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08 >
서전트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덕분에 렉스는 잠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낮 사이에 부쩍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득실을 따졌다. 그 고민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기준은 역시 돈이었다. 남들이 그를 향해 돈 귀신이라 욕할지 몰라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에이전트였다.
고객과 자신의 이익을 향해 움직여야 했다.
그게 가장 기본적이자 중요한 원칙이었다. 하지만 바로 앞에 앉아있는 서전트 감독 역시 탐났다. 지금은 다른 에이전시 소속이지만, 언제 ACA로 옮겨올지 모를 일이었다. 괜히 욕심을 부려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거기에 개인적인 친분도 무시하지 못할 부분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이걸 만들 필요가 있어?”
“절박하니까.”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는 아직 뚜껑도 안 열었잖아.”
“그거는 시작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결과는 안 봐도 뻔해.”
서전트의 말에는 자조감이 섞여 있었다.
그런 그의 말에 렉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결국, 그는 책상 서랍 안에서 위스키 하나를 꺼내 빈 잔을 채워 서전트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자신은 시가에 불을 붙였다.
“마셔.”
“안 그래도 필요했는데 잘됐네.”
“이번 영화가 잘못되더라도 겨우 한 번이야. 그럴 때도 있지.”
“천하의 피도 눈물도 없다는 렉스에게 이런 동정을 받다니. 정말 내가 바닥을 치는 게 진짜 같군.”
“오해한 거 같은데 지금의 내 잔은 축하주야. 네가 조금 전에 한 제안 받아들이지.”
렉스는 깔끔하게 잔을 털었다.
식도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짜릿함은 기쁨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방금 서전트가 제안한 것은 그에게 제법 큰 이익이 될 것이라 여겨졌다.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이 압박을 넣은 것도 아니기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내용은 사실 간단했다.
성우의 몸값을 2배로 올려준다.
그것이 서전트가 렉스에게 한 제안이었다. 대충 계산했을 때 최소 200~300만 달러(21~32억)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물론 더 높아질 가능성도 매우 컸다. 지금 촬영 중인 마벨 스튜디오의 영화가 개봉하면 성우의 몸값은 확 올라갈 것이다. 잘하면 1,000만 달러(107억) 이상이 될 가능성도 컸다.
물론 걸림돌이 있기는 했다.
제작사에서 거절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럴 경우에 부족한 금액 일부는 서전트가 책임지기로 했다. 그에게는 지금 돈보다 명예 회복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돈은 사실 충분했다.
서전트는 2년 전에 개봉한 영화에서 충분히 벌었다.
뮤지컬 영화로 따지면 그때의 그 영화는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제작비가 3천만 달러였는데 4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옵션 계약 덕분에 그는 이른바 돈벼락을 맞았다.
지금 그의 자산은 무려 700억이 넘어가고 있었다. 렉스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그 연기는 발코니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후으~ 역시 시가는 쿠바산이야. 자네도 한 대 줄까?”
“나는 위스키면 충분해.”
“그래서 이 글은 누구한테 맡길 거야?”
“요즘 눈여겨보는 작가 한 명이 있어.”
“누군데?”
“그런 사람이 있어.”
서전트는 렉스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아직 그 작가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 작품에 가장 적합한 작가라 믿고 있었다. 사실 예전 작품처럼 자신이 직접 마무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느끼는 그 심정의 디테일은 자신이 잡아낼 수 없었다.
렉스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저 시가를 물고 도시 너머를 바라봤다.
그의 입장에서는 누가 쓰든 결과만 잘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확실히 자신 있는 거야?”
“내가 언제 음악 영화로 실패한 적이 있어?”
“그렇기는 하지.”
“아마 이번에도 잘 될 거야.”
서전트는 그러기를 바랐다.
한편으로 자신감이 있기도 했다.
두 번이나 연속으로 제작비의 10배 이상의 수익을 낸 그였다. 음악으로 그려내는 영화는 확실히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였다.
“이번 영화의 성공을 위하여.”
“위하여.”
두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유리잔의 잔잔한 울림은 서전트의 심장까지 전해졌다. 벌써 새로운 작품을 만들 생각에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는 순간이었다.
* * *
‘아크로’의 촬영 현장
촬영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그들이 바라던 장면은 손쉽게 나왔다.
모두가 성우의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덕분이었다. 그의 몸놀림은 한국을 넘어 할리우드까지 집어삼키기 충분한 잠재력이 있었다. 더구나 이제 물이 오른 연기력도 한 몫을 더했다.
“미쳤어. 저게 가능해?”
카메라 감독 아서 슈와츠.
특히 그의 감동은 무척 대단했다.
지금까지 마벨에서 수많은 영화를 찍은 베테랑이 그였다. 하지만 이번 영화만큼 기대되었던 적은 없었다. 기존의 영화들이 CG로 만들어진 영웅이라면 아크로는 궤를 달리했다.
그 예가 바로 앞에 보였다.
물구나무를 서서 한 손으로 푸쉬업을 하는 것.
그게 정말 가능할 것이란 생각은 단 한 번도 못 해본 그였다. 하지만 화면 안의 이 젊은 아시아 청년은 손쉽게 그걸 해냈다. 아크로라는 캐릭터와 그의 싱크로률은 정말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영웅 아크로.
이 영웅의 특징은 아크로바틱하다는 것이었다.
마벨 스튜디오에는 아크로와 비슷한 캐릭터는 제법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 감독을 맡은 라이언 보스만 감독의 의지는 확고했다. 바로 지금까지의 어떤 영웅보다 스타일리쉬한 액션을 제1의 과제로 꼽고 있었다. 덕분에 카메라 감독인 아서의 일은 무척 많아졌다.
“오케이! 환상적이었어.”
보스만 감독의 사인이 나간 이후.
성우는 물구나무 자세를 풀고 일어났다.
머리로 잔뜩 쏠렸던 피가 전신에 퍼져나가는 느낌이 찌릿했다. 사실 이 장면을 위해 성우가 들인 노력은 엄청났다. 오죽하면 오른쪽 팔의 두께가 왼쪽과 사뭇 차이가 날 정도였다. 그래도 촬영이 잘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수고하셨어요.”
“고마워.”
요한이 수건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 가볍게 땀을 닦아냈다.
이걸로 오늘 촬영은 끝이 났다. 확실히 한국에서 촬영하던 것을 떠올리면 차이가 있었다.
뭔가 프로페셔널하달까?
시간에 쫓기며 촬영하는 것은 똑같기는 했다.
초과 시간이 나올 때마다 비용이 더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더 심했다. 하지만 벼랑 끝에서 촬영하는 기분은 아니었다.
스태프의 얼굴부터 달랐다.
모두 자신의 일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다.
감독과 스태프의 대우에 대한 격차는 있기만 철저한 갑과 을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자신의 맡은 일에 있어서는 철저했다. 톱니바퀴처럼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현장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성우는 수건을 다시 건네며 요한에게 물었다.
“오늘 스케줄은 이걸로 끝이지?”
“아뇨. 1시간 후에 집 보러 가기로 예약되어 있는데요.”
“오늘도?”
“호텔에서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꼭 가야 하나?”
성우는 쉬고 싶었다.
하지만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최정이 힘들게 고르고 고른 후보였다.
이제 와서 약속을 캔슬하기는 어려웠다. 가능하면 대신 골라주고 싶었지만, 금액이 한두 푼짜리가 아니라 그것도 어려웠다. 적어도 부동산만큼은 성우가 직접 봐야 했다.
“알겠어. 샤워 좀 하고 나올게.”
성우는 땀부터 씻어내고 싶었다.
확실히 여름이기에 알게 모르게 땀이 흘렀다.
마음 같아서는 호텔로 바로 가서 씻고 싶었지만, 집을 보러 다니려면 또 한참 걸리니 일단 씻기로 했다.
30분 후.
성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그것을 보고 요한은 차 너머에서 차키를 던져 주었다. 그것을 받아 바로 시동을 걸자 서둘러 요한이 탔다.
“직접 운전하시게요?”
“새삼스레 뭘 물어봐. 요즘 거의 내가 운전 다 했구만.”
“피곤해 보이니까 그렇죠. 그냥 제가 할게요.”
“그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아. 이따가 호텔로 돌아갈 때는 네가 해.”
그의 그런 말에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은 매니저의 일이라 여기는 그였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근 성우는 운전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라는 것을 알기에 요한은 그냥 놔두기로 했다.
부아앙.
웅장한 엔진음과 함께 차는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오늘은 촬영이 제법 빨리 끝난 덕분에 아직 해는 머리 위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에어컨을 틀어도 차창 너머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따가웠다.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 성우는 라디오를 틀었다.
“요한아. 뭔가 신나는 채널 좀 찾아주라.”
그 말에 요한은 다이얼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그런 채널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래퍼처럼 속사포로 주절거리는 그런 시끄러운 방송이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괜찮은 채널이 나오자 성우는 손짓했다.
“여기 괜찮네.”
“소리는 좀 더 키울까요?”
“아냐 이 정도가 좋아.”
“졸리면 제가 운전할게요.”
“여기서 어떻게 차를 멈춰. 이미 고속도로잖아.”
성우는 길게 나오는 하품을 겨우 참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요한이 말한 대로 운전을 맡겼을 텐데 이미 때는 늦었다. 적어도 고속도로를 벗어나야 했다. 그러려면 요 며칠 경험을 봤을 때 적어도 20분 이상은 걸릴 것이다. 그 정도는 참을만 했다.
얼마 후.
졸음이란 전염병은 순식간에 퍼졌다.
요한마저 눈을 끔벅이며 필사적으로 잠을 참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성우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며칠동안 이른 새벽부터 촬영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성우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앞에서 잘 가던 차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그 차는 성우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야! 브레이크!!!’
두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성우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면할 수 있었다. 그의 민첩한 대처와 뛰어난 차의 성능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뒤의 차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았다. 갑자기 뒤에서 느껴지는 충돌에 성우는 앞으로 고개를 처박고 말았다.
쿠우웅.
갑작스러운 충돌에 요한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는 성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에요?”
“사고 났어.”
“헉! 저희가 낸 거예요?”
“그런 거는 아냐.”
성우는 기어를 주차로 바꿨다.
그리고 백미러로 뒤차를 바라봤다.
선팅이 제법 강해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머리카락이 제법 긴 것이 여자로 보였다.
“너는 그냥 안에 있어.”
“네? 제가 가서 처리할게요.”
“내가 운전했는데 왜 네가 가?”
성우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뒤차로 향해 걸어갔다.
2차 사고가 걱정되었지만, 정체 구간의 시작이라 다행이었다. 두 차가 멈춰 있자 주변의 차는 클랙슨을 요란하게 울리며 저속으로 그들을 지나쳐 갔다.
-아오! 또 객사하는지 알았네. 운전 똑바로 안 해?
‘내가 조는 거 같으면 바로 깨워야지! 졸음운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누가 앞차가 갑자기 브레이크 밟을지 알았나?
성우는 한숨만 나왔다.
어느덧 차에 도착한 그는 운전석의 창문을 손으로 노크했다. 그러자 서서히 창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
“안녕하세요. 혹시 저 기억나시나요?”
“물론이죠.”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차 안에 타고 있는 이는 성우와 안면이 있었다.
바로 공항에서 성우와 짐이 바뀌었던 줄리아 오먼드였다. 그녀는 멍하니 서 있는 성우를 보고 말했다.
“여기는 위험하니 일단 차부터 뺄까요?”
“그러시죠.”
“여기 제 전화번호에요. 전에 드린 명함은 버린 거 같으니 다시 드릴게요.”
“하하... 그게 말이죠.”
“다음 고속도로 출구로 나가서 다시 이야기하죠.”
성우는 그녀의 명함을 받았다.
과거에 받았던 명함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받아서 성우는 차로 돌아왔다. 다시 차에 타는 그를 보고 요한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니야. 일단 차부터 빼자.”
“사고 처리는 어쩌고요?”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기로 했어.”
그렇게 말하며 성우는 기어를 바꿨다.
그러자 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뒤에서 줄리아의 차가 따라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의 차는 제법 상태가 좋지 않았다. 범퍼는 거의 반파되어 안 떨어져 나간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그렇게 고속도로를 빠져나간 이후.
성우가 차를 세우자 줄리아의 차도 바로 뒤에 멈췄다. 그리고 그녀가 차에서 내려 그에게 도도하게 걸어왔다.
“이렇게 또 만나게 되네요?”
< 광끼 -10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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