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14 >
성우는 곧장 한국으로 향했다.
어차피 미국에서 할 일은 이제 없었다.
이제껏 찍은 아크로는 곧장 편집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제부터 개봉할 무렵까지 별다른 활동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문제는 그 긴 4~5개월 남짓 되는 긴 시간 동안 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 기간은 생각보다 길고 지루할 것 같았다.
그래도 시작은 버라이어티했다.
극비로 하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공항에서 만난 인파는 어마어마했다. 만약 바이올렛 엔터의 강 대표가 신경 써주지 않았다면 큰일 날뻔했다. 수많은 기자와 팬들을 뚫는데 꽤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렵게 차에 올라탄 성우에게 요한이 물었다.
“어디로 갈 거예요?”
“집으로 가야지.”
“그러니까 어느 집이요?”
성우는 잠시 고민했다.
그의 질문의 의도를 알기 때문이었다.
아마 요한은 부모님 댁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곳에 갈 이유는 딱히 없었다. 성우가 미국에서 촬영하고 있는 사이에 두 분은 다시 의료 봉사를 떠났다. 이번 목적지는 전에 예고했던 그대로 에티오피아였다.
“서래마을 집으로 가자.”
요한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우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유부 역시 그의 무릎에 앉아 그 풍경을 함께 했다. 그가 떠난 동안 세상은 바뀐 것이 없었다. 풍경은 예전 그대로였고 교통체증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자신이 떠나있던 기간이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어찌 되었든 감회는 새로웠다.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낯선 문화와 풍경 속에서 작업 과정은 꽤 힘들었다. 그래도 그 일련의 작업은 재미있었고 보람이 있었다. 그런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뭔가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 그만의 감상을 깬 것은 두부였다.
-미친놈처럼 뭘 그렇게 혼자 웃고 있어?
두부의 말을 성우는 애써 무시했다.
괜히 지금 이런 생각을 말해 봤자 비웃음만 당할 것 같았다. 녀석이 살아서 혹은 죽어서 보낸 시간은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녀석이 본 변화의 흐름은 너무 거대했기에 비교하기 싫었다.
‘이번 기회에 남은 무주귀 녀석들 다 몰아내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왜?’
-그때 떨어져 나간 녀석들은 피라미에 불과해.
‘남은 녀석들은 독종이라든가. 뭐 그런 건가?’
-비슷한 거지. 사념이 강한 녀석들만 남아서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야.
두부의 말에 성우는 골치가 아팠다.
1년 정도 더 노력하면 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두부의 말에 의하면 그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룻밤의 실수 덕분에 겪는 고초치고 너무 과하다 여겼다. 그런 그의 생각을 감지했는지 두부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니지. 목숨값치고는 싸게 먹히는 거지.
‘위로해주는 거냐?’
-현실을 말해주는 거야. 우리 무사귀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데 고맙게 여겨.
‘아이고~ 아주 감사합니다!’
알고 보니 자기 자랑이었다.
성우는 그런 두부에게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두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또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양반이 뭐 이렇게 수다스러운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은근히 그의 전생에서 본 서울의 오래전 모습이 궁금했기에 성우는 그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녀석은 신이 나서 온갖 이야기를 했다.
-저기는 원래 소금이 드나들던 나루터였어.
‘그래?’
-저쪽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염리동이라고 있어. 그 동네에 소금 장수들이 살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하더라.
성우의 눈에는 마포대교가 보였다.
하지만 더는 그 옛 모습을 엿볼 수 없었다.
제아무리 상상하려 해봐도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긴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서래마을도 수십 년 전에는 허허벌판이었다고 들었다. 지금 이 시간에서 또 수십 년이 지나면 서울이 어떻게 변할까 궁금해졌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뭔가 산뜻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뭔가 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특히 집에 가득한 화분이 인상적이었다.
“오~ 여기 형네 집 맞아요?”
“그러게 나 없는 사이에 많이 달라졌네.”
“이건 뭐 아예 인테리어를 새로 한 수준인데요.”
역시 이런 쪽으로 솜씨가 좋은 누나였다.
손재주가 뛰어난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인테리어 쪽에도 센스가 있을지는 몰랐다. 그녀가 살면서 들여놓은 것들을 보며 성우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휑하던 집은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누나는 성우가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고 이미 전세를 구해 이사를 한 상태였다.
그때 전화 한 통이 왔다.
액정을 보니 ‘유식당’을 연출한 주호민 PD였다.
어떻게 자신이 귀국한 것을 알았는지 궁금했다. 그래도 반가운 사람이기에 성우는 그의 전화를 반겼다.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묻던 주 PD는 곧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우리 유식당 시즌2도 함께 해야지?
성우는 그 말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다시 식당을 할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벌써 몸살이 드는 기분이었다. 사실 유식당은 성우가 경험한 어떤 촬영보다 힘들었다. 몸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피로감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사각지대 없이 빼곡하게 설치된 카메라 때문이었다.
카메라가 두렵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찍는 것이 싫었다.
더구나 자신은 다른 일반인들과 사뭇 달랐다.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거는 두부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녀석에게 대꾸하다가 실성한 사람처럼 나오기 십상이었다. 덕분에 지난 유식당 촬영 때도 단 1초도 긴장감을 내려놓지 못한 그였다.
그랬기에 주 PD의 제안은 난감했다.
성우는 부드럽게 그 제안을 거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뉘앙스를 듣고도 주 PD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그럴 거라고 예상했는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며 분위기를 바꿨다.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성우는 알겠다며 약속을 잡았다.
그 이후.
전화는 계속 이어졌다.
대부분 영화 촬영을 잘 마쳤냐는 안부 인사였다.
나름 정신없었지만, 성우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감추지 않았다. 전화를 건 이유는 분명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래도 자신을 생각해주고 있었다는 것이 고마웠다.
“어휴··· 어떻게 다들 알고 전화를 한데?”
“공항에서 만난 기자도 하나둘이 아닌데 새삼스레 뭘 물어봐요. 형 촬영 마치고 입국했다고 기사 떴어요.”
“벌써?”
요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우는 이래서는 사생활도 없다며 좌절했다.
이런 것을 보면 할리우드에 있는 것이 더 편하기는 했다. 유명 스타에게 따라붙는 파파라치가 극성이기는 해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다. 아직 한국에서처럼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많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 소리가 들리자 요한이 일어나서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여는 녀석의 등 너머에 서 있는 오만석 실장이 보였다. 마침 전화를 끊은 성우가 소파에서 일어서며 그를 반겼다. 미국으로 촬영을 간 이후에 처음 보는 거라 무척 오랜만에 만나는 둘이었다.
“왔으면 전화라도 한 통 줘야지.”
“미국에서 출발하면서 전화드렸잖아요.”
“그래도 잘 왔는지 궁금하잖아.”
“제가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저녁은 아직인 거 같은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만석의 말을 듣고 나니 배가 고파왔다.
마지막으로 먹은 기내식도 반쯤 남긴 그였다.
먹고 싶은 음식이 없냐는 말에 두부는 또 난리를 쳤다. 하지만 녀석이 외치는 메뉴 가운데 성우도 모처럼 땡기는 것이 있었다.
“소곱창에 소주 한잔할까요?”
“저녁도 안 먹고?”
“안주가 곧 밥이라고 하셨던 거 기억 안 나요?”
성우는 만석이 예전에 한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말에 만석은 어서 옷이나 입고 나가자며 보챘다. 사실 준비할 것은 별로 없었다. 아직 날은 더웠고 그저 티셔츠 하나만 갈아입으면 끝이었다. 성우가 방에서 나오자 요한까지 세 명은 곧장 곱창집으로 향했다.
지글지글.
숯불에 구워지는 고기는 탐스러웠다.
성우가 곱창을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런 종류의 고기는 미국에서 구하기 너무 어려웠다. 그런 탓에 고기는 굽는 족족 사라지길 반복했다.
“천천히 먹어. 누가 보면 미국에서 굶긴 줄 알겠네.”
“실장님이 5개월 동안 나가 있어 보세요.”
“췌··· 매번 나만 빼고 나가면서.”
“다음 작품으로 제가 대박 치면 사비로라도 비즈니스석 티켓 보내드릴게요.”
“요한이 너! 이거 들었지? 네가 증인이다.”
“뉘에~뉘에~.”
그들 셋은 순식간에 소주 2병을 비웠다.
곱창은 연신 술을 불렀고 술은 취기를 가져왔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오 실장은 일 이야기를 꺼냈다.
“광고 키핑해 놓은 거 제법 많은데 어떻게 할래?”
“대표님과 약속해 놓은 게 있잖아요. 가능한 수준 이내라면 찍어야죠.”
“그래 주면 고맙고.”
“제가 미안해서 그래요.”
“뭐가 미안한데?”
“다음 작품도 미국에서 할 거 같아요.”
성우의 말을 듣고 만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럴 것 같았지만, 막상 그게 현실이 되니 아쉬웠다. 마치 내 품 안에 있던 아이가 커서 떠나는 기분 같았다. 그래도 더 큰 배우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건데?”
“음악 영화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너무 좋아요.”
“어느 감독이야?”
“2년 전에 개봉한 OO랜드의 서전트 감독님이요.”
성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만석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걸 또 어떻게 강 대표에게 전해줘야 할지 막막했다. 사실 사무실에 쌓인 것은 광고 제안서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에게 전해달라며 들어오는 시나리오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어느 하나 부족함 없는 것이지만, 도저히 서전트 감독의 작품에 갖다 대기는 어려웠다.
“대표님도 알아?”
“대충 아실 거예요. 지난번에 미국에 오셨을 때 렉스가 슬쩍 언급했다고 하던데요.”
“알았어. 조만간에 회사에 들어올 거지?”
“그래야죠.”
“아! 내가 깜박했다.”
만석은 가방을 열어 뭔가를 꺼냈다.
성우는 뭔가 싶어서 그의 손을 주시했다.
잠시 후에 그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봉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성우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뭔데요?”
“초대장이 왔는데 한 번 확인해봐.”
“초대장이요?”
성우는 봉투를 열었다.
그러자 붉은 카드 하나가 보였다.
그것을 꺼내자 ‘Busan’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그것만 봐도 성우는 이 초대장의 정체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영화제 초대장이네요?”
“다음 주에 시작하는 데 갈 거야?”
“음··· 생각 좀 해볼게요.”
“갈 거면 빨리 답 줘야 해.
성우는 잠시 고민이 되었다.
부산에서 열리는 영화제는 상당히 유명했다.
아시아에서 제법 알아주는 행사지만, 지금까지 가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이 세 번째 초대인데 매번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지난 몇 년간 이 영화제는 여러 의미로 홍역을 앓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 불려 나가는 것이 불편했기에 성우는 그 자리를 피했다. 성우는 잠시 고민한 끝에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그냥 안 갈래요.”
“뭐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전해줄게.”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영화제 그거 하나 안 간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어.”
“헤헤. 한잔하시죠.”
성우는 소주병을 집었다.
그리고 만석의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그때 성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액정을 보고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만석은 그런 성우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다.
“누군데 전화를 안 받아?”
“몰라요.”
“모르는 번호야? 이름이 뜬 거 보면 아는 사람 같은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 전화는 별로 받기 싫어서요.”
성우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평정심을 잃었다.
만석은 예상외의 반응을 보이는 성우에게 더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성우의 등 너머에 서 있는 한 여성이 보였다. 긴 생머리에 제법 얼굴이 예쁜 편이었다. 하지만 팬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그녀의 묘한 눈빛 때문이었다. 그 여성은 잠시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야! 유성우. 너 왜 내 전화를 그렇게 끊어?”
그 목소리에 성우는 깜짝 놀랐다.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서 있었다. 그 순간 성우는 마치 6년을 거슬러 21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성우가 고개를 돌리자 한때 잊지 못해 발버둥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이 보였다.
“손··· 소연?”
< 광끼 -11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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