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30 >
성우의 선택.
그것은 러닝 개런티였다.
사실 이걸로 그가 손해 본 경우는 없었다.
과거 [왈우]에서도 이 조항 덕분에 수입이 배나 늘어나기도 했다. 성우는 그 카드를 다시 꺼내기로 했다.
“몸값이 문제라면 낮출게요.”
“그럴 필요 없어.”
“물론 제가 무턱대고 낮출 필요는 없죠. 대신 러닝 개런티를 기존에 비해 훨씬 더 높여주세요.”
사실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50일 후에 있을 아크로의 개봉까지 버티기만 해도 될 일이었다. 만약 개봉 후 흥행에 성공할 기미가 보이기만 해도 적지 않게 더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조건에는 아크로의 흥행이 전제되는 것이지만, 성우는 그 영화가 망할 거란 생각은 단 1초도 해본 적
이 없었다.
마벨 스튜디오의 팬덤.
그것은 적지 않은 영향력이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내놓은 영화 가운데 대박 난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영화 한편으로 1조 이상의 흥행을 올린 경험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버스커]의 제작사에서는 그 상황을 보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벌써 향후 돈의
분배를 위해 치열하게 숫자 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로 바꾸려고?”
“400만 달러에 찍고 월드 박스오피스 기준으로 1억 달러를 넘을 때마다 500만 추가 지급은 어때요.”
“그러면 2억 달러를 찍으면 1,400만 달러(151억)인가?”
렉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만약 흥행에만 성공한다면 기존의 조항보다 받는 돈은 더 많아진다. 적어도 300~400만 달러 이상은 더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흥행이 안 될 경우에는 손해가 막심했다.
그는 슬쩍 서전트 감독을 바라봤다.
과연 유성우와 시너지가 어떨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성우는 정확하게 내용을 정정했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흥행의 5%죠.”
서전트의 최고 기록.
그가 찍어봤던 흥행 기록이 4억 달러였다.
만약 이번에도 전과 같이 흥행에 성공하면 성우가 받을 돈은 2,000만 달러에 육박했다. 할리우드에서 10억 달러가 넘는 기록도 종종 나오지만, 뮤지컬 영화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성우는 또 다른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음원 수익이었다.
뮤지컬 영화의 특성상 노래가 중요했다.
제대로 흥행이 된다면 음원에서도 수입이 발생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과거 비슷한 영화에서도 충분히 증명된 것이었다. 그것까지 고려한다면 엄청 손해 보는 계약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좀 과할 정도였다.
하지만 성우가 5%를 말한 이유가 있었다.
막상 이 조건을 내밀면 협상을 통해 조절될 것이다. 그때 필요한 것이 렉스의 능력이었다. 성우는 내심 3.5~4%면 충분하다 여겼다. 그 의미를 렉스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는 벌써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상당히 구미가 당길 조건이긴 한데.’
렉스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성우 못지않게 그 역시 겜블러 기질이 있었다.
지금까지 그 역시 이런 딜에서 져본 경험은 거의 없었다. 자꾸 그의 감이 지금은 딜을 할 때라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럴 때 느껴지는 흥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나 통화 좀 하고 올게.”
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그는 제작사의 결정권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것을 본 성우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전트에게 물었다.
“저녁 아직이죠?”
“아무래도 그렇지. 렉스 통화 끝나면 오랜만에 나가서 같이 먹을까.”
“시간도 애매한데 오늘은 제가 해드릴게요. 한식 어때요?”
“요리도 할 줄 알아?”
“약간요.”
서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음식은 낯설지만, 처음 먹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종종 한인 타운에 가서 몇 가지 음식을 접해 본 그였다. 때론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도 있었지만, 대체로 평균 이상이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기대되었다.
“그럼 맥주 마시면서 기다리고 계세요.”
“좋지.”
“가져다드릴까요?”
“내가 알아서 꺼내 먹을게.”
서전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우는 그러라고 하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자 방금 장을 봐온 식재료가 보였다. 그것을 보면서 뭐를 만들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꽂혔다. 한식 하면 역시 김치였다. 마침 한국에서 갓 가져온 김치가 제법 많았다.
‘오늘의 메뉴는 김치볶음밥.’
-그거 좋지.
‘뭐 먹고 싶은 거 또 없어?’
-달걀찜도 하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부가 먹고 싶다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사실 달걀찜은 무척 쉬운 음식 가운데 하나였다. 마음의 결정이 끝나자 그의 손은 분주히 움직였다.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타타타탁!
도마 위를 거침없이 두드리는 식칼.
그 소리가 주방에 울리기 시작하자 최정이 주방에 들어왔다. 그는 슬쩍 성우가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그 역시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만드는 거 김치볶음밥 맞지?”
“네. 형은 뭐 하시려고요.”
“반찬이라도 조금 해보려고. 멸치 볶음 어때?”
“저는 좋아요.”
최정은 성우 옆에 섰다.
그리고 능숙하게 멸치를 볶았다.
어느 사이에 서전트도 주방으로 들어왔다.
이미 그의 손에는 맥주 한 병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걸 간간이 마시며 성우가 요리하는 것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사실 구경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부 역시 냄새를 맡고 어느 사이에 주방에서 어슬렁거렸다.
“솜씨 좋네. 이거 음악 영화가 아니라 요리 영화를 만들 걸 그랬나?”
“감독님은 음악 할 때가 가장 잘 어울려요.”
“크큭. 안 그래도 요즘 매일같이 그 소리만 듣고 있다.”
“겨우 한 번 실패한 건데.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그 한 번 때문에 투자받기 얼마나 힘들었는데. 아마 너는 그 기분 아직 모를 거다.”
성우는 인정해야 했다.
아직 자신은 그런 고비를 겪은 일이 없었다.
지금까지 정말 승승장구해온 성우였다. 상당히 운이 좋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그에게 서전트가 말을 덧붙였다.
“사실 그런 거는 계속 모르는 게 더 좋은 일이지.”
“이번에 재기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그러기를 바랄 뿐이야.”
이야기하면서도 성우의 손은 쉬지 않았다.
어느 사이에 파 기름을 내고 양파와 김치를 볶기 시작했다. 그 냄새에 가장 격하게 반응하는 것은 유부였다. 녀석이 자꾸 머리를 들이대자 성우는 손등으로 유부를 밀어냈다.
“쓰읍~! 여기 뜨거우니 다른 데서 놀아.”
“냐아옹~”
“내 음식 탐하지 말고 네 사료나 먹으라니까.”
하지만 좀처럼 녀석은 굴하지 않았다.
계속 주변을 맴돌아서 정신이 사나울 정도였다. 결국, 녀석은 요한에게 검거되어 주방에서 사라졌다. 그것을 보며 서전트는 크게 웃었다.
“저 친구 매력적이네.”
“요즘 너무 살쪄서 큰일이에요.”
“나는 통통하니 좋아 보이던데.”
“그렇게 보여도 숨겨진 뱃살이 장난 아니에요.”
그러는 사이.
밥이 볶아지고 있었다.
볶음밥은 빠르고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다. 바쁘게 밥을 볶던 성우는 불을 끄고 접시에 적당량을 덜었다. 그리고 그것을 서전트 앞에 내려놓았다. 때마침 최정도 멸치 볶음을 끝냈고 그 불 위에 달걀찜을 올렸다.
“지금 먹으면 되는 거야?”
“찜도 금방 끓으니 천천히 드세요.”
“오~ 맛있다.”
김치볶음밥.
서전트는 그것을 먹고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집에서 직접 해 먹는 식사는 그 특유의 매력이 있었다. 잠시 그걸 잊은 채 살고 있던 그였다. 어쨌든 식탁에는 생각보다 많은 음식이 순식간에 채워졌고 다들 자리에 앉았다. 남자들만 가득해서 그런지 식탁이 꽉 차는 기분이었다.
“렉스는 뭐해?”
“아직 통화 중이에요.”
“기다렸다가 먹을까?”
“아니에요. 식으면 맛없으니 일단 우리끼리 먹죠.”
성우의 말에 다들 수저를 들었다.
서전트도 젓가락에 도전했지만, 거듭된 실패에 웃음보가 터졌다. 한참 그렇게 분위기 좋게 저녁을 먹는 동안 렉스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 한 번의 계약에 자신의 수수료가 몇억씩 오락가락하니 어쩔 수 없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내일 사인하러 가겠습니다.”
그는 마침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참 통화하던 끝에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전체 흥행의 4.5%가 성우의 러닝 개런티로 확정되었다. 아마 제작사에서는 월드 박스오피스에서 2억 달러는 못 넘을 것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과연 누구의 예측이 맞을지는 나중에 영화가 개봉한 이후에야 확인이 가능했다.
렉스는 그 결과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갑자기 뛰어오는 그를 보며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다들 환하게 웃었다. 설마 그 조건을 관철시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성우 역시 깜짝 놀랐다.
4%는 넘기기 어려울 것 같았다.
혹시 몰라 조금 높게 잡은 건데 0.5%나 더 챙긴 것이다. 말이 0.5%지 수백, 수천만 달러의 차이가 날수도 있는 수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성우는 진열장에서 아껴두었던 와인과 위스키를 꺼냈다. 모두의 잔을 하나씩 채우자 다들 환하게 웃었다. 그 가운데 가장 흥분한 것은 역시 렉스였다. 자신의 손으로 맺은 계약에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위스키 병을 치켜들고 외쳤다.
“이번에 또 한 번 4억 달러 찍어 보자!”
“4억 달러를 위하여!”
“위하여!”
* * *
[버스커]의 계약을 마무리한 이후.
성우는 피로를 풀 틈도 없이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이제 [아크로]의 개봉까지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월드 투어는 곧바로 시작되었고 그의 첫 행선지는 북유럽 쪽이었다. 이 순서가 그냥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역별로 예상되는 흥행 수치.
그것을 고려해서 움직여야 했다.
관객의 수과 수익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은 개봉 직전에 가야 했다. 이번 경우는 성우가 주연이기 때문에 개봉 직전에 들리는 곳이 아시아가 되었다. 마벨 스튜디오에서는 이번에 아시아에서 거둘 흥행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아~ 피곤하다.”
“유부는 잘 있겠죠?”
“나도 그게 걱정이다.”
성우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유부는 월드 투어에 함께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마벨에서 이동 경로에 관련된 모든 예약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부탁하기도 좀 애매했다. 최대한 함께 다니려고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유부는 미국에 남았다.
녀석을 돌볼 사람은 우현으로 정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녀석은 캐스팅에 실패했다. 성우는 그런 그에게 유부를 맡기는 대신에 생활비 일부를 지원하기로 했다. 혹시 우현이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흔쾌히 승낙해서 다행이었다.
“북유럽은 또 처음이네.”
“저도 마찬가지예요.”
“눈 장난 아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북유럽.
그곳에 도착한 성우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군대에서 나름 혹한기를 보내본 성우였지만, 그때 경험해본 추위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후.
그에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벨 스튜디오에서 나온 직원들도 당황스러워했다. 언론에 홍보 자료도 뿌렸다고 하더니 카메라 한 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죽하면 이번 투어의 책임자인 에스테반의 얼굴이 시뻘겋게 바뀔 정도였다. 그 역시 이런 냉대는 처음 겪어보는 것 같았다.
“다들 뭐해. 일단 숙소로 이동하자고.”
성우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약간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가 맡은 캐릭터는 유럽이나 북미에서 인기가 있기 조금 어렵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기존에 홍보 문제도 있었고 복합적인 요인이 많았다. 과거에 유니버스 시리즈에서 조금 더 출연 분량이 나왔으면 이런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준비된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성우는 시내를 바라봤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그런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막상 생각나는 그런 것이 없었다. 성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풍경을 바라보자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자존심이 상하는 이
는 주연인 그였기 때문이었다.
-저건 뭐냐?
두부가 말을 걸었다.
성우는 처음에 녀석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열심히 뛰어다니는 몇 사람이 보였다. 신호 때문에 도시 입구에서 잠시 멈춘 덕분이었다.
‘파쿠르(Parkour)인 거 같은데.’
-파쿠르?
‘간단하게 말하면 장애물을 이용해 달리는 거라고 할까?’
성우 역시 이걸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튜브에서 영상은 몇 번 보기는 했었다. 그의 앞에서 현재 연습하는 친구들은 수준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마침 신호가 바뀌며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도 잘 할 거 같은데.
‘물론이지. 내가 안 해서 그렇지 연습 조금만 하면...’
성우는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과거에 보았던 닌자 게임의 홍보 영상이었다.
자신이 봤을 당시 영상의 뷰는 6천만을 넘어갔다. 그런 비슷한 영상을 찍을 생각은 없었지만, 뭔가 분위기 반전에 활용할 방법은 있을 것 같았다. 파쿠르 특유의 그 몸놀림은 자신의 캐릭터 아크로와 비슷한 면이 제법 있었다.
“에스테반. 저랑 이야기 좀 할까요?”
< 광끼 -130 > 끝
ⓒ l살별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