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29 >
철컹.
거대한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러자 이미 익숙해진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우는 이곳에 들어설 때마다 이곳이 자신의 집이란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렌트를 한 집이지만, 그래도 뭔가 뿌듯했다. 그것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2개월 비웠는데 정말 오랜만처럼 느껴지네요.”
“우리가 한국에서 좀 치열하게 살았지?”
“알기는 아세요? 그런데 형이 언제 안 그런 적이 있기는 한가.”
“맞아. 너 쉬러 한국에 간다고 해놓고 얘 쉬지도 못하게 그렇게 스케줄을 빡빡하게 잡냐.”
최정도 요한의 편을 들었다.
그것은 성우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최정은 일의 특성상 종종 휴가를 보낼 찬스가 있었지만, 요한은 성우를 밀착 마크하느라 그럴 틈도 없었다. 하지만 성우도 할 말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휴가 가라고 했잖아.”
“형 혼자 어떻게 놔둬요.”
“내가 무슨 코흘리개도 아니고 정이 형도 있잖아.”
“정이 형은 운전을 못 하잖아요.”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지.”
“그거나 그거나.”
그러는 사이 차는 차고 앞에 도달했다.
그것을 신호로 다들 차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섰다. 성우가 가장 먼저 들어가며 유부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쪼르르 달려가 캣타워로 직행했다. 어지간히 그곳이 그리웠던 것 같았다.
“우현이가 제법 깔끔하게 썼네.”
성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둘 다 동의하며 짐을 내려놨다. 사실 이곳을 계속 비워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없는 동안에도 우현이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어차피 임대료는 계속 나가기 때문에 비워두기에는 아까웠는데 잘됐다 여긴 성우였다. 어차피 우현은 조금이라도 더 미국에 머물면서 회화를 익혀야 했었다.
“뭐라도 먹을래?”
“어차피 냉장고에 먹을 것도 없을걸요.”
“네가 어떻게 알아?”
“우현이 그 녀석 은근히 자린고비에요.”
성우는 주방으로 들어가 확인해봤다.
요한의 말처럼 냉장고는 먹을 것이라고는 아예 없었다. 기존에 들어있던 것도 알뜰살뜰하게 다 먹어치운 것으로 보였다. 그대로 놔뒀어도 유통기한을 넘기는 것이 많았을 거란 생각에 아깝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성우였다.
그것을 보면서 성우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차를 끌고 마트로 갈까 싶었다. 그때 뒤늦게 요한이 들어오면서 냉장고 안을 슬쩍 바라봤다. 그리고는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 봐요.”
“무서운 녀석.”
“걔 요즘 엄청 힘들어하는 거 같던데요.”
“정말?”
“저번에 받은 출연료도 거의 다 떨어졌을걸요. 여기 물가가 살인적이기는 하잖아요.”
성우는 그 이야기를 듣고 반성했다.
어떻게 보면 우현은 자신의 제자나 다름없었다.
그런 녀석을 미국에 잠시나마 방치해 놓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신경 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현은 이번에 함께 오지는 못했다. 모처럼 녀석에게 들어온 오디션 기회 때문이었다. 아마 그게 잘되면 또 한동안 얼굴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 배고픈데.
‘몸도 없는 게 맨날 먹을 것만 밝혀.’
-그러니 더 허한 거지. 소화할 필요도 없잖아.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었다.
살아있는 존재는 배부르면 먹는 것을 그만둔다.
하지만 무사귀에게 그런 브레이크가 있을 리 없었다. 성우도 허기짐을 느꼈기에 냉장고의 문을 닫으며 말했다.
“안 되겠다. 나 좀 나갔다 올게.”
“그냥 좀 쉬다가 저녁은 나가서 먹죠.”
“아니 다른 곳도 좀 들려야 해.”
“어딜요?”
요한의 질문에 성우는 답하지 못했다.
이걸 말하면 녀석의 반응이 어떨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나중이 되면 녀석도 알게 될 일이었다.
“마술 재료 좀 사 오려고.”
“마술이요?”
“왜 카드로 촤라락하는 그거.”
“형이 그걸 왜 해요?”
“다 이유가 있으니 그렇지.”
사실 성우에게 선택 권한이 없었다.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최후로 남은 다섯 명의 무사귀.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라는 것이 마술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사 올 것은 무척 많았다. 두부를 제외한 모두가 마지막 소원을 공개한 탓이었다.
-천 명 이상의 관객 앞에서 마술 펼치기
-뜨개질로 다섯 종류 이상의 옷 만들기
-생전에 그리다 멈췄던 그림의 완성
-자신의 가문에 전해지던 가양주 전수
하나같이 쉬운 것은 없었다.
사실 마술은 한국에서도 틈틈이 연습했다.
천명이라는 조건을 채우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마침 팬 미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도전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마술도 반복 숙달이 필요했다.
성우라도 그게 단숨에 되는 것은 아니었다.
손에 익어야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시간적인 여유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홍보 투어를 다니면서 틈틈이 연습할 계획이었다.
“한국에서 사오지 그랬어요.”
“아무래도 여기가 더 다양하지 않을까?”
“하긴 그렇기는 하겠네요.”
요한은 성우의 말에 동의했다.
할리우드에는 마술 공연을 위한 전용 공연장도 몇 곳 있었다. 한국에 비하면 확실히 마술이라는 장르가 대중에게 가까웠다. 당연히 그런 물품도 이곳이 더 쉽고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독학이 가능해요?”
“일단 혼자 해보려고.”
“왠지 미덥지 못하네요. 어쨌든 나갈 거면 같이 가요.”
“너는 그냥 집에서 쉬고 있어.”
“시차 적응도 못 했을 텐데. 혼자 내보낼 수는 없죠.”
그렇게 말하며 요한은 나갈 준비를 했다.
반면에 최정은 그냥 집에서 유부와 함께 있기로 했다. 다 같이 나가자니 유부가 비행기를 타서 민감해진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요한은 어느 사이에 에스컬레이드에 시동을 걸고 성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후.
둘은 쇼핑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냉장고를 채울 먹거리는 물론 유부의 사료도 사야 했다. 최근 살이 많이 쪄서 녀석의 먹거리는 다이어트 사료로 바꾸고 있었다. 입맛에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뜨개질은 물론이고 그림 그릴 재료도 잔뜩 샀다. 그런 성우의 폭풍 같은 쇼핑에 요한은 의문을 품었다.
“마술용품 산다면서 이건 왜 사요?”
“취미 생활 좀 하려고.”
“뜨개질을요?”
“왜 그거는 여자만 하라는 법이라도 있어?”
“아니 형하고는 전혀 안 어울리니까 그렇죠.”
성우는 요한의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뜨개질은 무조건 집에서만 할 생각이었다. 말은 당당하게 했지만, 차마 들고 다니면서 할 엄두는 안 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 바로 마술용품을 파는 가게였다.
“저기 있다.”
“생각보다 찾기 어렵네요.”
“사는 사람만 사니까 그렇지.”
“저는 주변에 주차하고 기다릴 테니 쇼핑 끝나면 전화해 주세요.”
요한은 주변을 슬쩍 살피더니 그렇게 말했다.
아마 주차하기가 조금 애매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성우는 알겠다고 말하고 차에서 내려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봤을 때는 비좁게 보였지만, 생각보다 넓었다. 30~40평은 되어 보이는 그곳은 별세계였다.
철장 안에 들어있는 앵무새와 토끼.
그리고 온갖 용도를 알 수 없는 용품들도 보였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파티에 쓰는 분장 용도의 것들도 제법 있었다. 뭔가 전문성과 함께 대중성도 가지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오! 저거는 마술사 모자다.
마술사의 고전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
그것을 말하면서 검은색의 저 모자를 빼놓을 수 없었다. 성우 역시 어린 시절 TV로 보았던 쇼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가지고 다니면서 연습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부피가 생각보다 너무 컸다.
성우는 가게 내부를 서성였다.
도대체 뭘 골라서 연습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그 문제는 두부가 해결해줬다. 녀석은 진열장에 있는 물품의 이름을 능숙하게 불렀다.
-저기 플래시 코튼하고... 트릭 코인도 사자.
‘뭐 알고 말하는 거 맞아?’
-당연하지.
두부의 호언장담은 못 미더웠다.
하지만 이내 성우는 오랜만에 환상을 보았다. 그곳에서는 한 남자가 마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가 마술에 가지고 있는 열정은 대단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마술을 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동네 꼬마 두어 명.
그것이 관객의 전부였다.
그래도 남자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재주를 봐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얘들아 이번에는 이거 한 번 봐볼래?]
[아저씨! 그거 저번에 본 거잖아요. 맨날 실패하는 건데 다른 마술 없어요?]
[아냐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어.]
열정과 재능.
그것이 언제나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무던히 노력했지만, 재주가 없었다. 마술이라는 것은 손재주와 연기력 그리고 창의력 등의 다양한 요소가 필요했다. 문제는 그에게 새로운 마술을 만들어내는 그런 실력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마술의 성공률 0%.
마술사로 치명적인 수치였다.
다른 이들에게 배울 수 있는 기초적인 마술로 버티기는 어려웠다.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 올라서면 자신만의 마술 레퍼토리를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 마술사였다. 하지만 레퍼토리가 한정적인 그에게는 금방 그 한계가 다가왔다.
환상은 거기까지였다.
그러자 가게 내부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두부가 말을 걸었다.
-이 녀석도 꽤 불쌍해.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죽은 거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배고픈데 어서 필요한 거나 사서 나가자.
두부의 재촉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씩 필요한 것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미 환상에서 본 마술사의 기본적인 마술에 대한 지식은 그에게 전이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반복된 연습으로 숙달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가 상당한 물건을 한꺼번에 담아 계산대 위에 올려놓자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였다.
삐익. 삑. 삑.
바코드를 읽는 소리는 제법 경쾌했다.
그것을 말없이 보고만 있던 성우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차에 있겠다던 요한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며 묻기도 전에 요한은 다급하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왜 전화를 안 받아요?”
“나 평소에 무음으로 해놓는 거 알잖아. 무슨 일인데?”
“서전트 감독님이 오늘 계약 가능하냐고 물어보던데요. 급한가 봐요.”
성우는 조금 의아했다.
이렇게 급하게 굴 필요는 없는 건이었다.
영화에 이미 출연하겠다고 약속도 해놓았다. 이제 사인만 앞두고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로 전화 좀 달라고 난리에요.”
“알겠어.”
*
1시간 후.
성우의 집으로 두 대의 차가 들어섰다.
거의 동시에 도착한 그들은 렉스와 서전트였다. 둘은 곧장 집 안으로 들어와 성우부터 찾기 시작했다. 2층에서 잠시 쉬던 성우는 그들의 목소리에 일어났다.
“아니 이제 막 미국에 도착했는데 왜 이렇게 난리에요?”
“그럴 일이 있어.”
“계약은 어떻게 바로 할까?”
“뭐 그렇게 하시죠.”
성우는 떨떠름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반응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제법 비싸 보이는 만년필을 그 위에 놓았다. 하지만 성우는 곧장 사인할 생각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인지 말해주세요.”
“뭐 중요한 일은 아니야.”
“그러니까 그 사소한 일이 뭐냐고요.”
성우는 아예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댔다.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절대 사인을 하지 않을 거란 의미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결국 서전트 감독이 입을 열었다.
“투자사에서 다른 배우로 바꾸자고 난리야.”
“이제 와서요?”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이니까.”
“누구로 바꾸고 싶다고 그러는 거예요?”
“스티븐 한.”
성우도 그 배우를 알고 있었다.
최근 활동량이 상당히 큰 배우였다.
정확하게는 성우가 데뷔하기 훨씬 이전부터였다. 그가 미드에서 쌓아 올린 인지도는 제법 컸다. 좀비가 창궐한 세상에서 생존하는 그룹의 유일한 아시아인이 바로 그였다. 얼만 전에 칸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았다는 것은 성우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난리를 떠는 거예요?”
“이 바닥에서 하루아침에 캐스팅 바뀌는 거는 흔한 일이야.”
“그러니까 어서 사인해 줘. 오늘 안에 제작을 맡은 톰이랑 담판을 지어야 해.”
“이유가 도대체 뭔데요?”
“몸값 때문이지. 뭐 다른 이유가 있겠어?”
이유는 간단했다.
스티븐의 몸값이 성우보다 저렴했다.
이미 성우의 기대치가 훨씬 더 높아진 상황이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현재 흥행 실패를 우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직전에 내놓은 서전트 감독의 영화가 흥행에서 참패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작비를 최대한 낮춰야 그들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이기는 했다.
“그럼 계약서 조항을 바꾸죠.”
< 광끼 -12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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