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09 >
성우는 잠시 당황했다.
전에 봤을 때와 무척 다른 느낌이었다.
한편으로 그녀가 스토커가 아닐까 의심이 되기도 했다. 이런 우연이 있을 리가 없었다. 미국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그런 일이라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그 가정을 지웠다
그녀가 성우를 알 리가 없었다.
이 땅에서 그는 아직 유명인이 아니었다.
물론 한인 타운의 한인들은 그의 팬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성우의 출연 소식을 접한 마벨 골수팬밖에 없다 해도 무방했다.
“이렇게 줄리아를 다시 볼 줄은 몰랐어요.”
“제 이름은 기억하시고 계시네요. 혹시 다친 곳은 없어요?”
“네. 저는 별로···”
“미안해요.”
“아니에요. 제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그렇게 된 건데요.”
성우 역시 그녀에게 괜찮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그의 말에 줄리아는 스트레칭하듯 머리를 한 바퀴 돌리더니 멈췄다. 그런 이후에야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괜찮은 것 같네요.”
사실 크게 다칠 정도의 사고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줄리아가 몰던 차의 범퍼는 엉망이었다. 반면 자신의 차는 스크래치 정도만 나는 수준이었다. 차의 체급이 아예 다르니 어쩔 수 없었다. 에스컬레이드는 확실히 덩칫값을 했다. 그때 요한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를 보고 줄리아가 말했다.
“친구이신가 봐요?”
“아뇨. 제 매니저인데요.”
“매니저요?”
성우는 그걸 어떻게 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자신의 입으로 한국에서는 제법 잘 나간다고 말하기도 쑥스러웠다. 그것은 마침 조수석을 열고 나온 요한이 해결해줬다.
“조금만 기다리면 이곳에서도 유명해질 거에요.”
“그래요?”
“뭐죠. 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은?”
줄리아의 표정이 그랬다.
그것을 본 성우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그에게 줄리아는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연락처를 달라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곧 이어진 그녀의 말을 듣고 허탈하게 웃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시고 보험증이요.”
“하하. 저는 또 뭔가 했네요.”
“그러고 보니 불공평하네요. 저는 연락처를 두 번이나 줬는데 정작 한 번도 못 받았어요.”
그녀는 핸드폰을 내밀었다.
어서 거기에 번호를 찍으라는 의미였다.
성우는 뭐에 홀린 듯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그러는 사이 요한은 보험증을 들고 다가왔다. 그것을 찾느라 늦게 내린 것 같았다.
“보험증은 여기요.”
“렌탈한 차인가 봐요?”
“맞아요. 이 회사로 연락주시면 될 거예요.”
“그렇군요. 제 서류는 여기 있어요.”
요한과 줄리아는 서로 서류를 교환했다.
미국에 살아본 경험 때문인지 요한은 꽤 능숙했다. 녀석은 줄리아의 운전면허와 차량 등록증 등을 확인하고 보험 회사에 연락을 취했다.
줄리아 역시 보험사 통화를 했다.
그녀는 통화 대기음을 들으며 자신의 차를 바라봤다. 새 출발을 하겠다는 각오로 새로 뽑은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났으니 당연히 달갑지 않았다. 줄리아는 화풀이할 셈으로 범퍼를 툭 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범퍼가 뚝 떨어지고 말았
다.
“히잉···”
“그러다 발목 상해요.”
“보험사랑 통화가 잘 안 되네요.”
그녀와 대화할 무렵.
요한이 전화를 끊고 성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손목시계를 슬쩍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최정과 약속한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한참 기다렸다며 길길이 날뛸 정이 형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형 먼저 가실래요? 중개사랑 정이 형 기다리는데.”
“조금 있다가 같이 가지 뭐.”
“이거 경찰도 불러야 해요. 처리하는데 시간 좀 걸릴 거 같은데요.”
“운전한 사람이 난데 먼저 가면 어떡해.”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봐도 그건 좀 무리가 있었다.
적어도 경찰이 사고 조사를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최정에게 오늘 캔슬을 알린 이후에 아무리 기다려도 경찰도 보험사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슬슬 기다림에 지쳐가던 성우는 바로 옆의 노천 카페가 보였다.
“날도 더운데 저기 앉아 있죠.”
“뭐 그렇게 해요.”
“요한아 너도 어서 와.”
“넵!”
그들 세 명은 카페로 향했다.
차가 세워진 곳이 코앞이라 다행이었다.
누군가 다가오면 바로 볼 수 있었다. 성우는 커피를 시키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줄리아는 아직도 통화할 곳이 남아있는지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후.
그녀는 찡그린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왜 그러냐고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성우는 애꿎은 커피잔만 빙빙 돌리며 딴청을 부려야 했다. 그런 그에게 줄리아가 말을 붙였다.
“그나저나 저 때문에 약속에 늦으신 거 아닌가요?”
“괜찮아요. 중개사랑 약속이 있었는데 다음으로 미뤘어요.”
“저랑은 사뭇 다르네요.”
“네?”
“제 고객은 사고 나서 못 가겠다고 하니 그냥 끊어 버리던데요. 집 사려고요?”
성우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틈을 타 요한은 그녀에게 푸념을 늘어 놓았다.
집을 구하기 어렵다느니 중개사가 마음에 안 드니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녀석을 보고 성우는 조금 난감했다. 바로 앞에 앉아있는 그녀도 중개사였기 때문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번에 체비엇 힐스 남쪽에 괜찮은 집이 나왔다고 해서 가던 길이었어요.”
“체비엇이요? 혹시 전에 풋볼 에이전트가 살던 집 아닌가요?”
“그런 거 같은데요. 혹시 아세요?”
“거기가 맞다면 좀 별로인데...”
줄리아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괜히 다른 중개사의 일에 훼방을 놓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미 별로라는 말을 들은 이상. 성우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는 그 이유를 말해달라고 추궁했고 요한까지 합세하자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저한테 들었다고 하지 마세요. 이쪽 세계에도 불문율이라는 게 있어요.”
“걱정 말고 말해 봐요.”
“사실 몇 개월 전에 그 집에 강도가 들어서 살인 사건이 났어요.”
“살인이요?”
“문제는 범인이 아직 안 잡혔다는 거예요. 굳이 찜찜하게 그런 집에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요.”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급하게 가격마저 낮춰서 내놓은 것부터 의아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런 거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신기했다. LA는 워낙 넓고 집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사실 제 취미가 좀 특이해요.”
“뭔데요?”
“추리 소설 쓰는 거요. 그래서 범죄 관련 뉴스는 빼놓지 않고 챙겨 보는 편이죠.”
“그래도 기억력이 참 좋네요.”
“더구나 체비엇 힐스는 저도 종종 물건이 나오면 중개하는 곳이니까요.”
“혹시 저렴하고 괜찮은 집 있나요?”
성우의 질문에 줄리아는 빤히 쳐다봤다.
정말 자신에게 일을 맡기는 건지 묻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성우는 구체적인 조건을 내밀었다.
“매매는 힘들 것 같고 임대로 1년 단위 계약할 집을 찾고 있어요.”
“비용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데요?”
“월 오천에서 만 달러 미만이면 좋겠어요.”
“그 정도면 충분하죠. 그런데 연예인이라고요?”
“왜요?”
줄리아는 태블릿을 꺼냈다.
그리고 성우에게 사진 몇 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곳은 이름 꽤 알려진 할리우드의 스타가 사는 집이었다. 한눈에 봐도 그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그런 저택이었다. 그중에 눈에 익은 집도 있었다.
“여긴 킬리안의 집이네요.”
“오! 가보셨어요?”
“파티에 초대받아서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이 집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에요.”
“뭔데요?”
“사생활 보호가 가능한 집이죠.”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집을 고를 때 가장 염두에 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누군가 찾아오는 것이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 때문에 주변에 사는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싫었다. 그때 경찰차 한 대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집은 한 번 알아보고 연락 줄게요.”
* * *
며칠 후.
성우는 웨스트 할리우드로 향했다.
집을 알아봐 주겠다고 말한 줄리아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사실 오늘 그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웨스트 헐리우드가 얼마나 비싼 곳인지 이미 그도 알고 있었다. 이곳은 벨우드, 베벌리 힐즈와 함께 LA에서 스타들의 보금자리로 손꼽히는 지역이었다.
“우와··· 집이 뭐 저렇게 커요?”
“이런 곳은 꿈도 꾸지 마. 빼박 예산 초과야.”
“물론이죠. 그래도 조금 부럽네요.”
“크음. 그건 나도 인정.”
성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집들이었다.
예산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그들이 멈춘 곳은 상당히 큰 저택이 서 있었다. 혹시 몰라 입구를 바라봤지만, 주소는 확실히 이곳이 맞았다.
“여기 맞지?”
“확실히요.”
“이건 뭐 거의 킬리안 집 수준이잖아?”
“유지비만 따져도 적지 않게 들겠는데요.”
요한의 말에 성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왜 이런 곳을 소개해주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 자신이 말했던 비용으로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1주일 이상 집을 보러 다녔던 덕분에 보는 눈이 조금 생긴 그였다. 그때 집안에서 줄리아가 때마침 걸어 나왔다.
“시간에 맞춰서 왔네요.”
“정말 여기에요?”
“맞아요. 일단 들어와서 봐요.”
줄리아는 집 안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리고 한동안 내부를 소개해주었다.
밖에서 봤을 때보다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하지만 이내 성우는 발걸음을 멈추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정말 여기가 제가 말한 예산에 가능해요?”
“음···”
“아니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른 곳 보러 가죠.”
“아뇨. 그게 아니라 가능하긴 해요.”
“그게 무슨 뜻이죠?”
“집주인이 조건 하나가 있다고 하는데 말이죠... 마침 저기 오네요.”
줄리아가 바라보는 곳.
그곳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그를 본 순간 성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남자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격투기 선수 가운데 한 명인 클라크 헤이우드였다.
페더급의 황제.
28전 무패의 기록을 가진 폭군.
집에서도 종종 MMA 격투기를 즐겨 보던 그였다. 그런 그가 클라크 헤이우드를 몰라볼 리 없었다. 자신과 가장 체급이 비슷한 클라크의 경기는 언제나 재미있었다. 그의 주특기인 빠른 풋워크와 콤비네이션 공격으로 상대방을 농락하는 스타일은 호쾌했기 때문이었다.
“Blessed!”
“제 별명을 아는 거 보니 저를 아시는군요?”
“당연하죠. 당신의 팬이거든요.”
“다행이네요. 저도 성우 씨의 팬이에요.”
성우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아는 건지 의아할 뿐이었다. 그러나 클라크는 그런 그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이어갔다.
“줄리아의 말처럼 제가 제안 하나를 할 거예요. 그걸 받아들이면 이 집을 무상으로 렌탈해드리죠.”
“정말인가요?”
“당연하죠. 제가 이런 걸로 농담할 리가 없잖아요.”
성우는 잠시 고민이 되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클라크는 서서히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링 위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두부는 그런 그의 모습에 경계심을 보였다.
-혹시 저 녀석 취향이?
‘시끄러워!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왜 너한테 이런 제안을 하는 거야?
그건 성우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멍해졌다.
링 위의 황제라 불리던 그가 제안한 것은 결투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격투기 룰로 한판 겨루자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어느 사이에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꼭 당신이랑 겨뤄보고 싶어요.”
“왜 하필 저죠.”
“킬리안이 당신의 영상을 보여줬거든요. 그것을 보니 잠이 안 와서요.”
클라크는 웃으며 답해줬다.
사실 그는 킬리안의 소개로 성우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곧 그의 대련 영상을 보고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우연하게 보게 된 것이지만, 지금과 같이 강렬한 끌림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최근 경기가 다들 무미건조하게 끝나서 그럴 수도 있었다.
7경기 연속 K.O. 승리
그것도 챔피언 방어전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도전자도 그에게 만족감을 선사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성우의 존재는 무척 흥미로웠다. 그래서인지 모처럼 자신의 도전 의식을 불타게 만들었다.
“여기서요?”
“정식 무대 위에서 할 거예요.”
“어떤 무대요? 저보고 격투기로 데뷔하라고요?”
“아니요. 이번 방어전을 끝내고 기아 아동을 위한 모금 행사가 열릴 거예요. 거기서 하죠.”
“제가 요즘 촬영 중이라 조금 애매한데 그게 언제쯤이죠?”
“11월 정도는 될 것 같군요.”
클라크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것을 듣고 성우는 어떻게 하나 난감했다.
11월이면 아크로의 촬영도 얼추 끝나갈 무렵이기는 했다. 그저 평범한 대련이면 벌써 거절했겠지만, 좋은 뜻이 있기에 선뜻 거절하기 애매했다. 더구나 클라크 못지않게 성우도 은근히 호승심이 일어났다.
‘과연 내가 저 남자도 이길 수 있을까?’
그런 원초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확실히 자신이 쉽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가장 정확한 것은 길고 짧은 것을 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두부도 모처럼 좋은 구경거리라 여겼는지 계속 옆에서 부추겼다.
-해봐! 누가 지상 최고의 강자인지 겨뤄보자!
< 광끼 -10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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