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05 >
알렉산더 카메론.
그는 할리우드 최고의 에이전트 가운데 하나이다.
아니 에이전시 ACA(Alexander Cameron Agency). 그곳을 이끄는 수장이라 말하는 게 더 정확했다. ACA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형 에이전시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런 에이전시의 약진에 어느 에이전트 파트너보다 대표인 알렉산더 카메론의 역할은 지대했다.
케이트 나이트리, 조니 데프 등.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스타들이 그와 계약했다. 그들이 알렉산더 카메론과 계약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ACA에 소속된 아티스트들은 하나 같이 최근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더의 지휘하에 변호사, 회계사, 홍보담당자 등 여러 파트 담당자가 팀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탓이었다. 오죽하면 그의 또 다른 별명이 ‘미다스의 손’이었다.
그런 그의 관심은 최근 성우에게 꽂혀 있었다.
동양에서 온 이 남자를 잡는 것이 최근 그의 가장 큰 목표였다. 그것이 동양인 최초로 마벨 스튜디오의 단독 작품을 따낸 이유만은 아니었다. 과거 성우가 출연한 영상을 모두 구해본 그였다. 성우의 잠재력은 어느 스타보다 뛰어났다. 그랬기에 알렉산더는 이 자리에 나오며 한 가지를 다짐했다. 그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계약을 성사시킬 생각이었다.
“편하게 렉스(Lex)라 불러주세요.”
“그렇게 하죠.”
“바로 계약 이야기를 하도록 할까요?”
“숨부터 좀 돌리고 이야기하지. 뭐가 그리 바빠?”
렉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서 묻냐는 뉘앙스가 담긴 몸짓이었다.
그는 여유 있는 몸짓으로 넥타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뭔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동작 하나하나에서 묻어 나왔다.
“지금 이쪽 바닥에서 성우 씨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거 모르세요?”
“소문이야 언제나 무성하지.”
“글쎄요. 이런 말을 해봤자 제 손해일 수 있겠지만, 난리도 아니에요.”
“그런 거에 비해 무척 조용한데?”
스티브의 말이 맞았다.
성우는 렉스의 말이 실감 나지 않았다.
아직 그 어느 곳에서도 접촉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미국에 도착해서인지 그럴 거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향해 렉스가 말을 덧붙였다.
“사실 제가 침을 발라 놨다고 소문을 냈거든요. 어중간한 덩치의 에이전시는 시도도 안 할걸요.”
“그거는 일종의 협박인가?”
“그럴 리가요. 스티브도 이 바닥 잘 아시면서 뭘 그러세요. 어차피 계약할 의사가 있는 에이전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성사합니다.”
“그래서 조건은 어떻게 해줄 건데?”
스티브는 성우의 말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성우는 고마움을 느꼈다. 확실히 계약을 앞두고 그가 있다는 것 자체가 안심되었다. 그것은 성우나 요한 모두 이쪽 바닥의 대우가 어느 정도 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스티브가 있으니 적어도 손해 보는 그런 장사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5년 계약에 15%로 하시죠.”
“전담팀은?”
“물론 붙여드려야죠. 매니지먼트를 제외한 에이전시에서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겠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 그런데 10%로 낮추지.”
렉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보통 할리우드 에이전시는 10~20%이며 평균이 15%였다. 때론 10%까지 수수료를 낮추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그건 드문 경우에 속했다. 최소 연간 3~5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이 보장되어야 검토할 내용이었다. 성우는 그 기준에 확실히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그를 슬슬 구슬렸다.
“어차피 이 친구는 자네가 제시한 5년 동안 마벨 스튜디오와 계약한 작품을 하느라 바쁜 거는 알지?”
“물론이죠. 다들 그것 때문에 계약하려고 마음먹은 거죠.”
“솔직히 인정하니 좋군. 그럼 그동안 에이전시의 할 일은 뭔가? 그 사이에 작품을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
“많아야 1~2 작품이죠.”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되는 새로운 작품을 찾아주는 것이 에이전시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성우는 새로운 작품을 찾을 수고가 거의 없었다. 그런 논리를 가지고 주장하자 렉스는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제 제안도 한 번 들어주시죠.”
“말해봐.”
“15%에 계약하면 선물로 5년 동안 머물 숙소의 렌탈을 제가 해드리죠.”
“집을 알아봐 준다고?”
“제가 벨에어에 사놓은 집이 있거든요.”
“설마 얼마 되지도 않는 집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는 아니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최고급 주택 단지인 벨에어 지역이에요! 참고로 1,200만 달러를 주고 산 집입니다.”
스티브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가 성우를 슬쩍 바라보자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의 집을 렌탈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킬리안으로부터 대저택의 유지비가 어느 정도인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돈으로 차라리 기부해서 무주귀를 하나라도 더 몰아내고 싶었다.
“저 친구가 싫다고 하네.”
“나름 제 딴에는 신경 써준 겁니다.”
“그거는 나도 알지. 어쩔 셈인가? 선물 공세는 물 건너간 거 같은데 10%에 할 텐가?”
“하아... 어쩔 수 없죠. 스티브 덕분에 계약이 완전히 꼬였네요. 도대체 이 친구한테 얼마나 받으시는 거예요?”
“이거? 공짜로 해주는 거야.”
그 말에 렉스는 잠시 표정이 구겨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티브를 통해서 소개받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이탈리아,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한국인도 핏줄끼리 뭉치는 것은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차세대 스타를 계약한 기쁨이 앞섰다.
잠시 후 그는 수정된 계약서를 들고 온 비서에게 서류를 받았다. 스티브의 꼼꼼한 검토를 마친 이후에 성우는 그곳에 사인했다. 이로써 성우도 렉스가 이끄는 ACA의 일원이 된 것이었다. 그가 사인을 마치자 렉스는 잔을 들며 말했다.
“건배할까요?”
“건배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지. 대신 이 술은 내가 사겠네.”
“혹시 저 친구가 숨겨놓은 손자 뭐 이런 거는 아니죠?”
“그럴 리가 있나. 허허.”
사실 아쉽기는 했다.
만약 손녀가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성우를 손녀사위로 심각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슬하에는 시꺼먼 남자아이들만 그득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우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잔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다들 저마다 축하 인사를 남겼다.
“ACA와 함께하시는 것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둘 다 축하하네.”
*
에이전시와 계약을 마친 이후.
성우는 ‘아크로’ 촬영 전까지 휴식을 했다.
현지에 적응하기 위해 일정을 여유 있게 짜서 온 덕분이었다.
그 기간 동안 펑펑 노는 것은 아니었다.
성우는 몸을 만드는 마지막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계약서에 명시해 놓은 요건은 이미 충족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멋있게 나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한참 운동에 매진하던 그는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라 요한을 보며 물었다.
“우현이는 언제 온대?”
“내일 저녁에 도착한다고 하던데요.”
“그래?”
지난해 사범으로 오른 오우현.
그는 운이 좋게도 마벨 스튜디오의 캐스팅에 합격하었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도 분량은 적지만, 같이 출연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럼 마중 나갈 거야?”
“그래야죠. 걔 아직 영어 미숙자잖아요.”
“왜 지난번에 보니까 꽤 능숙하게 잘 하던데.”
“우리랑 대화할 때나 그렇죠. 막상 외국인 앞에서는 조금 얼던데요.”
“그거야 뭐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우현은 지난 1년 동안.
위례검과 영어를 배우느라 꽤 고생했다.
덕분에 도장에서 7번째 사범이 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영어가 좀처럼 늘지 않았다. 강 대표는 그런 그를 위해 필리핀으로 3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보내주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에게 영어 선생님까지 붙이는 등의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우현의 실력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냐아옹~”
유부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리고 식빵 자세를 취하며 물끄러미 성우를 바라봤다. 뚫어지라 바라보는 그 모습을 보니 뭔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성우는 녀석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심해?”
“저 일하는 거 안 보이세요?”
“너 말고 유부.”
요한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성우는 낚싯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유부의 앞에 앉아 열심히 녀석을 낚았다. 눈앞에 알짱대는 것이 보이자 녀석은 상체를 세워 고양이 펀치를 날렸다. 양손을 휘두르며 날리는 펀치는 제법 매서웠다.
“오케이! 좋아. 원투! 워언투!”
성우는 그런 유부가 좋았다.
어디 내놔도 맞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역시 자신과 함께 사는 고양이다운 모습이었다. 그런 둘의 놀이에 두부는 혀를 찼다.
-심심하면 나가서 스테이크나 먹자.
‘어제도 먹었잖아.’
-이상하게 고기가 땡기네.
‘맨날 고기만 먹으면 나는 언제 다이어트하냐?’
-언제는 원하는 거 말만 하라더니. 역시 남자는 믿을 게 못 돼.
성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유부는 폴짝 뛰어 성우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두부는 자지러지듯 소리쳤다.
-쟤 좀 어떻게 안 될까?
‘유부가 뭘 어쨌다고 난리야.’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저거 요물이라고! 근처만 다가와도 심장이 요동친단 말이야.
‘크크큭! 사랑에 빠진 거냐?’
성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게 다 엄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유부는 그런 성우의 손길을 만끽하며 배를 보여주며 몸을 비틀었다. 노란색의 등과 달리 뽀얀 하얀색의 뱃살은 요즘 제법 두툼해졌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냄새에 성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목욕할 때가 됐나?”
“캬아옹!”
목욕이란 말을 알아들었을까?
녀석은 앙칼지게 울더니 침실로 사라졌다. 그것을 보며 두부는 꼴 좋다며 웃어댔다. 때마침 울리는 벨 소리에 성우는 목욕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잊고 말았다.
“여보세요?”
-나야.
“킬리안? 오랜만이네.”
-내 구역에 왔으면 신고해야지. 연락도 안 줘?
“미안.”
킬리안의 말에 성우는 웃었다.
그는 한국에서 6개월 정도 머물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제아무리 킬리안이라도 매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오늘 서전트가 여는 파티가 있으니 꼭 놀러 와.
“나 촬영 얼마 안 남았잖아.”
-얼마 안 남았으니 더 즐겨야지.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는 게 할리우드의 원칙이야.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알겠다며 답을 하고 끊었다. 그런 그를 향해 요한이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킬리안이 파티에 놀러 오라고 하네.”
“누가 주최하는 건데요?”
“서전트? 그렇게 말한 거 같은데. 누군지 잘 모르겠어.”
“설마 그 사람은 아니겠죠?”
“왜?”
요한은 핸드폰을 꺼내 잠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내 뭔가를 찾아냈는지 성우에게 다가와 그것을 내밀었다. 액정에 띄워진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는 킬리안과 한 남자가 어깨동무하며 서 있었다.
“데미안 서전트 감독. 전에 킬리안의 스타그램에서 본 적이 있어요. 누군지는 아시죠?”
“당연하지. 내가 그 감독님의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럼 가셔야죠. 그 파티.”
성우는 요한의 말에 저절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킬리안이 말한 그 파티의 주최자가 데미안 서전트 감독이라면 오히려 부탁하고 싶었다. 그만큼 성우는 그의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4년 전에 개봉한 영화.
그 영상에서 주인공이 드럼을 폭발적인 손놀림으로 연주하는 그 장면은 아직도 선했다. 그것을 보고 드럼을 배워볼까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던 성우였다.
물론 그 고민은 쓸모없었다.
그 직후 무사귀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 성우는 확인차 킬리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괜히 나중에 실망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왜? 갑자기 못 온다고 하면 화낼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서 파티를 하는지 알려줘야지.”
-참 성격도 급해. 조금 있다가 문자로 보내려고 했지.
“누가 주최한다고?”
-데미안 서전트. 혹시 몰라?
성우는 소리죽여 환호했다.
그리고 주소를 문자로 찍어달라고 말한 이후 전화를 끊었다. 데미안 서전트는 할리우드에서 꼭 한번 만나고 싶던 감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기회가 이렇게 빨리 왔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정이 형! 나 옷 좀 골라줘.”
< 광끼 -105 > 끝
ⓒ l살별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