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31 >
하얀 눈이 가득한 세상.
이곳은 마치 완벽하게 다른 세계였다.
순백의 색을 제외한 다른 색은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도 유독 눈에 띄는 색이 하나 있었다. 마치 눈송이 아래 피어난 개나리꽃 같았다.
아크로의 노란색 슈트.
그것을 입은 성우는 눈 속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제법 높은 건물에 앉아 한가롭게 시내를 바라봤다. 어서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슈트의 두께가 제법 두껍다는 것이었다. 지난여름에 있었던 촬영 기간 동안 땀띠 등의 온갖 고생을 하게 만들었던 그 재질이
이제는 고맙게 여겨졌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왕에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안 춥냐? 나는 왜 이렇게 추운 거지.
‘당연히 춥지! 몸도 없는 녀석이 엄살은.’
두부의 엄살은 여전히 심했다.
성우는 사실 추위를 꽤 많이 탔다.
북유럽의 추위가 이 정도인 줄은 전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어서 이것을 마치고 싶었다. 그리고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도수 높은 술 한 잔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공항에서 보인 모습.
그것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설마 그 정도로 무관심할 줄 몰랐던 성우였다. 그 덕분에 이렇게 사서 하는 고생을 마다치 않고 있었다. 자신이 단독 주연인 영화이기에 뭐라도 해야 했다. 앞으로 두 편이나 더 찍어야 하는데 시리즈의 처음부터 고꾸라질 수는 없었다.
삐이익.
마침내 울린 신호.
그것을 듣고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내 곳곳에 카메라 배치가 완료된 것이었다. 성우는 본격적으로 몸을 풀었다. 잠시 앉아있는 동안에 몸이 뻣뻣해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잠시.
성우는 도심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다들 깜짝 놀랐다.
갑자기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그런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더구나 성우가 그저 달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단과 난간.
장애물은 하나의 소재였다.
성우는 그것을 딛고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가 뛰어오를 때마다 눈송이가 하늘에 수놓아졌다. 비현실적이다 못해 예술과 같은 장면이었다.
“저건 도대체 뭐야?”
“촬영 중인 거 아닐까?”
“주변에 카메라도 없는 것 같은데.”
“어! 저 노란 슈트면 얼마 후에 개봉되는 마벨 영화 그거 아냐?”
“나는 잘 모르겠어. 그런 영화가 있어?”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확실한 것은 한 가지가 있기는 했다.
순식간에 스쳐 간 성우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성우와 이번 투어의 총책임자인 에스테반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다.
눈밭 위에서 달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특히 높은 곳을 위주로 달리는 것이 파쿠르였다. 당연히 에스테반은 처음 성우의 제안을 듣고는 단번에 거절했다. 자칫 지금 다치면 앞으로 있을 투어 일정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성우도 사실 그걸 우려했다.
하지만 해결책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바로 그것은 슈트의 밑창을 바꾸는 것이었다. 확실히 북유럽답게 그런 용품은 생각보다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다만, 탁월한 접지력을 얻은 대신에 잃은 것도 있기는 했다. 그것은 바로 쿠션이었다.
저벅!
한 번 뛰어올라 떨어질 때.
그때마다 발바닥이 얼얼했다.
꽁꽁 얼어붙은 대지는 딱딱했고 그 충격은 그대로 성우에게 전해졌다. 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무릎이 아작났을 것이었다.
‘아이고 무릎이야.’
*
같은 시각.
조나스는 한껏 심통이 나 있었다.
엄마인 엠마는 그런 조나스를 혼냈다. 그 이유는 바로 마트에서 아들이 어리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미 받았잖아.”
“그건 엄마가 사준 게 아니라 산타 할아버지가 준 거잖아요.”
“자꾸 엄마 말 안 들으면 산타 할아버지한테 이른다. 그럼 올해는 선물 못 받을 텐데 괜찮아?”
“칫! 치사하게.”
조나스는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애꿎은 눈사람이 쓰러졌다.
그런 아들을 보며 엠마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실 그녀라고 아들이 원하는 것을 사주기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나스가 고른 물건은 생각보다 비쌌다.
아직 조나스의 가방은 쓸만했다.
사준 지 1~2년도 안 됐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500크로나(6만 원)를 주고 하나를 더 살 필요는 없었다. 엠마는 거리에서 아들과 다투기 싫어 다독이기 시작했다.
“대신 엄마가 그거랑 똑같은 풍선 사줬잖아.”
“그거랑 이거랑 비교가 안 되잖아요. 내가 애도 아니고.”
“너 아직 애 맞거든.”
“그래도 난 그 가방 꼭 가지고 싶었어요.”
“그게 뭐 예쁘다고 그러는지 엄마는 이해가 안 돼.”
별 하나 그려진 동그란 방패 모양.
그녀의 눈에는 그 가방은 허세에 불과했다.
실용적인 것을 가장 최고로 치는 그녀였다. 당연히 그 가격은 절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문제는 아들이 그 마벨 스튜디오의 영웅들에게 홀딱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봤을 때 예쁘지 않아요?”
“너 자꾸 그러면 앞으로 그런 영화 못 보게 한다.”
엠마는 최후통첩을 했다.
더는 아이에게 끌려가기 싫었다.
사실 조나스가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애 아빠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누가 부자지간이 아니라고 할까 봐. 둘은 그런 영화에 홀딱 빠져 있었다. 조나스는 엄마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 한다면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자신은 축복받은 편이었다.
마벨 스튜디오의 영화는 11세 관람가였다.
스웨덴이 이런 쪽에서 매우 관대한 편이라 이 정도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13세 관람가라는 것을 조나스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은 조나스가 그걸 보는 것 자체가 사실 불법이었다.
“에이··· 알겠어요.”
조나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앞서 걷기 시작하는 엄마를 따라 걸었다. 눈물이 글썽였지만, 조나스는 꾹 참았다. 여기서 울면 더 비참할 것 같았다. 사실 엄마가 사줄 거란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 새로운 학기에 그 가방을 메고 가고 싶었는데 아쉬울 뿐이었다.
그 순간.
조나스는 갑자기 휘청였다.
바닥에 쌓인 눈 때문에 못 봤던 빙판 때문이었다. 뒤로 크게 넘어갈 뻔했지만, 겨우 자세를 잡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미 아이의 손에서 풍선은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
조나스는 엄마를 불렀다.
엠마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고 혀를 찼다.
하늘 위로 두둥실 날아가는 풍선을 그녀도 발견한 것이었다. 아들이 자신을 불렀지만, 그녀라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풍선은 이미 자신의 손에 닿지 않을 곳에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건물 위에서 뛰어올랐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 사람은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허공을 걷듯이 날아간 그는 방패 모양의 풍선을 낚아챘다. 그리고 3층 높이의 반대편 건물로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엠마는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엄마. 조금 전의 그거 봤어요?”
“어···”
“대박!”
조나스는 그 짧은 사이.
그 정체불명의 남자를 알아봤다.
노란색의 슈트를 입은 그는 딱 봐도 ‘아크로’였다. 이미 원작 만화는 질리도록 본 조나스였다. 3층 건물 높이에서 반대편 건물로 뛰어넘어 가다니 환상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란색의 슈트를 입은 남자는 건물 외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성큼성큼 뛰어내리는 모습.
그것을 보고 조나스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뭔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이의 걱정과 달리 너무나 쉽게 바닥에 도착했다. 그 모습은 한 마리의 다람쥐를 보는 기분이었다.
“네 풍선 맞지?”
“감사합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아크로는 쿨하게 등을 돌렸다.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멈춰야 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풍선을 받은 아이가 급하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매우 간절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크로 잠시만요! 제발 부탁인데 사진 한 장만 찍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엄마! 어서 사진 찍어줘요.”
“어? 알겠어.”
엠마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조나스가 그녀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쥐여줬다. 그리고는 서둘러 그 노란 슈트의 남자 곁으로 다가가 섰다.
“하나~ 둘 셋!”
찰칵.
두어 장의 사진을 찍은 이후.
그 남자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엠마는 조나스에게 그 남자의 정체를 물어봤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조나스는 웃었다.
“엄마. 아크로 몰라?”
“네 아빠나 알지. 나는 그런 영화 잘 안 보잖아.”
“다음 달에 개봉하는 영화 주인공이에요.”
“그럼 저 사람이 영화배우야?”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조나스는 핸드폰의 사진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아크로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한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던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서둘러 SNS에 올렸다.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Jonas : 방금 마벨 스튜디오의 새로운 히어로. 아크로를 시내에서 만났어!]
[#마벨 스튜디오, #아크로, #스톡홀름, #LOL, #Keep it up!]
그 반응은 뜨거웠다.
친구들은 조나스를 부러워했다.
그 또래에게 마벨의 히어로들은 대세 중의 대세였다. 그래서인지 댓글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Farren : 개부러워!]
[Walton : 어디로 가면 볼 수 있어? 나 지금 집에서 나왔어. 빨리!]
[Chaz : 나도 지금 찾아보고 있는데. 안 보여.]
[Delwyn : 조나스! 어서 말해줘. 아크로 어디 가면 볼 수 있어? 알려주면 내가 게임기 하루 빌려줄게.]
하지만 조나스는 하나씩 답을 해줄 수 없었다.
어서 안 따라 오냐는 엄마의 눈총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걸으면서 핸드폰을 하는 것을 제일 싫었다. 재빨리 조나스는 주변을 둘러보고 한 문장을 작성한 이후에 전송 버튼을 눌렀다.
[Jonas : 쉐라튼 호텔 부근!]
그것을 적은 이후.
조나스는 서둘러 엄마를 향해 달렸다.
그러자 손에 잡혀 있던 풍선이 출렁거렸다. 아이가 남긴 게시글은 순식간에 온라인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과거 한국에서 펼쳐진 추격전 못지않은 열기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북유럽 특유의 호들갑 떨지 않는 문화가 있지만, 그것이 젊은 세대까지 폭넓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아크로가 스톡홀름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계속 SNS에 올라왔다.
[### : Gamla Stan 지역에서 발견! 아크로 겁나 멋짐.]
[### : 와 쩔어! 파크루 1위 영상을 예전에 봤는데 그거 못지않음.]
[### : (영상 첨부) 이것 봐. 건물 위에서 뛰어내리는 데 내 심장도 함께 덜컹하며 떨어져 버렸어.]
[### : 혹시 스턴트맨 아닐까?]
[### : 글쎄. 마스크를 벗지 않아서 모르겠어. 하긴 아직 아크로를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도 모르니 의미 없다.]
그렇게 스톡홀름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성우는 그것도 모르고 시내를 계속 뛰어다녔다.
거의 2시간 가까이 뛴 덕분에 추위는 이미 가신 지 오래였다. 오히려 슈트 안쪽은 후끈거릴 정도였다. 마침내 광장 주변의 성당에서 다섯 번의 종소리가 울리자 성우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자 주차하고 있던 밴의 문이 열리며 최정과 요한이 맞아주
었다.
“수고했어. 어서 이거 덮어.”
“여기 따뜻한 커피요.”
“고마워.”
하얀 김이 피어나는 커피.
그것을 마시기 위해 성우는 마스크를 벗었다.
그러자 땀이 흥건한 얼굴이 나타났다. 2시간에 불과했지만, 넘어지거나 추락할까 봐 긴장한 탓에 무척 피로했다. 성우는 커피는 한 모금을 마시자 그 긴장감이 사르르 풀려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반응은 어때?”
“SNS에서 꽤 반응이 좋았어요. 그런데 대부분 스웨덴어라 못 알아 먹는 게 함정이죠.”
“일단 언급이라도 되니 다행이네.”
성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노력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그것만큼 허무한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에스테반이 문을 열고 차안으로 들어왔다.
“고생했어. 저녁 먹고 현지 언론사와 인터뷰 있는데 괜찮지?”
“거의 시간 단위로 쪼개서 가네요?”
“지금은 그나마 여유 있는 거야. 나중에 북미나 네 활동 영역인 아시아권에 가면 30분 단위로 인터뷰 다녀야 해.”
“벌써 아찔한데요.”
“장기 레이스이니 컨디션 조절 잘 하고. 일단 가서 씻어.”
인터뷰를 위한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성우는 알겠다며 답을 했다. 그런 이후에야 차는 그곳에서 출발해서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평상복을 입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오늘 예정된 마지막 인터뷰였다.
평소처럼 호텔 밖으로 나서던 성우는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호텔 앞이 가득찰 정도로 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이건 또 뭐야?
< 광끼 -13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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