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17 >
성우의 말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말을 듣고 작두 단원들은 광분했다.
혹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것은 괜한 기우에 불과했다. 극단에서 주연을 맡고 있는 상준의 반응도 좋았다.
“이야~ 이게 몇 년 만의 호흡이야?”
“글쎄요. 엄청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너랑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어.”
“그런데 길게는 못해요. 다른 대타 구할 때까지만 할게요.”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나는 허락한 적이 없는데.”
“단장님!”
다들 주이호의 말에 경악했다.
설마 유성우의 캐스팅을 까낼 줄 몰랐던 탓이다.
하지만 성우는 그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성우의 캐스팅 비용이었다. 천정부지로 올라간 그의 몸값을 맞추는 것은 작두의 여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성우는 주이호에게 말했다.
“출연료는 안 줘도 돼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주연급인데 저랑 맞추면 되죠.”
“그것도 그거지만, 아직 대본도 읽어보지 않았잖아. 너무 촉박해.”
주이호의 말을 듣고 성우는 빙긋 웃었다.
사실 대본을 볼 필요도 없었다. 대본 대부분은 아까의 연습에서 듣고 보았다. 굳이 텍스트를 읽지 않아도 기억 속에 그것들 전부 남아 있었다.
무사귀가 주고 떠난 축복 가운데 하나였다.
배우로 살면서 실제로 그 능력의 덕을 크게 보고 있었다. 성우는 한차례 헛기침을 한 이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 대사를 읊었다.
[행복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아. 나는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향기로운 커피 한 잔, 그리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보내는 여유만 있으면 돼. 그게 너무 큰 바람이지는 않잖아? ...(중략)... 그런 소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모여 내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어때? 쉬운 일이잖아.]
성우는 고깃집 안에서 연기를 펼쳤다.
시선 처리와 발성까지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전형적인 연극 톤이었다. 상당히 긴 시간 무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해솔이 남겨준 것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대사를 마친 이후.
고깃집 내부는 고요했다.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우는 그 상태에서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입어 입에 넣어 오물거렸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 맛있다.”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런 그의 넉살에 다들 웃음꽃이 피었다.
성우의 연기를 처음으로 코앞에서 본 후배들도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기억력에 혀를 내둘렀다. 대본도 읽지 않았다고 하는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해냈다. 사실 그가 한 대사는 이번 대본에서 가장 긴 독백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대사를 통째로 외우는 게 가능해요?”
“대본을 다 외운다는 게 진짜인 줄 몰랐어요.”
“우와··· 나는 뺀질거리는 철민 선배가 해준 이야기가 대부분 뻥인지 알았는데 정말이야.”
다들 한목소리로 함께 무대에 오르자며 노래했다.
고깃집의 백 사장까지 나서서 부추길 정도였다. 그런 이들의 얼굴을 한 차례 둘러본 주이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러자 다들 만세 삼창을 하며 환호했다. 오죽하면 상준이 소주 서너 병을 더 꺼내 술을 한 잔씩 돌렸다. 그리고 잔을 치켜들며 외쳤다.
“작두가 만들어낸 스타! 성우의 합류를 환영하며!”
“환영합니다!”
“다들 잘 부탁해요.”
*
그날 이후.
성우는 온갖 잔소리를 들었다.
물론 그 대표적인 인물은 바이올렛 엔터의 강훈 대표였다. 성우도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는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중요한 시기였는데 말도 없이 통보만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반면에 미국 ACA의 렉스는 완전히 반대였다.
휴식 기간 동안 뭘 하든.
그는 신경을 거의 쓰지 않았다.
매니지먼트와 아시아권은 그의 영역이 아닌 탓이었다. 아마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곳이라면 어느 할리우드 배우처럼 노숙하며 다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성우는 두 회사의 반응의 차이가 문화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출연하는 것은 결정됐다.
다만 초연부터 시작해서 딱 1개월로 한정했다.
그 이후에는 다른 작두의 배우 가운데 하나를 연습시켜 올릴 예정이었다. 덕분에 성우가 촬영하기로 예정한 광고는 대부분 일정의 조절이 필요했다.
일부 조절이 불가능한 것도 있었다.
그런 광고의 촬영은 아예 뒤로 미뤘다.
대신 성우는 보류로 놔뒀던 광고건 세 개를 더 하기로 했다. 그 가운데 중국에서 들어온 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이후에야 강 대표는 잠잠해졌다.
광고는 총 5개에 불과했지만, 그걸로 성우는 40억을 벌어들일 예정이었다. 그 정도면 회사가 버는 돈은 4억 가까이 되었다. 그 정도면 연극에 한 달 출연하는 대가로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리고 그가 대학로의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하루 사이에 퍼져나갔다.
성우의 팬카페 페르세우스.
한동안 잠잠하던 그곳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좀처럼 얼굴 보기 어려운 그들의 스타가 돌아온 것이다. 가끔 직접 요리를 해주며 소규모 팬서비스를 해주던 성우였지만, 미국으로 가서 그 팬서비스의 명맥은 끊긴지 오래였다. 점점 새로운 불씨가 피어오를 그 무렵. 누군가 새로운 글을 올리자 본격적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목 : 속보! 오라버니가 대학로에서 연극 ‘작은 행복’을 한답니다!]
[제 친한 친구가 작두 소속이에요.
그런데 성우 오라버니 아니 우리 별님이 이번에 자신이 오르는 연극에 출연한다고 자랑하더군요. 평소에 장난이 많던 친구라 반신반의했죠. 다들 알다시피 오라버니가 미국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됐잖아요. 그런데 이게 웬걸! 무대 위에서 공연 연습하는 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준 거 있죠. 그걸 보고 저는 환호 했답니다. 저는 바로 예약하러 갑니다!]
지우맘 : 좌표 좀 찍어줘요. 연극 제목이 ‘작은 행복’ 맞아요?
성우짱 : 초연 맞는 거죠? 와~ 이건 언제 또 준비한 거지.
혜쭈니 : 별님 열일 하신다! 저도 예약하러 갑니다. 공원몰 티켓에서 극단명인 작두로 검색해도 나와요.
ㄴ 지우맘 : 정말 고마워요. 저도 바로 예약하러!
당연히 카페는 난리가 났다.
순식간에 그 소식은 카페 너머까지 퍼졌다.
덕분에 공원몰 키텟의 키워드 순위는 극단 작두와 유성우의 이름이 Top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작두의 좌석은 불과 75석에 불과했다. 현장에서 파는 표 일부를 빼니 그 수는 더 적었다. 극악한 티켓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연극 초연 당일.
혹시나 싶어 성혜연은 대학로로 향했다.
이제 세 살이 된 지우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외출이라 친정엄마가 잠시 봐주기로 했다. 몸이 불편하셔서 그럴 마음까지는 없었지만, 엄마는 거의 내쫓다시피 하며 집에서 밀어냈다. 아마도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잠식하고 있는 우울증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런데 표를 구할 수 있을까?”
막상 대학로에 왔지만, 걱정되었다.
공원몰에서 티켓을 구해보려 온갖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손이 빠른 이들은 참 많았다. 공연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되고 말았다.
혜연은 서둘러 작두로 향했다.
공연 시작 1시간 전부터 현장에서도 표를 판다고 했다. 마지막 기회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두에 도착한 그녀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줄은 꽤 길었다.
적어도 10여 미터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표는 구할 수 없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때 그런 그녀에게 벙거지 모자를 쓴 수상한 아주머니가 슬쩍 다가왔다.
“혹시 표 구해?”
“그러고 싶은데 못 살 것 같아요.”
“나한테 두 장 있는데. 혹시 살 생각 있어?”
아주머니는 목소리 낮춰 말했다.
그제야 혜연은 그 아주머니의 목적을 알아차렸다. 자신에게 암표를 팔기 위해 다가온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흔들렸다. 마음 같아서는 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아주머니가 제시한 금액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
“열 장만 줘. 이거 구하기 힘든 거 알지?”
“십만 원이요?”
“싫으면 말고.”
혜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10만 원이면 아들 지우에게 맛난 고기를 며칠 동안 먹일 수 있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더구나 공연 문화에 있어 암표는 암적인 존재라 믿는 그녀였다.
아주머니는 잠시 혜연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 일이 틀어진 것을 깨닫고 구시렁거리며 슬쩍 앞줄로 이동했다. 잠시 후 앞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아주머니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며 혜연은 살 걸 괜히 자존심을 세웠나 후회했다.
그로부터 30분 후.
드디어 현장표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앞에 서 있던 몇 명만 표를 구매했고 나머지는 허탕이었다. 물론 뒤쪽에 있던 혜연 역시 표를 구하지 못했다. 아이를 기르는 입장이라 이렇게 나오기가 쉽지 않은 그녀였다. 한 달 밖에 출연하지 않는다고 들었기에 이게 끝인가 싶어 아쉬울 뿐이었다.
하지만 혜연은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누군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귀여운 얼굴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라 무슨 일인지 의아했다.
“무슨 일이시죠?”
“혹시 페르세우스 멤버 아니에요?”
“네?”
“유성우 팬카페 페르세우스요. 그거 거기에서 만든 배지잖아요.”
학생이 가리킨 곳에는 가방이었다.
그곳에는 페르세우스에서 상위 등급 멤버에게만 제공된 배지가 붙어 있었다. 물론 지우맘으로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던 그녀 역시 그 멤버 가운데 하나였다.
“혹시 그쪽도 페르세우스 멤버?”
“맞아요. 오늘 별님 공연 티켓 구하러 오신 거 맞으시죠?”
“나름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못 구했어요.”
“제가 표 한 장이 남는데 혹시 보실 생각이 있으세요?”
혜연은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아까 아주머니처럼 암표 장사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학생의 말을 듣고 그 의심을 떨쳐냈다.
“제 친구가 함께 보기로 했는데 방금 못 온다고 연락이 와서요. 티켓값 그대로 팔게요.”
“정가로요?”
“당연하죠. 같은 별님 팬인데.”
그녀의 웃음은 화사했다.
마치 천사가 강림한 것 같았다.
혜연은 자신도 학창시절에 저럴 때가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고민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녀의 고개는 저절로 끄덕였고 누군가 또 채가기 전에 지갑부터 열었다.
“정말 3만 원만 주면 돼요?”
“그럼요.”
“여기 있어요.”
“어! 한 장 더 많아요. 주신 거는 4만 원 인데요.”
그건 혜연이 일부러 더 준 것이었다.
학생의 마음 씀씀이가 예뻐서 어쩔 수 없었다. 혜연은 알고 있다며 넣어 두라고 손짓했다. 그제야 학생은 티켓 한 장을 건네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저는 카페에서 혜성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홍유미라고 해요.”
“반가워요. 나는 지우맘 성혜연.”
“엇 지우맘님! 카페에서 종종 뵀는데 여기서 만나니 신기하네요. 본명이 더 예쁘신데요?”
“고마워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언니.”
둘은 금방 친해졌다.
물론 유성우라는 배우가 주된 주제였다.
공연 시작은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둘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한없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공연이 시작할 시간이 다가왔다. 혜연은 떨리는 마음으로 유미와 함께 작두를 향해 걸었다.
‘4년 만인가?’
성우의 연기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성우가 유명해지기 전에 이 극장에서 그를 보았다. 당시에는 혼자도 아니었다. 아이 아빠와 함께 데이트하는 자리였다.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그 두근거림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없었다.
남편은 그사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자기 찾아온 교통사고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결혼반지와 뱃속에 잉태한 16주가 된 지우밖에 없었다. 보물 같은 지우가 있기에 버틸 수 있었지만, 아직도 남편의 빈자리는 여전히 공허했다.
혜연은 좌석에 앉아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러자 밝은 표정으로 무대를 보는 유미가 보였다. 그 순간 잠시 안도할 수 있었다. 아직 세상에 자신 혼자 남겨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있었기에 갑작스레 몰려오던 우울함이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암전된 이후 나타난 유성우.
그 역시 자신이 버틸 수 있게 만드는 존재였다.
혜연은 4년 전 행복하던 그 날을 떠올리며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성우는 핀 조명을 받으며 잠시 말없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러다 성우는 관객석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 지금 행복하신가요?]
< 광끼 -11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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