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10 >
아침 해가 밝아왔다.
성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나갔다.
그러자 상당히 넓은 정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성우는 결국 클라크 헤이우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 그의 선택을 클라크는 무척 반겼고 선뜻 자신의 집을 성우에게 내줬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좋은 일을 한다는데 무임승차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성우는 매월 오천 달러의 임대료와 유지비를 내기로 했다. 제법 큰 돈이었지만, 이 정도의 주택에서 살려면 그 2~3배는 내야 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이런 집에서 살아 볼지 모를 일이었다.
“아침 드세요!”
주방에서 요한이 소리쳤다.
성우는 알겠다며 답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를 준비해 놓은 식탁이 보였다. 성우가 매번 굳이 이럴 필요 없다고 해도 녀석은 막무가내였다.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잘 먹을게. 정이 형이랑 우현이는?”
“둘 다 깨웠으니까 슬슬 내려올 거에요.”
“좋은 아침!”
“잘 주무셨어요?”
마침 최정과 우현이 함께 내려왔다.
최정은 아침이라 그런지 오랜만에 수수한 패션이었다.
그래도 반들거리는 실크 잠옷은 꽤 비싸 보였다. 그것을 보면서 성우는 그의 월급 대부분은 옷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반면에 정작 배우인 성우와 우현은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냉장고 바지에 불과했다. 그것을 본 최정은 성우를 보며 말했다.
“편하게 입을 잠옷 좀 사다 줄까?”
“글쎄요. 저는 이게 편한데.”
“한 번 입어 봐. 수면의 질이 달라져.”
“어차피 잘 때는 속옷만 입어서 괜찮아요.”
그의 말에 최정의 눈가는 가늘어졌다.
뭔가 위험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성우는 곧바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이럴 때는 부담이 되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성우는 최정의 성정체성이 어느 쪽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나만 아니면 돼.’
-뭐가?
‘아무것도 아냐. 그런데 요즘 왜 이렇게 무사귀가 조용해?’
성우는 그게 궁금했다.
무주귀야 봉사 활동을 통해 반쯤 내쫓았다.
그 위세가 약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사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작년에 마무리된 요리 미션 이후 그들은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성우는 말없이 아침을 먹으며 두부에게 물었다.
‘무주귀가 떠났는데 왜 오히려 무사귀가 조용해?’
-그게 좀 복잡해.
‘왜?’
-무주귀 녀석들이 떠날 때 같이 빠져나간 녀석들이 꽤 많아.
‘무사귀도?’
두부는 그렇다고 답을 했다.
그 이야기는 처음 듣는 거라 성우는 의아했다.
그들이 자진해서 떠나는 것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과거 성우의 몸을 탐하던 때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로 두부는 유부를 지목했다.
‘저 녀석 때문이기도 해.’
-우리 귀염둥이 유부가 뭘 어쨌다고.
‘귀염둥이가 다 얼어 죽었냐! 무당 아줌마 이야기 들었잖아. 저거 요물이라니까!’
성우는 녀석의 말을 무시했다.
어딜 봐서 유부가 요물이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오히려 김민이 말한 것처럼 수호신과 같은 존재가 녀석이었다. 유부는 요즘 1층부터 2층까지 돌아다녀 좀처럼 얼굴 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넓은 집으로 온 부작용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도 밥때는 귀신같이 아는 녀석이었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던 유부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느꼈는지 성우를 바라봤다. 녀석은 심드렁하게 바라보더니 다시 사료를 탐했다.
“저 녀석 아직도 삐진 거야?”
“형 말대로 샤워 부작용이 오래 가네요.”
“누가 보면 물에 닿으면 녹아내리는 지 알겠네.”
“어! 그거 옛날에 어떤 영화에서 본 거 같아. 그렘린인가 기즈모로 기억하는데.”
“여기서 형의 연식이 드러나는군요?”
성우의 말에 요한이 소리죽여 웃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영화는 무척 오래되었다. 대충 따져도 거의 30여 년 전의 것이었다. 최정을 제외하면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태어나지 않았던 시기였다. 정작 최정은 별로 아랑곳하지 않는 듯 말했다.
“너희도 나이 먹는 거 금방이야.”
“하긴 형이 저랑 같이 일한 지가...”
“4년차다.”
“시간 정말 빠르기는 하네요.”
성우의 말에 요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진수의 후임으로 성우와 함께한 지 벌써 3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눈만 깜짝하면 한 해가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들 세 명은 옛 추억에 대해 이야기했고 우현만 그 속에 끼어들지 못했다.
“다들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서 나갈 준비 하죠.”
“엇! 별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 중요한 촬영이니 늦지 않게 가세요.”
우현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찍는 날이었다.
악의 세력과 한판 대결을 벌이는 액션이기에 가장 고난이도에 가까웠다. 성우는 이날을 위해 지난 1년 가까이 연습해왔다. 성우는 티슈로 입가를 닦아내며 우현을 바라봤다.
“너는 오늘 뭐 할 거니?”
“그냥 여기서 수영이나 하려고요.”
“온종일?”
“심심하면 킬리안 집에 가서 대련이나 하면 되죠.”
우현의 말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우현은 촬영 현장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 분량이 그리 넉넉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 한국에 돌아가도 상관없지만, 성우는 많은 빈방 가운데 하나를 녀석에게 주었다.
“잘 먹었어. 슬슬 출발하죠.”
* * *
촬영은 차질없이 이어졌다.
본래 120일로 잡혀 있던 촬영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오기도 전의 일이었다. ‘아크로’는 오늘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불과 103일 만의 일이었다.
NG 없는 연기와 대본을 통째로 외우는 기억력.
날 것에 가까운 액션을 손수 해내는 액션 실력.
주연인 성우의 그런 능력 덕분에 오히려 일정이 줄어든 것이었다. 킬리안이 찍은 레오파드에 비해 거의 한 달 가까이 빨랐다. 하지만 성우는 오늘 마지막 컷을 위해 집중을 거듭했다.
-이 촌티 나는 노란 슈트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두부의 말에 성우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과거 처음 입었을 때와 달리 지금은 꽤 정이 많이 든 상태였다. 오죽하면 슈트를 입으면 뭔가 안정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마 전신을 타이트하게 감싸는 느낌 때문인 것 같았다. 이제 슈트는 성우에게 있어 거의 피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스태프 한 명이 그의 트레일러를 노크했다.
“촬영 들어갑니다.”
“나갈게요.”
성우가 다급하게 일어섰다.
그러자 요한이 마스크를 건넸다. 그것을 받은 성우는 얼굴에 뒤집어쓰며 말했다.
“금방 다녀올게.”
“말년 병장 때는 낙엽 잎도 조심하랬어요. 마지막까지 잘 하세요.”
“쓸데없는 소리한다.”
성우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촬영 현장은 어느 때보다 술렁이는 느낌이었다. 다들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에 감회가 새로운 것 같았다. 일정은 짧았지만, 촬영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했던 그들이었다.
때론 웃고
때론 다투며
조금이라도 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 정도로 노력했는데 성적이 안 좋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 씬 입니다! 첫 촬영은 버드아이 뷰 샷 (B.E.V) 갑니다.”
“한 번에 갑시다. 레뒤~ 슛!”
감독의 사인이 떨어진 이후.
성우는 자세를 잡으며 상대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와이어를 달고 있지 않았지만, 그 점프력은 상당했다. 그러나 곧 성우는 상대방에 의해 멈춰야 했다. 그를 멈춘 것은 바로 레오파드 역의 킬리안이었다. 성우는 그를 향해 외쳤다.
[내 앞길을 막지 마.]
[이미 끝났어.]
[아니! 내 복수는 아직이야. 이대로 막아서면 친구라도 베고 갈 거다.]
성우는 두 자루의 검을 뽑았다.
영화 후반부터 칼을 이용한 액션이 위주가 되었다. 덕분에 성우는 위례검의 실력을 아낌없이 뽐낼 수 있었다. 영화의 설정상 그의 칼은 베어내지 못할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들 가운데 레오파드를 감싸고 있는 그 슈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로 나를 베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해보면 알겠지.]
[더 이상의 복수는 무의미해. 그 자식은 이제 나한테 맡겨.]
[그럴 수는 없어. 부모님의 원수를 여기서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정말 포기할 수 없어? 그럼 내가 포기하게 만들어주지.]
킬리안은 손톱을 드러냈다.
그리고 성우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감독이 컷을 외쳤다. 영화의 엔딩이자 촬영의 마지막인 장면이었다. 성우는 그대로 그 자리에 누워서 외쳤다.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서 일어나 씻으러 가야지.”
성우가 눈을 뜨자 킬리안이 보였다.
어느 사이에 마스크를 벗은 녀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성우는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일어섰다. 성우는 오랜만에 보는 녀석을 툭 밀치며 말했다.
“요즘 운동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네가 봐도 내 가슴 근육 정말 끝내주지?”
“노 코멘트. 그런데 말이야. 너 혹시 클라크와 붙어본 적이 있어?”
“클라크면 설마 Blessed?”
킬리안의 물음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럴 기회가 없다고 했다. 제아무리 킬리안이라도 링 위의 황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 쓸데없이 대련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원성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더구나 다치는 쪽이 그가 아니라 자신일 가능성도 무척 높았다.
“그런데 왜?”
“클라크가 말 안 해줬어?”
“그러니까 뭘?”
“나 이번에 클라크랑 붙어.”
“붙기는 뭘 붙어.”
“자선 행사에서 한 게임 하자고 하던데.”
“진짜 격투기 룰로?”
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킬리안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는 잠시 멈춰있다가 엄숙한 표정으로 손을 올려 성호를 그었다. 마치 명복을 빌어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성우의 양쪽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지금이라도 취소해. 너 정말 골로 가는 수가 있어.”
“안돼. 이미 확정한 거야.”
“아무리 너라도 클라크는 챔피언이야. 이건 조금 아니지 않아?”
“그 역시 사람이야.”
“아니! 그는 링 위의 신이야.”
킬리안의 반응은 격했다.
그 내면에는 부러움도 살짝 깔려 있었다.
클라크와 유성우의 대결이라니 기대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성우가 걱정되었다. 만약 검을 들고 싸우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링 위에서는 경기의 룰이 있었다. 아무래도 산전수전을 겪은 클라크가 유리한 곳이었다.
“자선 경기니까 와서 기부나 통 크게 해.”
“내가 너희 둘의 경기라면 꼭 간다. 이런 거를 도대체 누가 기획한 거야?”
“웃기고 있어. 네가 내 영상을 보여줬다면서.”
“뭐 그런 쓸데없는 말까지 했대?”
킬리안은 그제야 자신의 원인이란 것을 알았다. 애꿎은 뒤통수만 긁적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킬리안은 성우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래서 그 자선 행사는 언제 하는데?”
“열흘 후에 스타디움에서.”
“장소하고 시간 문자로 찍어줘. 그리고...”
“그리고?”
“클라크의 콤비네이션 공격 조심해.”
“걱정해줘서 고맙네.”
성우는 알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트레일러로 향했다. 어서 씻고 집에서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크랭크업(촬영 종료) 파티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인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가 트레일러의 문을 열자 최정과 요한이 반겨주었다.
“수고하셨어요.”
“형이랑 요한이도 수고했어.”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가?”
“아뇨. 저 며칠 후에 자선 행사 있잖아요.”
“까먹고 있었네. 그런데 그 경기에서 입을 트렁크는 있어?”
최정의 물음에 성우는 눈만 끔뻑였다.
선수들이 입는 트렁크는 전혀 생각도 못 해 본 그였다. 그런 그를 향해 최정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알았어. 내가 알아서 준비할게.”
“고마워요.”
“코디가 이런 거 처리하라고 있는 건데 뭐.”
성우는 슈트를 벗었다.
이제 이 슈트도 당분간 안녕이었다.
다시 입으려면 적어도 1년 정도는 걸릴 것 같았다. 모든 영웅이 총출동하는 유니버스 시리즈가 있지만, 아직 일정이 정확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출연 분량이 제법 될 것으로 예상하었다. 성우는 슈트를 옷걸이에 걸며 중얼거렸다.
“다음에 또 보자고!”
< 광끼 -11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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