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22 >
바이올렛 엔터 4층.
회의실에 앉아있는 강훈은 미간을 찡그렸다.
방송국에서 자신의 소속 배우인 유성우에게 묘한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퇴근도 못 하고 아직 사무실에 있는 그였다. 자신 앞에 놓인 제안서를 처음 본 순간 당장 찢어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제일 하단에 적힌 내용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위 내용은 출연자가 먼저 제시한 사항임을 밝힙니다.]
그것 때문에 망설여졌다.
딱 봐도 성우가 또 일을 저지른 것이다.
강훈은 결국 다시 한번 제안서를 읽어내려갔다. [골든 타임]이라는 프로그램은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다. 시청률은 그렇게 높지 않았지만, 사회적인 관심은 제법 높은 편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성취는 음지에서 일하는 소방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
켰다는 것이었다.
“실시간 검색어에서도 꽤 높이 올라가긴 했지.”
특히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는 캠페인.
그 여파는 상당히 컸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후 완벽하게 바뀐 것은 아니지만,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강훈은 고개를 좌우로 털어내며 집중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출연료 전액 소방 재단 기부.
-4~6주의 촬영 기간 (주 4회).
-16부작 방송.
편성은 제법 길었다.
그러나 성우 혼자 끌고 나가는 구조다.
담당 PD가 교양국에서 오래 일했다고 들었는데 역시 예능이 아니라 다큐 냄새가 짙게 났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혼자 이럴 게 아니라는 생각에 오만석 실장을 호출했다. 오 실장은 대표실에 들어오며 또 무슨 일이냐 물었다.
“왜요?”
“성우가 또 일을 저지른 것 같다.”
“연극 기간을 연장하겠데요?”
“아니 새로운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게 뭔데요?”
“이거나 보고 말해.”
강 대표는 그에게 서류를 밀었다.
그것을 잠시 읽던 오 실장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프로그램을 할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그였다. 강 대표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동병상련을 느꼈다. 아마 조금 전의 자신의 표정도 딱 저랬을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해?”
“이걸 왜 하겠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언제 그 녀석이 이해가 된 적은 있어? 처음 계약할 때부터 싹수가 딱 그렇게 생겼었어.”
“언제는 회사의 보물이라더니.”
강 대표는 한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과연 자신이 만류한다고 막을 수 있을까?
아예 다른 프로그램을 물어와서 관심을 돌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짧은 사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딱히 관심을 확 끌 만한 것은 없었다.
어떤 것도 성우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것 같았다. 녀석의 평소 성격을 봤을 때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녀석이 한번 정한 결심은 되돌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믿을만한 구석은 한 곳이 있었다.
마벨 스튜디오와의 계약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마 그곳과 계약한 체결 내용 가운데 막을 수 있는 조항이 있을 것 같았다. 강훈은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집어 ACA의 렉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혼자서는 되돌리기 어려우니 지원 사격이 필요했다.
*
같은 시각 미국.
렉스는 마벨 스튜디오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차를 타고 그곳에 가는 이유는 성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그의 핸드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화는 받지 않았다. 한국에서 온 전화라면 그 내용은 뻔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새벽에 한 번 당한 그였다.
그때 받은 성우의 전화는 정말 뜬금없었다.
뭔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한다고 하기에 별생각 없이 그러냐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한국에서 이뤄지는 활동은 어차피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듣고는 마침내 그의 뚜껑도 열리고 말았다.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관.
그것을 찍겠다는 이야기에 영화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안전 보장도 100% 확실하지 않은 실제 상황이라 했다. 그걸 듣고 나니 미칠 노릇이었다. 만약 그가 다치기라도 하면 향후 [아크로] 후속작이나 지금 논의 중인 [버스커]에 출연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F**!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야?”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활동하지 못할 정도로 다치면?
성우와 ACA는 무려 3배의 배상금을 토해내야 했다. 지난 계약에서 이번 작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70%다. 그러면 배상금은 적어도 200만 달러(약 21억) 이상이 될 것이다. 고생해가며 촬영을 해놓고 배상까지 할 때 그 심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렉스도 딱 한 번 겪어본 일이다.
그 당시 아티스트는 약에 쩔어 계약 위반이 되었다. 당시 그 미친놈 때문에 자신도 수수료의 3배를 토해야 했다. 계약이 그렇게 되어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스트레스성 위궤양이 걸리기도 했다. 돈이 세상 무엇보다 좋은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금
쪽같은 돈이 뭉텅이로 빠져나갈 때의 그 기분은 무척 엿 같았다.
좀 평범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보통 다른 녀석들은 영화 한 편을 찍으면 1~2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몸매 좋은 모델들과 파티와 불타는 밤을 즐기고 휴양지에서 한적한 삶을 살다가 돌아온다. 그런데 이 동양인 배우는 왜 이렇게 일을 벌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뭐 알아서 처리한다고 하니...”
성우는 한 가지의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만약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할 경우. 위약금이 발생하면 자신이 모든 책임진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책임에는 렉스가 뱉어내야 할 수수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말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마벨 스튜디오로 달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멀리 마벨 스튜디오의 건물이 보였다.
그는 경비실을 통과해 빈 주차 자리에 잽싸게 차를 주차하고 내렸다. 누군가 지정 주차하는 곳인 것 같았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렉스를 향해 저 멀리서 누군가 달려왔지만, 그보다 먼저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안내데스크로 다가
가 오늘 만나기로 한 장본인을 찾았다.
“라우라 어딨어?”
“5분 후에 도착한다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셨어요. 회의실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몇 층?”
“2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오케이!”
렉스는 계단을 걸어 2층으로 갔다.
유리 벽으로 된 회의실에 들어선 그는 의자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직원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몇 분 정도가 지나자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오늘의 최종 보스가 나타났다.
마벨의 수석 변호사.
냉혈 마녀라 불리는 라우라 올슨이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회의실로 들어섰다.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그런 분위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라우라는 회의실 탁자에 가방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주차 그따위로 할래요?”
“나는 라인 맞춰서 잘 했는데 갑자기 그건 왜?”
“그쪽 BMW가 제 자리에 떡하니 서 있던 데요.”
“아하. 그런 사소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럴까요? 당신! 배우 관리 좀 똑바로 해!”
라우라의 목소리는 무척 우렁찼다.
통유리로 된 회의실 너머까지 울릴 정도였다.
주변을 지나던 이들은 깜짝 놀라 안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라우라를 보고 모두 총총걸음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평소에도 적지 않게 이런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나 좀 하자고.”
“집어치우고 나중에 고소당할 준비나 해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로 겁을 주는 것은 협잡꾼이나 하는 짓이야.”
“흥! 웃기지 마요.”
라우라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정돈했다.
출근도 하기 전에 연락이 온 렉스의 전화 때문에 혼비백산하여 회사로 달려온 그녀였다. 덕분에 머리며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번 아크로는 자신에게도 무척 중요한 영화였다.
백인 위주로 돌아가는 영화계.
그곳에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찬스였다.
성평등과 인종의 다양성은 최근 트렌드였다. 온갖 고소가 오가는 할리우드에서 마벨 스튜디오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움직이는 회사이니 꼭 필요했다. 덕분에 그녀의 주장은 아직 사내에서 제법 잘 먹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주연 배우가 문제였다.
홍보할 준비하기도 바쁜 와중에 소방관?
더구나 잘 꾸며진 세트장도 아니고 실제 현장에 들어간다고 한다. 아마 미국이었다면 연기자 조합에서 난리가 났을 것이다. 도대체 그 위험한 짓을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한 촬영은 아니래.”
“시끄러워요.”
“정말이야. 우선 내 말 좀 들어 봐. 설마 방송으로 나가는 건데 실전처럼 하겠어? 그냥 TV Show에 불과한 거야.”
“나는 당신이 하는 말 못 믿어요.”
렉스는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버텨내야 했다. 사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한 것이었다. 오늘 이렇게 싸우다가도 내일 ACA에 속해있는 자신의 배우가 필요하면 웃으며 연락할 것이다. 그런 곳이 바로 할리우드였고 렉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혹시라도 이번 출연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가 계약서에 적힌 내용대로 그대로 손해 배상할게.”
“렉스! 정신 차려요. 돈독이 오른 당신이 그럴 리가 없죠. 소송으로 질질 끌다가 합의할 생각이면 아예 접어요. 나를 우습게 본 죗값은 법정에서 톡톡히 치룰 테니.”
“어휴~ 그럴 생각 없다니까. 정말 홍보 일정에 문제가 생기거나 향후 예정된 촬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다치면 두말하지 않고 배상할 거야.”
“다른 거는 몰라도 당장 이번 영화의 손해 배상만 200만 달러가 넘어간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어요?”
“물론이지!”
라우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이가 렉스가 맞나 의심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이미 소문이 자자한 그라면 절대 그럴 리 없었다. 과거에 들었던 소문에 의하면 그는 이런 손해 배상을 무척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실 이 말을 하면서도 렉스는 짜증이 밀려오고 있
기는 했다. 그걸 눈치챘는지 라우라는 취조하듯 재차 물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죠?”
“그런 거 없어. 대신 성우가 이걸 당신에게 전해달라고 하더라.”
“뭘요?”
“공짜로 TV 프로그램에서 광고할 생각 없냐고 하던데.”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네요.”
라우라의 말에 렉스는 뭔가를 꺼냈다.
성우가 새벽에 보내온 팩스 가운데 일부였다.
그것을 슬그머니 라우라에게 밀어 놓고 그는 딴청을 피웠다. 이게 뭐냐고 묻는 라우라의 눈빛에 어서 읽어 보라며 손짓했다. 결국, 라우라는 그것을 집어 들어 첫 장을 넘겼다.
“흐음···”
“것 봐. 고민되지?”
“이건 누구 아이디어에요?”
“누구겠어. 이 난리를 벌인 장본인이지.”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
그곳에는 광고용 콘티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 내용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고 단순했다. 바로 마벨 스튜디오의 아크로가 불길 속에서 사람을 구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건물에서 요구조자를 구하고 난 뒤 그가 입고 있던 슈트가 사라지고 그 안에 입은 옷은 소방관의 방화복이었다.
[현실 속의 영웅을 응원합니다. - 아크로]
“이걸로 뭘 어쩌자고요.”
“한국에서 공짜로 당신네 영화를 광고해준다는 거지.”
“그래 봤자 공익 광고 잖아요. 이걸로 도대체 얼마나 큰 효과를 바라는 거예요?”
“그 효과가 얼마가 되든 솔직히 상관없잖아? 그냥 앉아서 홍보 효과만 받으면 마벨의 입장에서는 좋은 거 아냐?”
렉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라우라는 콘티를 바라보며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본 렉스는 어찌어찌 이번 위기는 잘 넘어가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 가지의 다짐을 했다. 다음에는 절대 한국에 돌려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좌충우돌의 캐릭터.
언제 또 엉뚱한 짓을 벌일지 모르는 것이 유성우였다.
지금 한참 투자자를 모으고 있는 [버스커]를 물어 올 때도 그랬다. 그는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컨트롤 하지 못하겠다며 두 손을 들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할리우드에서는 미친놈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때 라우라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런데 캐릭터 사용료는 어떻게 할려고요?”
결정적인 질문이었다.
렉스는 올 것이 왔다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는 능청맞게 웃으며 라우라에게 말했다. 전과 달라 무척 공손한 느낌이 가득한 그런 어투였지만, 그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공짜로 해주면 안 될까?”
< 광끼 -12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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