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16 >
성우는 주이호 단장을 불렀다.
그러자 그는 곧 차를 향해 다가왔다.
물론 그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성우의 차는 팬들로 인해 둘러싸이고 있었다. 다행히 바이올렛 엔터의 직원이 그 상황을 보고 즉시 달려왔다. 그들은 팬들을 차에서 분리하기 시작했다.
“어서 타세요!”
성우의 말을 듣고 주이호는 차에 탔다.
그가 탄 이후에야 차는 서서히 움직여 그 자리를 벗어났다. 팬들이 다칠까 싶어 성우는 계속 조심하라며 창밖으로 외쳐야 했다. 하지만 이미 과열된 그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와··· 이건 무슨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이네.
‘지금 그런 농담을 할 때야?’
-솔직히 조금 무서울 정도야.
성우도 두부의 말에 동감했다.
모두 자신을 보기 위해 온 팬이었다.
하지만 이 분위기는 적응하지 못할 그런 것에 속했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손가락들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어느 정도 벗어나자 주이호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나 때문에 큰일 날뻔했네. 그냥 지나쳐가지 왜 그랬어?”
“안 그래도 귀국 인사하러 가려고 했는데 마침 보이니까 그랬죠.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이 근처에 있는 다른 기획사에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마침 네가 나오더라.”
“무슨 볼일이요?”
주 단장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딱히 숨길 거는 아닌지 이내 말을 꺼냈다.
그는 자신의 단원 가운데 하나가 최근 기획사 한 곳과 계약했다 말했다. 그것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친구가 연극 무대에 오르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새로 계약한 회사에서 드라마에 꽂아준 것이었다.
중요한 역할은 아니지만, 확실히 공중파를 탄다는 것이 먹힌 것 같았다. 성우는 그 단원이 누군가 궁금했다. 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너 미국에 있을 때 들어온 경력 단원이야."
“공연은 언제 시작하는데요?”
“내일모레.”
성우는 그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났다.
이거는 예의가 아니라 여겨졌다. 제아무리 성공하고 싶다고 해도 공연이 올라가기 직전에 그만두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았다. 이내 그는 계약서의 존재 유무를 물었다. 하지만 주이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쓰지 못했어. 초연 올리기 직전에 쓰려고 미룬 게 죄지.”
“그럼 뭐 방법이 없네요.”
“그래도 스케줄 조절하면 가능할 거 같은데. 아무리 설득해도 씨알도 안 먹히더라.”
주이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도망간 배우는 잡지 않는 그였다.
그러나 초연 스케줄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다른 배우가 준비할 시간은 벌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설득은 먹히지 않았고 소득 없이 극단으로 돌아가야 했다. 애초에 이 문제는 계약서를 따로 작성하지 않은 그의 실수였다.
“극단으로 가실 거죠?”
“그래야지. 아마 지금도 다들 연습하고 있을 거야.”
“요한아. 집으로 가지 말고 대학로로 가자.”
“이미 그러고 있어요.”
성우는 잘했다며 요한의 등을 두드렸다.
요즘 들어 요한은 거의 궁예 수준에 오른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적당한 선에서 센스있게 잘했다. 덕분에 성우는 쓸데없는 말까지 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그때 주이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괜히 거기까지 데려다줄 필요는 없어.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줘.”
“단원이 오랜만에 극단에 간다는 데 문전박대하는 거예요?”
“올 때마다 돈을 뿌리고 가니 그렇지.”
“제 밥상에 수저 몇 개 더 올리는 건데 신경 쓰지 마세요.”
사실 수저 한두 개는 아니었다.
극단에 소속된 배우와 스태프만해도 이제 십여 명이 넘어가는 작두였다. 미 출연 중인 단원까지 합치면 족히 이십여 명은 되었다. 처음 성우가 작두에 들어갔을 때와 비교하면 덩치가 상당히 커져 있었다.
“이제 극장이 비좁지 않아요?”
“그렇기는 한데 아직 이사하는 것은 무리야.”
“왜요? 올리는 작품마다 거의 만석이라면서요.”
“그렇게 옮겼다가 망하는 극단이 한두 개였냐? 그냥 지금 객석으로 어떻게든 유지해야지.”
성우는 현재 상황이 안타까웠다.
작두에 투자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되었다. 이번에 찍는 광고만 해도 적어도 수십억 단위라 부담될 것은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통장에도 아직 8억 정도는 있었다. 지난해 서래마을에 집을 산 이후 유식당과 마벨 스튜디오에서 정산받은 금액이었다. 성우는 조심스레 그런 의사를 비쳤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야.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도대체 대관료가 얼마길래 그래요?”
“우리는 외진 곳이라 저렴한데. 100석 정도 규모가 되는 다른 극단은 한 달 대관료가 천만 원이 넘어가.”
“허얼··· 엄청 비싸네요.”
성우는 깜짝 놀랐다.
매달 그 정도의 금액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좌석을 채워야 유지가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다. 대충 계산해봐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분명 돈이 들어갈 구석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제야 성우는 왜 연극배우가 살기 팍팍한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애초에 구조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에 비하면 대관료가 거의 두 배나 올랐어. 그나마 시에서 지원받는 게 없으면 대부분 버티지 못했을걸.”
“지원 받는 그런 것도 있었어요?”
“너는 배우니까 이런 쪽에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차라리 건물을 사는 게 마음 편하겠네요.”
“하하하. 그러면야 이런 걱정할 필요가 없지. 로또라도 사야 하나?”
주이호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성우는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농담도 있는데 건물주가 되는 것은 성우의 바람이기도 했다. 아직은 그런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에 미뤄둔 것이지만, 이번에 광고 촬영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형은 엄두를 못 내겠지만, 소형 정도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괜히 희망 사항에 불과한 이야기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건물 한 채를 살 돈을 손에 쥐고 나서 논의해도 늦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요한이 모는 차는 대학로로 접어들었다.
“내려주고 너는 그냥 퇴근해.”
“집에 가도 할 거 없어요. 주차하고 극단으로 갈게요.”
“맘대로 해.”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요한은 극단 작두 앞에 차를 멈췄다.
성우와 이호는 차에서 내려 곧장 지하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안에서 연습하는 이들이 보였다. 그곳을 보니 성우는 감회가 새로웠다. 오늘따라 옛 생각이 많이 나는 것이 늙어가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차마 주이호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저것들이 무대 위에서 제정신 못 차리고!”
“잠시만 좀 보죠.”
“에효··· 이래서 연극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대는 뭔가 문제가 있었다.
단원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맥이 빠진 느낌이었다. 뭔가 나사가 빠져 보였다. 갑자기 주연급 하나가 빠졌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저대로 초연에 올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이호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는지 분통을 터트렸다.
“그냥 접을까?”
주이호는 마른세수를 하며 좌석에 앉았다.
성우도 그런 그의 옆에 앉아 연극을 바라봤다. 연기는 불안했지만 그래도 내용은 무척 흥미로웠다. 과거 ‘악의’를 써낸 주이호의 안목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이번 작품의 주제는 ‘작은 행복’이었다.
88만 원 세대의 현실 속에서 찾아가는 소확행.
최근 유행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이야기였다. 잔잔한 감동이 이야기 속 곳곳에서 보여지는 것이 뭔가 일본 스타일의 드라마와 느낌이 비슷했다.
“이거 누가 쓴 거예요?”
“이번 작품은 신인 작가가 쓴 시나리오야.”
“하긴 단장님이 직접 썼으면 이 감성이 나오지는 않겠죠.”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네.”
주이호의 말에 성우는 웃었다.
세대마다 느끼고 겪은 경험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이 출연하기로 확정한 ‘버스커’의 작가는 뛰어났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연기에 집중하고 있던 이들 가운데 일부가 성우를 발견했다.
“유성우 선배님 오셨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꺄아아~ 처음 뵙겠습니다.”
성우는 그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물론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들도 두어 명 보였다. 하지만 기수로는 자신이 창단 멤버이기에 더 높은 이들은 없었다. 물론 작두에 창단 멤버는 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왔어?”
“상준이 형. 오랜만이에요.”
“미국 가기 직전에도 봤는데 뭐가 오랜만이야?”
“그게 벌써 반년 전이거든요.”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 참 빠르네.”
성우는 상준의 손을 맞잡으며 악수했다.
창단 멤버 가운데 유일하게 작두를 지키고 있는 그였다. 철민이 형과 혜정 누나가 떠난 자리는 그가 아래 기수의 후배를 데리고 커버하고 있었다. 덕분에 극단 내에서 그의 입지는 주이호 단장 못지않아 보였다. 그토록 유하던 상준이 형은 단원들 사이에서 호랑이 선배로 불려지고 있었다.
“벌써 촬영 끝난 거야?”
“뉴스 좀 보세요. 어제 저 귀국했다고 나온 거 못 봤어요?”
“그거 볼 틈이 어딨냐. 지금 난리도 아닌데.”
성우는 상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도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배고프다···”
그 말에 두부 역시 반응했다.
녀석은 아직도 그 먹성을 다 채우지 못한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성우는 주이호의 눈치를 살짝 보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배고픈데 밥 먹고 합시다!”
“와아~ 역시 선배님.”
“어디로 모실까요?”
“요즘 저 앞에 닭갈비가 그렇게 맛있다고...”
순식간에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역시 분위기 전환에는 이것만큼 빠른 것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호나 상준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성우는 모두를 데리고 극단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우르르 몰려가는 그들에게 시선은 쏠렸고 곧 성우를 알아보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하지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성우의 주변을 둘러싼 단원들 덕분이었다.
누가 연극배우가 아니라고 할까 봐. 다들 인상이 독특하고 강렬한 분위기가 있었다. 성우가 앞장 서 도착한 곳은 단골 고깃집이었다.
“에··· 또 이 고깃집이에요?”
“또 고기라니. 저는 언제든 고기를 환영합니다.”
“고기는 언제나 진리죠!”
고깃집의 백병일 사장님.
그는 여전히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과거 유식당에 출연할 당시 석쇠 떡갈비의 비법을 알려준 분이었다. 당시 성우는 그 고마움을 보답하기 위해 종종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매번 극단에 올 때마다 약속을 지키고 있는 성우였다.
“성우 왔구나!”
“오랜만이에요. 사장님.”
“그래. 어서 다들 앉아. 금방 준비해서 내올게.”
“주목! 오늘은 야간 연습이 있으니 술은 금한다. 탄산으로 기분만 내!”
상준에 말에 다들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발을 보내지는 않았다.
당장 내일모레가 초연인데 그런 정신 나간 배우는 없었다. 그러나 성우나 주이호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었다. 주이호는 자연스럽게 소주를 가져왔고 성우는 그것을 빼앗아 첫 잔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옆에 앉은 상준이 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도 드릴까요?”
“방금 먹지 말라고 내가 말해 놓고 어기면 우습잖아.”
“그렇기는 하네요.”
“이리 줘. 오랜만에 내가 한 잔 따라줄게.”
상준은 소주병을 낚아채 성우의 잔을 채웠다.
그것을 받아든 성우는 조용히 주이호와 건배 이후에 들이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보통의 회식 때와 달리 분위기는 무척 침체되어 있었다. 다들 애써 티 내지 않으려 해도 흔들리는 멘탈이 느껴졌다. 다시 고개를 돌린 성우는 곰곰이 여러 생각을 했다.
비어있는 4~5개월의 시간.
그것을 어떻게 보낼지 걱정하던 자신이었다.
그 시간을 작두에서 보내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눈치챘는지 두부가 그를 만류했다.
-야! 돈도 안 되는 무대에 왜 올라?
‘연기를 돈만 보고 하냐.’
-그래도 급이 안 맞잖아. 브로드웨이도 아니고.
‘잠깐만 도와주는 셈 치고 하는 거지. 오래 할 생각은 없어.’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다.
계속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민폐였다.
작두의 무대에 오르길 바라며 작두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그 기회도 무척 소중할 것이다.
그런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여겨졌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단 2~3주라도 빈 구멍을 메꿔주고 싶었다. 성우는 방금 든 생각을 조심히 꺼내 들었다.
“단장님.”
“왜?”
“저 혹시 이번 무대에 오를 수 있나요?”
< 광끼 -11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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