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재능의 탑스타-118화 (119/161)

< 광끼 -118 >

성우의 질문은 울림이 있었다.

하지만 그 대답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는 대답해도 되나 망설였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 생각했다. 혜연은 안타깝게도 그 후자에 속했다. 대답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까지 나오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불행하다 여기지도 않았다.

아들 지우 덕분에 행복한 나날은 이어지고 있었다. 쑥쑥 커 갈수록 즐거움도 늘어났다. 가끔 귀여운 짓을 할 때는 천사가 따로 없었다. 자신의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 드는 그녀였다.

[행복하다! 자신 있게 대답해주시는 분이 없네요. 제 뒤편에는 네 명의 남녀가 있습니다. 그들은 과연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대사를 끝으로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연극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성우가 아닌 상준이었다. 다만 출연 빈도는 오히려 성우가 더 높았다. 그의 연기는 연극을 설명해주는 도슨트이자 관객과 소통하는 커뮤니케이터에 가까웠다. 한 씬이 끝날 때마다 그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치 화두를 던지는 강사 같은 느낌도 들었다.

연극의 스토리는 잔잔했다.

그것은 최근의 트렌드이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소소한 행복은 무척 강조되고 있었다. 그 영향은 영화계를 거쳐 연극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미 사회 전반에 퍼진 그 분위기 덕분에 연극 ‘작은 행복’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어! 이거 너무 맛있잖아.]

[그렇게 좋아?]

[물론이지. 내 삶의 행복은 식탐인 거 잊었어? 나는 저녁에 맛있는 거를 먹어야 내일 하루를 버틸 수 있어.]

[이런 먹깨비 같은 녀석. 가끔 맛없는 집에 갈 때도 있잖아?]

[그럴 때는 아쉽지만, 다른 도움을 받아야지.]

[그게 뭔데?]

[맛있는 와인이 될 때도 있고 때로는 감동적인 영화 뭐 그런 것들. 사실 가끔은 주객전도가 되는 경우도 있지.]

공감대가 있는 것일까?

많은 관객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것은 혜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결혼 전에는 맛집을 찾아다니던 자칭 미식가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먹고 싶었던 것을 먹겠다며 멀리 다녀온 적이 언제던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행복이란 뜬구름 같았다.

정확한 의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누가 맞다 할 수 없었다. 각자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혜연에게 행복은 곧 지우였다.

편모로 아이를 키우는 일은 힘들지만, 아들 덕분에 하루하루를 버티는 그녀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우맘과 혜연은 서로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시집을 읽기 좋아하고 맛난 음식에 행복해 까르르 웃던 그 시절의 혜연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성우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무대 커튼 뒤에서 관객석을 살폈다.

오랜만에 오르는 연극 무대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역시 라이브로 연기하는 것은 언제나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상준이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너도 긴장할 때가 다 있네.”

“오랜만에 무대라 당연하죠.”

“구멍 메꿔줘서 고맙다.”

“헤엥~ 뜬금없이 그렇게 훅 들어오면 난처한데요.”

“네가 들어온 덕분에 초연부터 만석인데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만석이 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작두 단원 전체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성도 적지 않았다. 공연이 올라올 때마다 형성된 마니아층도 작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상준의 경우에는 이미 대학로에 연기파로 소문이 꽤 자자하게 났다. 하지만 상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너 나갈 때마다 술렁이는 거 못 봤어?”

“왜 또 그러세요. 신경 쓰이게.”

“하하 알았어. 나 나갈 차례인데 혹시라도 버벅대면 잘 좀 커버해줘.”

성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노련한 상준이라도 오늘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초연이라는 것은 아직 잘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외출하는 기분과 흡사했다. 처음에는 빳빳하더라도 신고 다니면 편해지듯 연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큰 문제만 아니면 괜찮았다.

초연이라는 것을 다들 알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의 실수는 약간이나마 이해해줄 것이라 여겼다. 사실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공연을 보려면 이런 초연을 선택하면 안 된다. 연극 회차가 쌓일수록 더 능숙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연습한 보람은 있었다.

다들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해냈다.

과연 초연이 맞나 성우가 의심할 정도였다. 확실히 주 단장이 단원을 뽑는 기준은 상당히 높았다. 그 가운데 몇 명은 어느 곳에 데려다 놔도 부족함이 없고 존재감을 뽐낼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있어 보였다.

‘다들 연기 잘 하네. 내가 더 노력해야겠어.’

-아니 다행이다. 특히 저 털보 연기 참 좋다.

‘태성이 형?’

-맞아. 눈빛부터가 완전히 다르잖아.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이 형의 연기력은 그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는 얼굴이 잘생기거나 꽃미남 유형의 배우는 아니었다. 오히려 2~3일 정도 기른 턱수염이 마초 같은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그 연기마저도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때 연기를 마친 상준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수고했어요.”

“너도 이번이 마지막이지?”

“네. 그런데 저기 태성이 형 연기 정말 좋네요.”

“다들 똑같이 말하네. 아마 다음 작품부터는 저 녀석이 메인이 될 거야.”

“형은요?”

“나는 잠시 쉬려고 이제 방전되기 직전이야.”

성우는 충분히 이해되었다.

상준은 지금까지 숨 바쁘게 활동했다.

4년 동안 작두의 모든 작품에 출연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의 수도승의 삶과 비교될 것이었다. 연극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쉬는 날에도 컨디션 조절은 물론이고 어디 멀리 가지도 못한다. 요즘 회사원처럼 주5일 근무도 아니고 주6일 극단에 나와야 했다. 그가 느끼는 피로감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럼 이번에 쉴 때 미국에 놀러 와요.”

“언제 또 가는데?”

“한국에서 겨울 보내고 봄 정도에 갈 거 같아요. 이번 영화는 뉴욕에서 촬영해요.”

“오~ 뉴욕!”

“저랑 있는 게 불편하면 LA의 집이 비어있으니 거기서 지내셔도 되고요.”

“생각 좀 해볼게. 네가 올라갈 차례다.”

그 말을 듣고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언제 잡담을 했냐는 듯이 무대 위로 성큼 올라섰다. 이제 연극의 끝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그가 객석에 던지는 마지막 화두는 간단했다. 그러면서 언급한 것은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동화책 ‘파랑새’였다.

주인공 치르치르.

그 소년은 동생과 함께 꿈속에서 희망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정작 그가 찾던 파랑새는 자신이 기르던 새였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성우는 그것을 말하며 오늘 같이 온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길 바란다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혜연은 슬쩍 손을 뻗어 유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뜨거운 그 온도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 유미를 바라보고 괜찮냐 물었다.

“괜찮아? 왜 이렇게 손이 뜨거워?”

“제가 원래 손이 따뜻한 편이에요.”

“그래?”

혜연은 더는 물을 수 없었다.

마침내 연극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연극은 아무래도 호불호가 갈릴 듯했다. 하지만 혜연은 성우가 과거에 나왔던 ‘악의’보다 지금의 모습이 더 좋았다. 그때와 정반대의 연기지만, 뭔가 편안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여운을 즐길 수 있을 틈은 없었다.

포토 타임이 되자 그녀는 유미와 함께 서둘러 무대를 향했다. 성우와 사진을 찍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같은 목표를 가진 이들이 너무 많았다.

“다치시니까. 천천히 줄을 서세요. 빠짐없이 다 찍어드릴게요.”

“기다리기 지루하시면 저희도 있습니다.”

“호호호. 그럼 저는 배우님과 먼저 찍을래요.”

“잘 생각하셨어요.”

상준의 도움이 매우 컸다.

성우 역시 밀려드는 사인 요청을 능숙하게 대처했다. 당황하던 신인 때와 천지 차이였다. 그리고 다행인 점도 있었다. 작두의 객석 규모가 작다는 것이었다. 성우는 한 명씩 사인과 사진을 찍어주며 다시 연극 무대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지우맘이요. 성우 씨 팬카페에서 왔어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닉네임말고 실제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혜연··· 성혜연이요.”

“오늘 와주셔서 고마워요.”

성우는 사인을 해줬다.

그리고 그 아래 성혜연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그런 모습에 그녀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자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배우답다 여겼다. 하지만 마냥 그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뒤에 서 있는 유미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잠시 후 유미가 사인을 받고 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사인받았어?”

“당연하죠. 사진도 찍은걸요.”

“호호. 네 덕분에 이렇게 연극도 보고 고마워.

“제가 그냥 드린 것도 아닌걸요.”

“그런데 유미야. 너 정말 괜찮아? 안색이 영 안 좋은데.”

“괜찮아질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웃음에는 생기가 없었다. 얼굴빛이 창백한 것이 혜연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이 확 들었다. 그것은 간호사 특유의 직감 같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미는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유미야!”

혜연은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급경사인 계단을 그대로 굴러서 무대까지 떨어질 뻔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의 외침에 극장 내부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문제는 유미의 무게에 의해 혜연 자신마저 무게중심이 무너졌다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그녀는 유미를 껴안고 가파른 계단을 향해 기울어졌다. 혜연은 비명과 함께 두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충격은 오지 않고 누군가의 단단하고 넓은 품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그녀를 잡아준 것은 성우였다.

유미가 쓰러지는 순간 달려온 덕분이었다.

타이밍에 잘 맞춰 도착한 그는 두 여인을 잡고 계단에서 버텼다. 혜연이 서둘러 중심을 잡자 그의 품에는 유미가 안겨 있었다. 그런 성우는 그런 그녀를 잠시 보다가 혜연에게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죠?”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분과 일행 아닌가요? 혹시 평소에 앓던 병이 있나요?”

“여기 입구에서 만나서 잘 모르겠어요.”

“일단 119에 신고부터 해주세요.”

성우의 말에 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서둘러 버튼을 눌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의 손가락은 바르르 떨려왔다. 그러는 사이 성우는 유미를 잡고 호흡부터 살폈다.

-호흡이··· 없어.

‘갑자기 뭐지? 어디 부딪힌 것은 없는 거 같은데.’

-맥박부터 다시 재 봐.

성우는 그 순간 잠시 고민되었다.

머릿속에 여러 처치 방법이 떠올랐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대부분의 것들은 돌팔이가 남긴 한의학이었다. 침술을 이용해 호전시킬 방법은 있었지만, 침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상준과 주이호가 다가왔다.

“괜찮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저분이 119에 연락하고 있어요.”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성우야. 오늘 금요일이라 요 앞에 엄청 막힐 텐데.”

“119센터랑 대학 병원도 바로 길 건너에 있는데요?”

하지만 내심 불안하기는 했다.

금요일 저녁이었고 모든 공연장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시기였다. 구급차는 그들을 뚫고 외진 이곳까지 와야 했다. 당연히 적지 않게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일단 다른 관객분들 먼저 내보내죠.”

“알았어.”

“죄송합니다. 응급 상황이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구급차가 오는 중이니 입구를 비워주세요.”

단원들이 달라붙는 것이 보였다.

성우는 그것을 확인하고 쓰러진 이를 무대 위로 옮겼다.

아직 조명이 내리꽂히는 그곳은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곳에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눕히고 망설임 없이 여자의 블라우스를 살짝 풀었다.

호흡은 여전히 없었다.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심폐소생술을 시작하려 했다. 그때 아까 신고를 부탁한 여성이 다가왔다.

“금방 온다고 했어요.”

“심폐소생술 할 건데 물러나 있어요.”

“저 간호사에요. 도와드릴게요.”

“그럼 인공호흡 부탁해요. 제가 압박할게요.”

성우는 자세부터 잡았다.

그러자 혜연은 턱을 들어 올리고 유미의 입에 숨을 불어 넣었다. 간호사라더니 제법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가슴이 두어 차례 들썩이는 것을 본 성우는 곧장 압박에 들어갔다.

“하나! 둘!···”

< 광끼 -118 > 끝

ⓒ l살별l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