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재능의 탑스타-107화 (108/161)

< 광끼 -107 >

수많은 카메라 사이.

성우는 연기를 이어갔다.

벌써 오늘은 크랭크인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할리우드에 있는 모든 아시아계 배우가 모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한국 국적을 가진 배우는 그와 우현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재미교포와 중국, 일본계 배우들이었다.

-한국인인 척하는 일본 놈들 웃기네.

‘연기하는 거잖아.’

-그리고 왜 한국어 대사는 하나도 없어?

‘프로 불편러 같으니!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서.’

물론 성우도 조금의 불만이 있었다.

한국의 배경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예 로케이션조차 잡혀있지 않았다. 애초에 원작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가 재미교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촬영장에서 한국어는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다가왔다.

그 장면은 악당에 의해 지구 인구의 반이 몰살당할 무렵. 영화상의 부모님이 살해당하는 장면이었다. 영웅 ‘아크로’가 태어날 수밖에 없던 당위성을 주는 장면이기에 무척 중요했다.

그 장면은 우현 역시 출연했다.

둘은 난생 처음 보는 두 남녀를 놓고 오열해야 했다. 우현의 연기는 생각보다 좋았다. 손쉽게 감독의 컷을 받아냈지만, 녀석은 아직 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흐윽···”

“촬영도 끝났는데 그만 그치지?”

“후우~ 그러고 싶은데 이게 안 멈춰요.”

“요한아 가서 얼음팩 좀 구해와라. 오후에도 촬영해야 하는데 얼굴이 퉁퉁 불겠다.”

“알겠어요.”

요한이 나간 이후.

성우는 한동안 우현 곁에 있었다.

나름 비중 있는 캐릭터라 우현에게도 트레일러가 배정되었다. 성우가 받은 주연급 트레일러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휴식을 취하기에는 부족함은 없어 보였다.

어느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우현의 눈물도 끝이 났다.

그래도 창피한 것을 아는지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성우는 말을 붙였다.

“힘드냐?”

“당연하죠. 저는 아직 초짜잖아요.”

“나도 지난번에 여기 촬영 와서 너랑 똑같았어.”

“형도요?”

“촬영 환경이 국내에서 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거든.”

성우는 첫 촬영 경험을 이야기를 해줬다.

그리고 킬리안과 대련을 했던 것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현은 그제야 웃음을 보였다. 아마 킬리안을 잘 알고 있기에 눈에 선하게 그 상황이 그려졌을 것이다.

“역시 킬리안은 대책이 없네요.”

“덕분에 나도 스트레스 풀고 좋았지.”

“며칠 전에 킬리안 만나셨다면서요. 지금 붙으면 제가 이길까요?”

“글쎄 내가 봤을 때는 아직 멀었어. 킬리안이 이길 거야.”

“제길···”

“어서 점심 식사하러 가시죠.”

요한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말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른 아침부터 이어진 촬영에 허기짐이 밀려왔다. 그래도 오늘은 촬영 초반이라 그런지 힘든 일정은 아니었다.

셋이 준비해 놓은 식사를 하러 갈 무렵.

요한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성우는 그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하지만 요한은 좀처럼 그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도대체 뭔데 그래? 궁금하게 말이야.”

“그게···”

“빨리 말 안 해?”

“사실 촬영하는 중에 누가 찾아왔어요.”

“누군데?”

요한은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메고 있던 크로스백에서 뭔가 꺼냈다. 그가 꺼낸 물건은 하얀 종이 뭉텅이였다. 성우는 그걸 받아서 표지를 읽었다. 제목은 딱히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하단에 데미안 서전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전트 감독님?”

“맞아요. 이거 한 번 읽어달라고 하던데요.”

“이걸 왜 나한테 줘?”

“그거는 저도 모르죠. 맨 뒷장에 연락처 있으니 읽고 연락을 달라고 했어요.”

성우는 알겠다며 답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읽을 수는 없었다.

촬영 현장에서 다른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는 것은 조금 애매했다. 당장 읽고 싶지만, 그것을 다시 요한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저녁에 다시 달라고 말했다. 그것을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우현은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성우에게 물어보았다.

“서전트 감독이요?”

“며칠 전에 파티에서 만났어.”

“와~ 대박!”

“너도 그분이 누군지 알아?”

“물론이죠. 나중에 만날 때 저도 데리고 가줘요.”

“봐서.”

성우의 말에 우현은 풀이 죽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왔을 거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지났고 후회해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성우는 그런 우현을 보고 고개 돌려 웃었다.

녀석은 이제 거의 성우의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매니저인 요한이나 동활 제약에 다니고 있는 형권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 위례검을 익히고 있는 동질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귀여운 녀석.’

*

촬영을 마친 이후.

성우는 곧바로 호텔로 향했다.

이곳에서 머문 지 벌써 열흘이 되고 있었다.

처음에 다 함께 쓰던 방은 너무 비싸 방까지 옮겼다. 궁상맞아 보일지 몰라도 스위트룸의 가격이 우습게 볼 정도는 아니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래요?”

“나가서 먹어야지 뭘 물어봐.”

“그럼 7시에 내려올까요?”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두 개로 잡아서 사용 중이었다.

하나는 최정과 요한이 쓰고 하나는 그와 우현이 쓰는 중이었다. 성우는 슬슬 호텔에 질려가고 있었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물론 집을 아예 알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틈틈이 몇 곳을 다니며 집을 알아봤다.

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은 없었다.

마음에 들더라도 잡아 놓은 예산보다 너무 비싸서 문제였다. 덕분에 그들 일행 가운데 최정이 요즘에 하는 일은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이었다. 촬영 중인 성우와 우현 그리고 그 뒷 일을 봐주는 요한은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후.

넷은 각각 둘씩 찢어져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우현이 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던 성우는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성우는 고개를 돌려 요한을 찾았다. 녀석은 마침 문을 닫으려다 고개를 쏙 내밀며 말했다.

“왜요?”

“아까 서전트 감독님이 주고 간 시나리오 줘야지.”

“아차 제가 까먹었네요.”

요한은 시나리오를 꺼내 건넸다.

손에 쥔 그것은 생각보다 무척 얇았다. 보통 100~150페이지 정도 되는 것이 보통인데 50페이지도 되지 않아 보였다. 아마 초안으로 일부만 작성한 것이 아닐까 의심되었다.

성우는 그것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유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왔다. 녀석은 성우의 발목에 몸을 비비고 그릉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난리를 떨었다. 그런 녀석을 품에 안으며 성우는 등을 쓰다듬었다.

“으이구~ 심심했어?”

“냐아옹.”

“우현아. 오늘은 너 먼저 씻어라.”

“왜요?”

“씻기 전에 이것 좀 보게.”

성우는 시나리오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우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씻을 준비를 했다. 보통 씻는 것은 녀석보다 성우가 먼저 했다. 그 이유는 씻는 시간의 차이 때문이었다. 우현은 한 번 들어가면 거의 30분은 걸린다. 남자치고 씻는 시간이 무척 긴 편이었다.

유부와 함께 소파 위로 간 이후.

성우는 시나리오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는 유부를 쓰다듬으며 그 내용에 빠져들었다. 단시간에 써 내려간 것치고 그 내용은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아직은 스토리의 골격밖에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과연 어떤 영화가 나올지 기대되었다.

이민자 2세대.

미국과 한국의 중간에 걸려있는 정체성.

음악가로서 주류가 되길 바라지만, 알게 모르게 드리워진 인종 차별의 유리천장.

이 글에서 주인공은 미래가 없었다.

성우의 실제 삶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묘하게 그 주인공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마치 옆에서 서전트가 너를 위해 쓴 거라며 속삭이는 것 같았다. 성우는 점차 그 글 속의 주인공이 자신처럼 여겨졌다.

성우는 두부의 의견을 묻기로 했다.

매일 영화나 드라마에 빠져있는 묘한 취미의 무사귀가 바로 녀석이었다. 덕분에 보지도 않는 TV는 언제나 켜져 있었다. 이제 그 짓도 몇 년 동안 이어지니 어느 정도 보는 눈이 있다고 여겼다.

‘두부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봤을 때는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아.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이제 막 촬영을 시작했는데 난감하네.’

그게 걱정이었다.

마벨 스튜디오의 촬영은 이제 시작이었다.

앞으로 최소 4개월 정도는 여기에 매진해야 했다. 한마디로 다른 영화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한참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결국, 뒷장에 적힌 서전트의 번호로 전화를 걸고 말았다.

-여보세요?

“저 유성우입니다. 시나리오 잘 읽었어요.”

-오! 생각보다 무척 빨리 연락을 줬네요. 저는 적어도 며칠 걸릴 줄 알았어요.

“방금 읽어 봤어요.”

성우는 자신의 느낌을 솔직히 말했다.

기대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성우의 말에 무척이나 기뻐하는 느낌이었다. 조만간에 개봉하는 영화가 있었지만, 그건 이미 포기한 눈치였다. 하지만 자신마저 ‘아크로’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제 막 촬영을 시작해서 확답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이 바닥을 너무 물렁하게 보는군요.

“네?”

-좋은 의미로는 시간적인 여유가 많다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이번에는 투자받기가 조금 어려워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아하···”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아직 제작되냐 마냐를 걱정할 시기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시나리오마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서전트 감독은 자신이 전문적인 작가가 아니기에 별도의 작업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적어도 내일 당장 촬영이 가능한 컨디션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꼭 하고 싶어요. 일단 에이전시하고 말해 볼게요.”

-계약한 에이전시가 어디죠?

“얼마 전에 ACA의 렉스와 계약했어요.”

-아~ ACA! 그건 좋은 소식이네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의미인지 유추해봤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때마침 우현이 씻고 나왔기에 성우는 씻으러 들어갔다. 화장실의 문을 열자 스팀이 확 밀려 나왔다.

“안 덥냐? 이 더운 날에 뜨거운 물로 샤워하게.”

“피로 회복에는 이게 딱 좋죠. 욕조에 물 받아 놨으니 몸 좀 담그세요.”

“고마워.”

성우는 옷을 하나씩 벗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유부가 다가와 어슬렁거렸다. 그때 성우는 녀석을 씻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는 안 씻겨도 된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냄새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잡았다. 너는 오늘 형이랑 샤워하자.”

“캬아옹.”

“어딜 도망가려고.”

성우는 샤워기를 틀었다.

그리고 펫용 샴푸를 집어 들었다.

엄청 오랜만에 씻는 거라 아무리 비벼도 거품이 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며 성우는 데리고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샤워가 끝나면 한동안 유부가 삐져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속전속결.

성우는 최대한 빨리 유부를 씻겼다.

그리고 헤어드라이기로 말린 이후에야 녀석을 놔줬다. 유부는 화장실의 문을 열자마자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그리고 멀리 구석에 자리 잡고 자신을 노려봤다.

“째려보면 뭐 어쩔 건데?”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성우는 우현이 받아 놓은 욕조 속에 들어갔다. 긴 촬영 때문에 쌓인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성우는 벌써 새로운 시나리오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 속의 주인공은 기타 하나를 들고 버스킹을 다니다 성공하게 된다. 과연 현실 속에도 그런 일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쿵··· 사사삭.

욕실 문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마 유부가 조금 전의 일에 대해 복수를 하는 것 같았다. 연달아 나는 소리에 성우는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나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내 우현에게 사로잡혔는지 앙칼지게 울었기 때문이었다.

“캬아옹!”

*

ACA의 사무실.

거대한 통유리로 너머로 보이는 풍경.

렉스는 그 풍경을 너무나 좋아했다. 특히 해가 저물 시간에 보이는 일몰과 야경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거는 나한테 먼저 보여줘야 하는 거 아냐?”

“미안해. 벌써 몇 번이나 사과했잖아.”

“이번 한 번은 참을게. 그래서 이 만들다 만 시나리오를 오케이했다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찾아왔지.”

렉스는 골치가 아팠다.

성우와 계약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이런 사고를 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계획에 서전트 감독이 조금 전에 건넨 시나리오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5년이라는 계약 기간 동안 돈이 될 그런 영화를 해야 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이거 투자자 모을 수 있겠어?”

“글쎄 그건 상황을 봐야지.”

“나는 부정적인 의견이 더 강해. 괜히 추진하다 나자빠지면 어쩌려고 배우에게 강요하지?”

“유성우가 하겠다는 의사만 확정해주면 가능할 거 같은데.”

“이 친구를 투자의 미끼로 쓸 건가?”

“그럴 리가. 정말 이 친구 때문에 영감을 받은 시나리오야.”

“진심이야?”

서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모습을 본 렉스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야경이 빛나는 LA 시내를 바라봤다. 그가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들인 노력은 적지 않았다. 한 치만 어긋나도 밑바닥까지 추락할 위기도 적지 않았다.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직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박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어느 누가 동양인 청년의 버스킹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까? 손익분기점을 넘겨 제작비만 다 뽑아도 다행이라 여겼다. 특히 이번에 쓴 물을 마실 거라 예상되는 서전트였다. 차기작에 대해 투자자의 반응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서전트의 생각은 그와는 크게 달랐다.

영화만 좋다면 인종이 문제가 될 거라 여기지 않았다. 아니 성우이기에 찍을 수 있는 영화였다. 그만큼 그의 연주 실력은 뛰어났다. 어설픈 가수나 배우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 성우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이전트인 렉스라는 벽을 넘어서야 했다. 그는 한동안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그럼 이렇게 하지.”

< 광끼 -107 > 끝

ⓒ l살별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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