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21 >
성우는 잠시 멍해졌다.
격통은 사라졌지만, 뭔가 느낌이 묘했다.
더구나 두부는 그 짧은 외침 이후에 잠잠했다. 뭔가 자신의 내부에서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성우는 걸음을 멈추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보고 서문길 PD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갑자기 안색이···”
“별거 아니에요. 실례지만 명함을 주시면 제가 다시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제가 지금 좀 급해서요. 오늘 안에 다시 연락드릴 테니 그때 설명을 부탁드릴게요.”
성우는 두 차례나 연달아 말을 잘라 먹었다.
그러나 서 PD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성우와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만, 주변에서 들은 그의 평가는 좋았다. 예의 없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한 그였다.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다고 여겨졌다. 그는 잠자코 명함을 꺼내 성우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나중에 뵐게요.”
서 PD에게 양해를 구하며 곧장 차에 올라탔다.
성우가 타자 요한은 망설임 없이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미리 언급해둔 덕에 따로 말하지 않아도 곧장 집으로 향했다. 아직 작두에 갈 시간은 꽤 남아있었다. 성우는 뒷좌석에 몸을 파묻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것이 궁금했다.
일단 확인된 것은 단 하나였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무주귀의 폭주.
아마 두부는 그걸 잠재우러 잠수를 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은 전에도 겪었기에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왜 지금 그런 일이 생겼냐는 것이었다. 뭔가 원인이 있을 거라 여겼다. 성우는 오늘의 특이사항을 체크했다.
-며칠 전 자신의 손으로 생명을 구했다.
-그걸로 인해 상을 받았다.
-리얼 다큐 프로그램 제안을 받았다.
-갑자기 무사귀의 폭주를 알리고 두부가 잠수 중이다.
이것 가운데 가장 유력한 것은 있었다.
바로 누군가의 생명을 구한다는 행위였다. 과거 무주귀를 몰아내는 방법이 선행이라 들은 성우였다. 그래서 온갖 봉사 활동이며 기부를 해온 그였다. 지금까지 기부한 돈만 2~3억은 되는 것 같았다.
그걸 아깝다 여기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무주귀의 반쯤이 사라졌다고 했다. 하지만 효과적인 한 방은 따로 있었던 것 같았다. 선행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죽을 위기의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만큼 임팩트가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의 프로그램 출연하는 것에 무주귀가 한계치를 넘어서는 위협을 느꼈다는 것이었다. 뭔가 거의 끝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단계를 뛰어넘으면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무주귀를 몰아내면 무사귀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적어도 두부가 있어야 캐낼 구석이라도 있었다.
아마 이걸 부적을 써준 김민에게 물어봤자 배 터지게 욕만 먹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두부 이 녀석이 서둘러 돌아오길 바랄 뿐이었다. 그제야 성우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서문길 PD의 명함을 꺼냈다.
소방관이 되는 프로그램.
이게 가장 빠른 길인 것 같았다.
생사를 가르는 현장에 있을 확률은 무척 낮았다. 더구나 자신의 손으로 직접 구해야 그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성우 역시 27년을 살면서 단 한 번밖에 기회가 없었다.
한 편 걱정도 조금 되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소속사에서 보일 반응은 뻔했다.
어느 소속사가 자신의 아티스트가 위험한 장소에 들어가는 프로그램을 찍겠다고 하는데 말리지 않을 리 없었다. 더구나 이미 다음 영화가 구두 계약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미국에 있는 렉스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방송은 안전을 제1의 과제로 삼을 것이다.
하지만 성우는 그렇게 눈속임을 할 생각은 없었다. 무주귀를 몰아낼 절호의 찬스였다. 그 누구보다 더 먼저 그리고 빨리 사람을 구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이왕에 하는 거라면 치열하게 또 사명감을 가지고 할 필요가 있었다.
“요한아.”
“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너는 나 믿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에요. 저 배고프니까 집에 가기 전에 밥이나 먹죠.”
성우는 알겠다며 웃으며 답했다.
두부가 잠적해서인지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 은근히 녀석과 함께 보낸 최근 몇 년 동안 길들어져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요한이 옆에 있어 다행이었다.
두부가 없는 것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만약 이 모든 사태가 마무리되는 그때 두부마저 사라진다면 꽤 쓸쓸할 것 같았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우는 요한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제때 먹을 것도 챙겨주지 못한 것이다. 그걸 들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날도 쌀쌀해지는데 감자탕에 수육 어때?”
“아~ 그거는 빼박 소주각인데요. 이따 연극하러 가셔야 하는데 참을 수 있겠어요?”
“무대에 올라가야 하니 안 되겠네. 그럼 뭐 먹을래?”
“대충 아무 데나 들어가서 먹죠.”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남자끼리 다닐 때 흔히 생기는 문제다.
이럴 때 최정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마 그라면 이런 고뇌에 빠질 틈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그가 없는 이유는 휴가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패션쇼 초대 때문에 외근을 하는 거라 해도 무방했다. 휴가였지만, 그에게는 그런 곳이 휴식이자 또 즐거움을 주는 곳이라 했다. 성우는 잠시 골
똘히 생각하다 손을 내밀었다.
“진 사람이 정하자.”
*
그날 저녁.
공연을 마친 이후.
성우는 낮에 만난 서문길 PD와 다시 만났다.
저녁에 시간이 있냐는 성우의 말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왔다. 성우는 그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자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아니에요. 급하면 어쩔 수 없죠. 제가 약속하고 간 것도 아닌데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마울 뿐이죠. 그런데 보통 섭외는 작가분이 하시지 않나요?”
“이번에는 좀 급해서 직접 와봤어요.”
“네?”
성우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편성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방송국이었다. 하루아침에 프로그램이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설상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빈 자리를 찾기가 애당초 쉽지 않았다.
“겨울 편성에 조기 종영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 자리에 시즌 2가 들어가기로 가결정이 났어요.”
“그럼 언제부터 출연해야 하는 건데요?”
“아직 한 달의 여유는 있어요. 지금 하고 계신 연극이 끝날 무렵이죠.”
“이미 제 스케줄은 다 파악하셨군요?”
“바이올렛 엔터 직원 가운데 저한테 신세를 진 친구가 몇 명 있죠.”
이건 뭐 거의 세작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내부 정보를 얻는 것도 실력이었다. 성우는 미리 주문해 놓았던 커피를 마시며 그를 슬쩍 살펴봤다. 첫인상에서 느낀 그의 모습은 지금껏 일해 봤던 PD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다큐 PD 특유의 날카로움이 느껴진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았다.
침묵만 흐르고 있자 성우는 자신이 궁금하던 것을 질문했다.
“뭐 그건 그렇고 포맷은 시즌 1이랑 똑같이 가나요?”
“그게 문제인데요. 좀 달라질 예정이에요.”
“무슨 말씀이신지?”
“전에는 예능 코드를 억지로라도 집어넣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다큐가 될 거 같아요.”
“대신 시청률을 버리시는 건가요?”
“하하하. 소탐대실이라 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번에는 꼭 관철할 겁니다.”
서 PD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우는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보통 방송국의 PD가 시청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내야 황금 시간대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결과만으로 자신의 역량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성우가 그걸 궁금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털어놓았다.
“사실 지난 시즌을 촬영하며 반성을 많이 했어요.”
“어떤 의미의 반성이죠?”
“소방관이 겪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건가 싶었죠.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거 같은 느낌이랄까?”
“그럼 이번에는 조금 더 리얼하게 가나요?”
“성우 씨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성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성우는 그걸 숨길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 소속사가 자신의 편이 안 된다면 적어도 PD는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출연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가짜로 눈속임하는 그런 프로그램은 필요 없어요.”
“그게 무슨 의미죠?”
“가능하다면 정말 실제처럼 하고 싶어요.”
“저야 리얼 다큐를 지향하니 당연히 환영하죠. 그런데 아까 낮에 보니 식은땀을 흘리시는 것 같던데 어디 아픈 곳이 있는 것은 아니죠?”
성우는 웃음이 나왔다.
서문길 PD의 말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아까 그가 보인 모습은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성우는 그런 것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다행이네요. 사실 성우 씨를 제외하면 대안이 없어요.”
“은근히 기분 좋은 말이네요.”
“그런데 이런 말 하기 좀 뭐하지만, 정말 이걸 왜 했나 싶을 정도로 힘드실 거예요.”
“이미 각오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힘들 것이라 여겼다.
바로 오늘 낮에 방화복을 직접 입어본 성우였다. 그걸 메고 며칠 전에 123층에 도전하는 수직 마라톤을 성공한 소방관을 보고 혀를 내두른 성우였다.
무려 3천 개의 계단이라 했다.
직접 해본 적은 없지만,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걸 온갖 장비를 메고 올라선 것이다. 그만큼 소방관에게 강철과 같은 체력은 필수였다.
그 체력이 있어야 누구를 구할 수 있었다.
만약 그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히려 구하러 들어갔다가 낭패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면에 있어서 성우는 오히려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무예를 연마한 그이기에 근거가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사실 제가 체력 빼면 시체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제가 성우 씨를 찾아온 것이기도 해요. 전에 추격전 했던 것이 워낙 인상적이라 처음부터 섭외 1순위였어요.”
“그런데 왜 시즌1 찍을 때 섭외도 안 하셨어요?”
“무슨 소리에요. 저희 작가가 얼마나 섭외에 공을 들였는데요.”
“그래요? 저는 처음 듣는데요.”
“미국에 계속 있었으니 그렇죠.”
서 PD는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을 듣고 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에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합류하기 어려운 일정이었다. 그맘때 자신은 아크로를 촬영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촬영 기간은 얼마나 되죠?”
“한 달 정도로 보고 있는데 주 3~4회 이상은 촬영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자주요?”
“처음 2주는 기초 교육을 받고 2주는 실제 현장에 배치할 생각이에요.”
“교육을 받아야 하는 거를 생각 못 했네요.”
“정말 리얼하게 가고 싶다면 그건 어쩔 수 없죠.”
성우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자신이 무주귀를 몰아내는 것보다 다른 이의 생명이 중요했다. 살신성인의 자세는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은 당장 죽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촬영보다 구조에 힘을 실어야 했다.
“시간도 많이 늦어졌는데 어떻게 며칠 더 생각해 보시겠어요?”
“뭐 그럴 것도 없네요.”
“좋은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죠?”
“물론이죠. 대신 저랑 약속 하나만 하시죠.”
성우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저절로 서 PD도 머리를 맞댔다. 둘은 그렇게 한참이나 뭔가를 논의했다. 그러다 해결책을 찾았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마주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야기해드린 거 잊지 마세요.”
“당연하죠.”
그제야 성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던 요한을 불렀다. 녀석은 왜 자신을 빼고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일단 자신의 계획을 진척시키기 위해 녀석부터 포섭해야 했다. 성우는 웃으며 요한에게 다가가서 슬쩍 어깨동무했다.
“우리 이야기 좀 할까?”
< 광끼 -12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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