은 딱히 계획이 없습니다. 하지만 팬들이 원한다면 못할 이유도 없죠.”
“아쉽네요. 스웨덴에서만 보여준 특별한 것이라 여겼거든요. 그런데 굉장히 익숙해 보이던데 파쿠르는 따로 익히신 건가요?”
“아니요.”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영상 몇 개를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런 말을 하자 악셀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액션에 있어서는 성우는 천재에 속하는 것 같았다. 아니 올림픽에 체조 선수로 나가도 승산이 있어 보였다. 그런 생각을 밝히자 성우는 손사래를 쳤다.
“어휴 말도 안 되죠. 그분들은 평생 연습해서 나가시는 건데 제가 명함도 못 내밀죠.”
“한국은 유망한 메달리스트를 영화계에 뺏긴 거네요.”
“하하하. 사실 이런 종류의 촬영을 예전에 해본 적이 있어요.”
“어떤 거죠?”
성우는 과거 촬영했던 추격전을 설명했다. 제한된 공간과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도망 다니는 컨셉. 그것을 들은 악셀은 곧장 뭔가가 떠올랐다.
“마치 좀비 떼를 피해 다니는 공포 영화와 비슷하군요.”
“제 팬들이라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화기애애했죠.”
“아차! 제 실수였네요. 팬에게는 무척 재미있는 선물이 되었을 것 같아요.”
“방송되었을 때 많은 사랑을 받았죠.”
성우는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인터뷰는 30분 동안 더 이어졌지만 만족스러웠다.
특히 마지막에 나온 디저트를 먹었을 때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대박이었다. 멜론과 같은 녹색 외형도 무척 예뻤는데 이름이 ‘공주님 케이크(Prinsesstarta)’라고 악셀이 설명해줬다. 사실 이 케이크는 과거 왕궁의 공주님이 먹던 디저트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친 이후.
성우는 다시 호텔로 향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성우는 자신의 투어가 어떻게 바뀔지 상상도 못 했다. 그가 보인 퍼포먼스와 추격전에 대한 이야기는 전 세계에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향후 그가 향할 나라에서 들어오는 요청은 대부분 비슷했다.
[아크로 퍼포먼스 요청서]
각 나라에 세워진 마벨 스튜디오.
그곳에서 다들 하나같이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덕분에 성우의 일정은 더욱 빡빡해졌지만, 호응은 대단했다. 가장 특별했던 경험은 바로 도쿄에서의 경험이었다.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놀이동산.
그곳을 통째로 놓고 추격전을 펼칠 때는 성우조차 두근거릴 정도였다. 더구나 팬들은 자진해서 좀비 분장을 하기도 했다. 거의 할로윈데이를 능가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아크로로 변신한 성우를 잡지는 못했다. 워낙 구조물이 복잡하고 많은 곳이라 다행이었다.
개봉을 1주일 앞둔 3월 초.
성우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마지막 투어 일정이었다. 성우는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곳에서는 엄청난 환호성이 터졌다. 그 순간 인터넷에서는 성우에 대한 이야기가 곧장 포털사이트의 메인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국에 도착한 첫 한국인 히어로!]
[노란 슈트를 입은 남자. 유성우가 한국에 돌아오다.]
[한국이 낳은 갓배우. 과연 아크로의 예상 성적은?]
< 광끼 -13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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