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06 >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에스컬레이드.
입구에서 차를 멈춘 성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파티에 사람이 꽤 왔는지 입구 주변에 주차된 차가 적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도대체 어디에 주차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발레 파킹을 해주는 이가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잘 좀 부탁할게요.”
성우는 팁과 차키를 주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이 혼자였다. 요한과 최정은 같이 동행하지 않았다. 물론 같이 갈 거냐 의사를 물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둘 다 쉬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덕분에 그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직접 차를 몰게 되었다.
-작년에 운전면허를 딴 보람이 있네.
‘네가 하도 뭐라고 하니 딴 거지.’
-그래서 후회하는 거야?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운전면허를 딴 것을 후회할 리는 없었다.
오히려 더 빨리 딸 걸 그랬다며 아쉬워했다. 생각보다 운전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초보라 부담감이 아직 조금 있지만, 커다란 사고가 아닌 사소한 접촉 사고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돈이 참 좋기는 했다.
하지만 이 주택에 주차된 차들.
그것을 보니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정확한 차의 가격은 모르지만, 매끈한 차의 외모만 봐도 적어도 2~3억은 넘을 것 같은 스포츠카가 즐비했다. 역시 할리우드는 할리우드였다. 그때 누군가 성우에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킬리안이 보였다.
“왔냐?”
“5개월 만에 보는데 반가운 척 좀 해라.”
“바쁜 거는 다 끝났어?”
“물론이지. 우리 조만간에 또 대련해야지.”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참 용기가 대단해.”
“나 그동안 꽤 많이 늘었어. 물론 너에게는 이기는 것은 기대도 안 하지만 말이야.”
킬리안은 성우와의 격차를 인정했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그 차이를 줄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성우를 기준으로 놓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가 한국에서 흘린 노력과 땀의 결과는 분명 있었다. 그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홍문석 무술 감독을 뛰어넘어 위례검의 2인자가 되었다.
“우현은 같이 안 왔어?”
“그 녀석은 내일 와.”
“그렇구나 이번에 같이 보면 좋았을 텐데.”
“과연 녀석도 그렇게 생각할까?”
성우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현은 킬리안을 무척 어렵게 여겼다.
킬리안이 성우에게 매번 깨지자 그 분풀이 대상은 우현이 되었다. 일단 자기보다 어리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대등하게 대련이 가능한 존재이기도 했다. 우현은 7번째 사범이지만, 그 실력만큼은 킬리안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뭘.”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오케이. 오늘은 맘껏 마시고 즐기는 거야. 촬영 들어가면 이런 파티도 끝이니까.”
“물론이지.”
성우는 오늘을 즐기려 했다.
이제 정말 개인 시간도 거의 없었다.
당장 며칠이 지나면 스튜디오로 매일같이 출근해야 했다. 그래도 걱정되거나 그런 것은 없었다. 과거 첫 크로마키 배경에서 촬영했을 때의 미숙함은 이제 찾을 수 없었다. 지난 1년 동안 가장 최우선으로 삼은 숙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었다.
잠시 출연했던 과거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CG가 그려지는 허공에 연기하는 것은 무사귀였던 해솔에게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온갖 노력 끝에 이제는 어색하지 않게 연기를 할 수 있었다.
그때 성우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성우는 그 남자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성우가 만나기 바랐던 데미안 서전트 감독이었다. 사진에서 봤던 것처럼 그는 수수한 차림에 검은 곱슬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킬리안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성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쪽은?”
“저번에 유니버스 시리즈에 나온 ‘아크로’ 못 봤어? 아차! 그때는 복면을 쓰고 있었지.”
“아! 누군지 알겠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유성우라고 합니다.”
성우가 내민 손을 그는 마주 잡았다.
그는 파티를 즐기라며 말한 이후에 다른 방문자를 맞이하러 움직였다. 한동안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킬리안이 그의 등을 떠밀며 집안으로 이끌었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내가 엄청 좋아하던 감독이거든.”
“이번에 새로운 작품 하나 끝냈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데 반응이 썩 좋지 않아.”
킬리안이 소리 낮춰 이야기했다.
이번 영화가 첫 실패작이라 될 거란 혹평이 많다고 그가 설명했다. 성우도 그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번에는 음악이 위주가 아니었다. 사실 서전트 감독의 대표적인 작품은 모두 악기와 음악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이번에 새로운 도전을 했고 무참히 깨지고 있었다.
“안타깝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스트레스가 엄청 많은가 봐.”
“그렇구나. 너는 뭘 마실래?”
“시작은 역시 맥주!”
성우는 한동안 킬리안과 술잔을 마주했다.
그런 둘에게 상당히 많은 사람이 접근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성우가 아닌 킬리안과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였다. 특히 몸매가 아주 끝내주는 여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말만 해. 내가 누구든지 연결해줄게.”
“됐어.”
“왜 운명의 상대가 필요해?”
“그런 거는 아니야. 그저 그럴 여유가 없을 뿐이지.”
그 말에 킬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이미 6개월 동안 성우의 옆집에 살았던 그였다. 길다면 긴 그 기간 동안 성우는 그 어떤 여자도 만나지 않았다. 마치 그의 인생은 무미건조한 수도승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삶이었다. 킬리안으로서는 그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젊음이 흘러간 뒤에야 후회하지.”
“그럴지도 모르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즐겨.”
“내가 알아서 할게.”
성우의 말에 킬리안은 더는 권하지 않았다.
대신 녀석은 한 여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금세 자리를 비웠다. 당연히 성우는 그런 그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를 잘 알기에 파티 내내 자신의 곁에 있을 거란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대신 서전트의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직 호텔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의 관심은 집에 쏠려 있었다.
그때였다.
요란한 클럽 음악의 소리가 낮춰졌다.
그와 동시에 집안에서 누군가 드럼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치는 것은 아닌 듯 피아노 소리도 어우러져 있었다. 성우는 그 소리에 홀린 듯 저택의 안으로 향했다. 그곳에 들어서자 드럼을 연주하고 있는 서전트 감독이 보였다. 그의 실력은 거의 준프로 수준에 가까웠다.
-실력이 둘 다 제법인데.
‘막귀인 네가 듣기에도 그런가 보네.’
-못 들은 거로 할게. 재미있을 거 같은데 너도 저기 한 번 끼어서 해 봐.
‘에이 갑자기 끼어드는 건 조금 그렇지.’
하지만 킬리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그는 모델로 추정되는 한 여자와 같이 다가왔다. 그 짧은 사이에 오늘 함께 할 파트너를 찾은 것 같았다. 그는 다가오더니 등을 슬쩍 떠밀었다. 어서 나가서 연주하라는 의미였다.
“왜 갑자기 밀고 그래?”
“오랜만에 기타 실력이나 보자. 그사이에 녹슨 건 아니지?”
“글쎄 한동안 안 치기는 했는데.”
“저기 서전트도 어서 오라고 하잖아.”
성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정말 서전트가 한 손을 들고 손짓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파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환호했다. 악기를 다룰 수 있다면 어서 합류하라는 뜻이었다. 재즈는 여러 사람이 모일수록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성우는 마지못해 기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살짝 푼 이후에 바로 잼에 참여했다.
드럼과 피아노 그리고 기타.
그 셋이 연주하는 음률은 귀에 익숙한 것이었다.
성우가 이 자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바로 그들이 연주하는 것은 사라 본이 부른 였다. 워낙 유명한 곡이라 성우도 손쉽게 멜로디를 따라갈 수 있었다.
연주자는 말이 없었다.
세 명은 서로 눈빛만으로 호흡을 맞췄다.
누군가 박을 밀고 당겨도 물이 흐르듯 맞춰졌다. 그래서인지 성우를 포함해 세 명 모두 즐거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Don’t ever make me cry. Through long lonely nights without love~”
성우와 서전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킬리안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노래하고 있었다. 모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수 같았다. 그만큼 그녀의 노래 실력은 빼어났다. 원곡인 사라 본이 부른 노래보다 청량한 목소리였지만, 그것 나름대로 또 매력이 있었다.
한 곡이 끝난 이후.
그들은 연달아 다른 곡을 연주했다.
대부분 유명한 스탠더드 넘버에 속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무르익자 지켜보던 이들이 어느 곡 하나를 요청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예전에 서전트가 만든 영화의 O.S.T였다.
서전트는 알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 신호에 맞춰 피아노 앞에 앉은 이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영화의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그린피스 공원의 가로등 아래에서 두 주인공이 노래 부르며 춤을 추던 그 풍경. 그것은 매직아워의 보라색 하늘과 별빛 아래 수놓아진 명장면이었다.
“City of starts~ Are you shining just for me.”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노래했다.
마치 이 노래가 자신의 것처럼 여겨졌다.
그의 첫 소절을 듣자 주변에서 물끄러미 보던 이들 모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감미로웠던 탓이었다. 남자가 부르는 구절이 끝나자 아까 사라 본의 노래를 불렀던 그 여자가 받아 불렀다.
“That now~ Our dreams~”
둘의 조합은 제법 잘 맞았다.
처음 맞춰보는 노래지만, 그래도 화음은 제대로 되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서전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그것은 피아노를 치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 남자의 정체는 서전트 감독의 베스트 프렌즈이자 그들이 지금 노래하고 있는 O.S.T를 만든 음악 감독이었다.
노래는 짧고 굵었다.
이후에 다른 연주곡이 나오자 바이올린을 들고나온 사람부터 트럼펫까지도 등장했다. 다들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 듯한 느낌이었다. 전에 킬리안에서 봤던 파티와 다르게 이곳은 작은 미니 콘서트 같았다. 성우는 그런 그들 사이에서 유난히 빛났다. 특히 신들린 듯 치는 그의 손놀림은 어지간한 기타리스트보다 뛰어났다.
1시간 정도 흘렀을까?
마침내 마지막 곡까지 한 이후.
많은 사람의 환호속에서 성우는 기타를 놓았다.
모처럼 쳤던 기타 덕분에 손끝이 얼얼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 촬영을 앞두고 은근히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싹 날아간 것 같았다. 두부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무척 들뜬 목소리로 난리였다.
-오~ 좋아. 모처럼 제대로 된 음악을 들은 것 같아.
하지만 녀석과 이야기 나눌 틈은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정체 모를 동양인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곧 성우가 마벨 스튜디오의 차기작을 찍는 배우라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다들 어느 밴드에 소속된 기타리스트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놀란 것은 서전트 감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배우로 소개받았는데 음악을 해도 무방할 수준의 연주를 선보여준 성우였다. 그는 피아노를 치던 남자와 함께 다가와 악수를 나눴다.
“이쪽은 음악 감독 짐 하트.”
“반갑습니다. 영화에서 나온 노래 정말 좋았어요.”
“저는 오늘 연주한 버전이 더 좋던데요. 더 예전에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그럴 리가요.”
“우리 나중에 꼭 한 번 더 모여서 같이 연주해요.”
“얘 얼마 후부터 촬영 들어가서 바빠요.”
킬리안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주제는 성우의 촬영으로 바뀌었다. 한참 이야기하던 와중에 서전트 감독은 점차 말이 없어졌다. 그런 그가 내내 의식되었지만, 성우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는 어디론가 다급하게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궁금했지만, 짐 하트가 웃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괜찮을까요?”
“뭔가 영감이 떠오른 것 같으니 이럴 때는 그냥 놔둬요.”
“영감이요?”
성우의 질문에 짐은 그저 웃었다.
그리고 그가 이 자리에서 받은 영감이 뭔지 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 광끼 -10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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