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23 >
두 대표가 난리를 떤 이후.
성우도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없었다.
이왕에 일을 저지른 이상에 뭔가 보여줘야 했다. 아니면 정말 다음부터 자신이 하는 일에 신뢰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성우는 제법 빡빡한 스케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한국의 바이올렛 엔터는 애초에 계약서를 작성할 때부터 모든 작품 선택은 자신의 몫으로 해놨다. 하지만 ACA는 그 내용이 없었다. 아시아권은 렉스의 권한 너머이지만, 그래도 메인 무대가 할리우드로 바뀐 이상 그와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골든 타임]에 출연을 확정 지은 이후.
더는 한국의 일정이 휴가라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타이트하게 바뀌었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면 곧장 운동하러 갔다. 그곳에서 두어 시간 이상을 땀을 흘려야 만족감이 들었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촬영 이전에 가장 시급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더구나 보기 좋은 근육과 구조 활동에 필요한 근육은 미묘하게 달랐다.
오후라고 그냥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구두 계약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버스커]의 촬영을 위해 노래와 악기 연주를 연습해야 했다. 틈틈이 손을 조금씩이나마 풀어놔야 나중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영화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최근 투자자는 거의 다 구했다는 서전트 감독의 연락이 왔었다. 적어도 새해 초에는 뭔가 결실이 나올 것 같았다.
띠리링~!
성우는 빈티지 썬버스트를 쓰다듬었다.
이것을 선물한 유일한 녀석은 요즘 얼굴도 보기 어려웠다. 사실 녀석과 손혜리는 이미 결별 직전이었다. 녀석에게 직접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성우에게도 감이란 것이 있었고 들리는 소문도 좋지 않았다. 물론 그 모든 소식의 원천은 요한이었다.
“영원한 사랑은 없지. 흐음~흠.”
잔잔하게 기타 줄을 튕기며 허밍을 했다.
서래마을에 구한 집에서는 이게 한계였다. 방음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확실히 미국에 구해 놓은 거대한 집이 좋았다. 내 집은 아니더라도 기타 정도는 맘껏 쳐도 되는 곳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성우는 기타를 내려놨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두부 이 녀석은 언제 다시 나타나는 거야?”
어느 사이에 3주가 지났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이러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갈 때 가더라도 녀석의 소원을 들어준 이후에 성불을 시키고 싶었다. 이승을 떠돌며 쌓은 업 때문에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녀석이 말했지만, 성우는 그걸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저승 2회차면 모를까.
두부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성우가 갑자기 밀려오는 허전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요한이 현관문을 열며 들어왔다.
“출근하실 시간이에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어서 준비하세요.”
벌써 오후 4시였다.
하루가 정말 빨리 지나는 요즘이었다.
오늘부로 작두의 무대에 오르기로 했던 한 달도 끝이었다. 저녁의 공연만 끝내면 다음부터는 다른 배우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그걸 느끼고 있을 틈은 없었다. 당장 내일부터 또 다른 스케줄이 있기 때문이었다.
“짐을 다 싸놓으셨어요?”
“아니 이따가 와서 하려고.”
“오늘 뒤풀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술 먹고 그게 가능해요?”
“짐이라고 할 것이 별로 없잖아. 그냥 세면도구랑 옷 몇 벌만 챙기면 되는 거 아냐?”
“에휴··· 제가 형 때문에 늙습니다.”
요한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잠시 시계를 보더니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더니 아직 시간이 있다며 어서 짐을 싸라고 재촉했다. 내일 새벽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성우는 그런 그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하여간 잔소리는 누구 못지않아.”
“그게 누군데요?”
“말 많고 촐랑거리던 그런 녀석이 있어요.”
성우는 잠시 후 가방 하나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것을 꾸리는데 걸린 시간은 생각보다 무척 짧았다. 정말 말 그대로 옷과 속옷, 세면도구 등을 대충 챙겨 넣은 것이 전부였다. 어차피 그곳에서 입을 옷은 제공해준다고 하니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아··· 이거 다시 군대 가는 기분이야.”
“저는 안 가봐서 모르겠네요.”
“췌! 신의 아들 같으니.”
“제가 뭐 가기 싫어서 안 갔나요.”
요한 저 녀석.
정확하게는 한국인이라 할 수 없었다.
캐나다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검은 머리 외쿡인이었다. 왜 한국에 들어와서 매니저 일을 하고 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였다. 강 대표의 숨겨진 아들이지 않을까 의심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강 대표의 나이를 봤을 때 어지간히 일찍 사고 치지 않았으면 그러기 힘들었다. 더구나 이 녀석의 성은 신 씨였다.
그래도 요한의 능력은 뛰어났다.
단순하게 매니저로서 일을 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의 숨겨진 능력은 그림 솜씨였다. 종종 심심할 때 낙서며 그림을 그리는데 어지간한 작가 못지않았다. 지난번에 마벨 스튜디오에 보낸 콘티도 녀석을 갈아 넣어 만든 것이었다. 물론 격한 저항이 있었지만, 한 번 매수 당한 녀석이 두 번 매수 당하지 않을 리 없었다.
“자~ 이제 출발할까. 끝마무리는 잘 해야지.”
*
모처럼 선 연극 무대.
이제 이곳에서 펼치는 연기도 끝이 났다.
암전된 이후 다시 불이 켜지자 박수가 곳곳에서 터졌다. 성우는 그 박수를 작두의 다른 단원들과 함께 만끽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내일 다시 이 자리에 설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언제 또 가능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그날이 1~2년 이내는 아닐 것이다. 향후 예정된 영화만 찍어도 그 정도의 시간은 금방 지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일까?
성우는 갑자기 울컥했다.
그의 귓가에는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관객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지금의 마음 같아서는 출연을 연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이 자리는 새로운 배우가 오를 예정이었다. 자신의 배역을 물려받기 위해 한 달 가까이 맹연습을 해온 단원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하던지 기특할 정도였다. 그런 단원을 밀어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성우는 허리를 숙여 크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더 좋은 무대로 찾아뵐게요.”
그 이후.
성우는 팬서비스를 해줬다.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 사인도 해줬다.
덕분에 무대 인사는 한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소규모 극장이라 다행이었다. 한참 그렇게 정신없이 팬서비스해주다 끝이 보였다. 다 끝났다 싶어 등을 돌리려던 성우는 아직 좌석에 앉아 있던 한 여인을 발견했다.
“엇! 지난번의···”
그녀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바로 이 작두의 무대에서 쓰러졌던 홍유미였다. 다른 단원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다들 대기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단원들이 모두 사라지자 그녀가 마침내 입술을 뗐다.
“진작에 찾아 왔어야 하는데. 이렇게 늦게 인사드려서 죄송해요.”
“에휴 별말씀을요.”
“저를 구해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는 꼭 하고 싶었어요. 덕분에 꼭 해야만 했던 것을 할 수 있었어요.”
유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성우는 이 상황이 조금 낯뜨겁다 여겼다.
그래서인지 자신보다 그 당시 옆에 있던 간호사분이 많이 도움을 줬다며 공을 돌렸다.
그런 그의 말에 유미는 살짝 웃었다.
정말 자신의 앞에 있는 배우가 유성우가 맞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유성우는 너무 빛났다. 그래서 사람이 맞나 의심도 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가식은 전혀 없는 그냥 보통의 사람 같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오늘 바쁘신 거 같은데 그럼 저는 가볼게요.”
“그냥 가시게요?”
“네?”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가셔야죠.”
“그건 전에 무대에서...”
“아뇨. 제가 가진 사진이 없잖아요.”
성우는 잠시 기다려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서둘러 대기실로 달려가 핸드폰을 집어왔다. 갑자기 뛰어들어온 성우를 보고 단원들이 놀랐다. 그런 그를 보고 이제 막 2년제 대학교의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막내 단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아니 내 핸드폰 좀 찾으러 왔어. 뒤풀이하러 가게 정리나 빨리해.”
“오늘 기대하고 있을게요..”
막내의 말에 성우는 웃어주었다.
아마 그가 준비한 것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지금 그것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러면 이따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성우는 그저 웃으며 대기실을 나섰다.
서둘러 무대로 돌아왔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무대는 환한 조명만 공허하게 비추고 있었다. 성우는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객석이며 어느 곳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유미 씨?”
“누굴 찾는데?”
주이호 단장이었다.
그는 콘트롤룸에서 걸어 나와 무대로 다가왔다. 그런 그에게 성우가 혹시나 싶어 물어봤다.
“단장님. 혹시 여기 무대 위에 있던 여자분 나갔어요?”
“거기 누가 있었는데?”
“아니 왜 하얀 원피스 입은... 몇 주 전에 여기서 쓰러졌던 학생이요.”
“무슨 소리야. 내가 콘트롤룸에서 계속 있었는데. 너 들어가고 나서 개미 새끼 한 마리...”
주이호는 갑자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성우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소리 낮춰 성우에게 질문했다.
“그 학생이 여기 있었다고?”
“네. 저 들어가기 전에 인사하고 그랬는데요. 왜요?”
“너 그 소식 아직 못 들었구나?”
“뭘요?”
“우리 무대에서 쓰러진 학생이라 내가 종종 병원에 갔었어. 그런데 그제 아침에 합병증으로 죽었다고. 어후 나 왜 갑자기 닭살이 이렇게 돋냐.”
성우는 단숨에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주이호에게 그런 농담은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 조금 전에 본 여자는 누구냐며 따졌다. 하지만 주이호의 굳은 얼굴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성우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가 그런 일 가지고 농담할 거 같아? 내가 어제 장례식장에도 다녀왔다고.”
“그럼 제가 본 거는 뭐죠?”
“난들 아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나갈 준비나 해.”
주이호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그는 순식간에 대기실로 사라져 버렸다. 성우 역시 그를 따라가려고 하려다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무려 3주 만에 나타난 두부였다.
-안타까운 일이야.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쉿!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너 미친놈 취급당한다. 방금도 그럴 뻔했잖아.
그제야 성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다들 옷을 갈아입고 분장을 지우느라 바빴다. 덕분에 무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성우는 무대에 걸터앉았다. 지금 뒤풀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곧바로 두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건 뭐야? 너 그리고 왜 갑자기 사라진 거야?’
-느낌이 확 안 와?
‘설마 단장님 말처럼 그 학생 죽은 거야?’
-그러니까 내가 풀려날 수 있었지. 이번에 끝낼 수 있었는데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네.
성우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설명해주는 두부의 말에 저절로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예상했던 것처럼 딱 한 명의 목숨만 더 구하면 될 일이었어. 그런데 일이 이렇게 틀어지다니 운명이 얄궂네.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되는데?’
-그 아가씨가 죽고 말았으니 이제 두 명의 목숨값이 필요한 거지.
‘궁금한 게 있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말해 봐.
성우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무주귀가 사라질 때 무사귀는 어떻게 되는 건지 물어봤다. 두부는 그때가 되어 봐야 자신도 안다고 답했다. 성우는 녀석의 대답에 약간의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런 그에게 두부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번에 무사귀 몇이 소멸했어. 이제는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해.
‘그렇게 상황이 안 좋아?’
-만약 그게 실패하면 아마 너는... 녀석들에게 잡아 먹히고 말 거야. 나와 몇 안 남은 무사귀는 모두 소멸할 거고.
몸이 바르르 떨렸다.
최악의 상황이 다가온 것이다.
성우는 어떻게든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게 실패한다면 배우의 삶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삶도 파탄이 날 것이다. 이미 그런 경험은 어린 시절에 충분히 겪어본 성우였다. 그런 그에게 두부는 모처럼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우야. 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얼마나 남았는데?’
-아마 길어야 6개월...
< 광끼 -12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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