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13 >
경기의 여파는 무척 컸다.
일반인이 챔피언과 싸운 경기였다.
그런데 결과가 무승부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친선 경기라 평가절하 하려 해도 불가능했다. 실제 고난이도 스킬과 맹렬한 타격이 난무하던 경기를 보고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날의 경기 영상은 온갖 사이트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Title : 챔피언을 찜쪄먹은 일반인의 격투기 클래스]
### : 미친··· 정말 클라크를 상대로 무승부를 했다고?
ㄴ ### : 판정이 있었다면 유성우가 이긴 경기라 봄
### : 이번 기회에 격투기 선수로 전향하는 것을 권유합니다. 재능이 너무 아까워!
### : 이 남자에게 신이 주지 않은 것은 뭐가 있을까? 노래 잘해 연기 잘해 싸움 잘해. 그리고 잘생긴 것은 덤으로!
### : 와~ 다음 영화 ‘아크로’ 너무 기대된다.
ㄴ ### : 언제 개봉하는 걸까요? 빨리 보고 싶네요.
### : 이걸로 끝내는 것은 아쉽다. WFC는 어서 재경기를 주최하라!
영상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것에 반응한 것은 한국인뿐이 아니었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다. 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레전드 경기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그 호기를 에이전시에서 바보처럼 그냥 놓칠 리는 없었다.
한국의 바이올렛 엔터와 미국의 ACA.
두 회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다.
덕분에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특히 모처럼 성우의 기사가 나가는 한국의 반응은 무척 뜨거웠다. 아직 이름을 알리지 못한 미국과는 사뭇 다른 온도 차이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국에서 성우는 이미 톱스타였다.
영화 ‘왈우’와 드라마 ‘저승에서 온 차사’.
그리고 예능인 ‘유식당’까지 연달아 대박을 친 성우였다. 그런 덕분에 국내에서 그의 인지도는 상당히 높았다. 아직 왈우를 같이 찍었던 조강철급은 아니지만, 단순히 몸값만으로 따지면 성우보다 더 받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얏! 좀 살살 좀 해.”
“강 대표님이 꾸욱꾸욱 눌러가며 약을 바르라고 하던데요.”
“대표님이 의사도 아닌데 무슨.”
“흉터가 조금이라도 남으면 알아서 하래요.”
요한의 말에 성우는 웃음만 나왔다.
똑같은 말을 렉스에게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경기가 끝난 직후 찾아온 둘은 번갈아 가며 성우를 쥐 잡듯 잡았다.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알기에 성우는 그때나 지금이나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었다. 사실 자신이라도 소속 배우가 이런 미친 짓을 하면 그럴 것 같았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그래도 치료는 필요했기에 두어 바늘을 꿰맸다.
당분간 틈틈이 성형외과에 가야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지난 경기 덕분에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자신감이 확고해졌다. 성우는 마지막으로 성형외과에서 준 반창고를 붙이는 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렉스는 언제 도착한 데?”
“방금 출발했다고 비서한테 연락 왔어요.”
“그럼 금방 오겠네.”
성우는 얼굴에 붙은 반창고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며칠 지났다고 얼굴은 붓기가 꽤 가라앉았다. 거울을 보고 있는 그에게 유부가 슬며시 다가왔다. 녀석은 방금 아침을 먹은 탓에 배가 빵빵해져 있었다. 점차 살이 붙는 것이 비만으로 서서히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다.
“너 요즘 너무 살찌는 거 아냐?”
“냐아옹.”
녀석은 한 차례 울더니 또 어디론가 사라졌다.
시크한 뒷모습이 마치 쓸데없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녀석의 뒤를 따라가니 캣타워 위로 올라가 털썩 널브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주 포동포동해지는군.
‘그러게. 다이어트를 시켜야 하나?’
-뭐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건강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다.
병원이라도 데려가야 할까 고민할 찰나.
마침 렉스의 화려한 차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성우가 2층에서 손을 흔들자 운전석에서 렉스가 웃는 것이 보였다. 어제 봤던 것과 달리 그의 표정은 기분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는 차를 주차하고 내리자 다른 동행이 있는 것이 보였다.
“서전트 감독님?”
성우는 둘이 함께 내리는 것을 보고 의아했다.
서전트 감독은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아크로 촬영 때문에 워낙 성우가 바빴던 탓이었다. 지난번에 시나리오를 받은 이후에 몇 개월 만이라 무척 반가웠다. 두 사람은 곧장 집으로 들어와 성우가 있는 2층으로 올라왔다.
“감독님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성우 씨가 워낙 바쁘니 얼굴 보기가 힘드네.”
“그런데 어떻게 둘이 같이 오시는 거예요?”
그 질문에 둘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렉스의 눈빛을 받고 서전트는 가방을 열었다.
그곳에서 나온 것은 두툼한 하얀 종이 뭉치였다. 성우는 그것을 보고 한 눈에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둘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전에 주셨던 시나리오 완성됐어요?”
“맞아. 예전에 보여 줬던 그게 완성됐어.”
“읽어봐도 되나요?”
“당연하지. 시간 될 때 꼭 읽어줘.”
서전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오늘 그가 가져온 시나리오는 훌륭했다.
단숨에 성우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성우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곧장 시나리오를 집어 들었다.
“지금 바로 읽게?”
“100페이지 조금 넘는 거 같은데. 이 정도는 금방 읽어요.”
성우는 속독에 자신이 있었다.
무사귀가 던진 과제를 통해 익힌 능력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다. 이 정도 두께라면 15분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서전트 감독이 만류했다. 괜히 대충 읽고 싫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천천히 읽고 고민해도 늦지 않아.”
“그런 거는 제 성격에 맞지 않아서요. 시간 괜찮으세요?”
“어차피 약속도 없으니 그럼 기다리지.”
“커피라도 좀 드릴까요?”
둘은 알아서 마시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우는 그런 둘을 이내 관심에서 지웠다. 어차피 아래층에 요한과 최정이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챙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우는 시나리오의 표지에 적혀있는 제목을 중얼거렸다.
“버스커(Busker)라···”
제목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 단순한 감이 있었지만, 직관적이었다.
성우는 표지를 과감히 넘기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두어 페이지도 넘기기 전에 성우는 전문 작가의 힘을 여실히 느꼈다. 전과 뼈대는 비슷하지만, 확실히 몰입도가 달랐다. 다만 주인공은 이민자 2세가 아닌 입양된 아이로 바뀌었다.
-이거 재미있는데.
‘그 이야기는 전에도 똑같이 했어.’
-아니 바뀐 내용이 더 좋아. 확실히 개연성이 있어.
성우는 두부의 의견에 동의했다.
평론가인 척을 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게 사실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한 장씩 넘어가는 시나리오는 순식간에 그 마지막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끝에 엔딩을 보며 성우는 울컥했다. 글자만으로도 충분히 그 장면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느낌이 뭔가 익숙한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도대체 누가 쓴 거지?’
-아까 보니까 표지에 적혀 있던 거 같은데.
‘그랬나?’
성우는 다시 표지를 펼쳤다.
그러자 우측 하단에 적힌 이름이 보였다.
Colley Hong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고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을 보니 한국인으로 추측이 되었다. 더구나 시나리오에서 보인 디테일한 부분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딱히 누군지 감은 오지 않았다.
사실 자신이 모든 작가를 다 아는 것이 아니기에 성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가 쓴 건지 궁금하기는 했다.
자신이 느꼈던 그 모든 것들이 시나리오에 담겼다.
그가 전에 서전트 감독의 초안을 읽고 아쉬웠던 모든 것이 수정되었다. 특히 낯선 공간에서 연주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입양아로 느낀 외로움을 그대로 투영했다. 쓸쓸함이 뚝뚝 떨어지는 분위기였다.
성우는 그 시나리오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1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러자 거실에서 담화를 나누고 있는 렉스와 서전트 감독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전트 감독은 성우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벌써 다 읽었어?”
“좋은데요. 저 이거 출연시켜 주시나요?”
“당연하지!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거야.”
서전트 감독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이 배역을 해낼 수 있는 배우는 성우를 빼고 없을 것 같았다. 연기력과 함께 연주 실력도 수준급인 배우가 또 있을까? 그것도 아시아를 한정해서 찾기란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촬영은 언제부터 하는 거죠?”
“뭐가 그렇게 급해?”
“마음 같아서는 당장 촬영하고 싶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준비하려면 적어도 몇 개월은 걸릴 거야.”
렉스는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촬영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말했다. 서전트는 투자사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부터 캐스팅까지 프리 프로덕션 과정은 제법 길었다. 그런 설명을 듣고 성우는 당연히 수긍해야 했다. 성우는 그 기간 동안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성우가 렉스에게 의견을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왜 나한테 묻냐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다른 배우들처럼 휴가나 좀 다녀오고 그래.”
“그럴까요?”
“그건 렉스 말이 맞아. 적어도 몇 주 정도는 제대로 쉬어야지 다음 작품에 또 들어가지.”
몸에 누적되는 피로.
그것보다 정신적인 피로감을 지워야 했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서전트는 거듭 강조했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다 망가지는 배우를 적지 않게 본 그였다. 잠시 고민하던 성우는 뭔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그럼 쉬는 동안 잠시 한국에 들어갔다 올게요.”
“좋은 생각이야. 그렇다고 너무 쉬고 오진 말고.”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부르면 바로 튀어 올 테니 영화 찍을 준비나 어서 해주세요.”
성우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구만리 같았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마 이 순간 성우의 결정을 강 대표가 들었다면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거의 5개월 만의 귀국이었다.
“한국!”
“앗싸. 드디어 집에 가는구나.”
최정과 요한.
두 사람도 그 결정을 반겼다.
요한은 약간 뜨뜻미지근한 반면에 최정은 좋아했다. 이곳에서 산 아이템을 한국에서 선보일 절호의 찬스라 여긴 탓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곧장 어떤 옷과 장식을 가방에 넣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둘 다 두부의 반응에는 못 미쳤다.
녀석은 확실히 19세기형 토종 한국인이 분명했다.
미국에 와서 몇 개월이 지나니 자신은 느끼지 못한 향수병에 심하게 걸린 두부였다. 녀석은 평소에도 그 누구보다 강력히 어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언어도 문제지만, 음식이 가장 큰 이유였다.
두부는 음식을 그리워했다.
고기를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그러니 성우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 문제는 녀석이 식사할 때마다 한식당을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도 차로 30분 거리였다. 매번 차를 끌고 다녀온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우가 직접 해주기도 했다.
문제는 재료에 있었다. 한인 마트에서 사다 놓는 재료로 해결할 수 없는 메뉴가 너무 많았다. 덕분에 두부와 성우는 식사때마다 다투는 것을 몇 개월째 이어가고 있었다. 당연히 한국에 가겠다는 결정에 녀석은 환호성을 질렀다.
-짜장면, 떡볶이, 김치찌개, 냉면...
녀석은 그간 먹고 싶었던 메뉴를 외쳤다.
두부의 열렬한 반응에 성우는 혀를 찼다.
그런 것도 모르고 녀석은 벌써 열네 번째 음식 이름을 읊조리고 있었다. 그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한 것이 그냥 놔두면 저녁때까지 저 난리를 칠 것 같았다. 순간 성우는 이 녀석의 정체가 의심되었다. 무사귀가 아니라 굶어 죽은 아귀가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이 아귀 같은 녀석!’
< 광끼 -11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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