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01 >
성우는 기대되었다.
이 불청객과 동거가 끝날 가능성이 있다니.
그 무엇보다 절실하게 원하던 일이었다. 벌써 이들과 함께 한 세월이 15년 가까이 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두부 등의 무사귀가 그의 연기자 생활에 도움을 주었지만, 무주귀는 하나의 시한폭탄과 같았다.
적어도 무주귀만은 제거하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더 속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들은 성우에게 있어서 과속방지턱과 같은 존재였다. 무주귀가 있기 때문에 성우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대중 앞에 나서는 부담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언제 또 지난 밤과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기대와 현실은 달랐다.
김민이 하는 이야기는 뜬구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디테일한 설명은 제외한 개념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설명을 한참 듣던 성우는 자연스레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선행을 베풀라고요?”
“맞아. 어떤 것이든 쌓고 쌓으면 도움이 될 거야.”
“뭔가 한 방에 강력한 그런 거는 없나요?”
“그딴 게 있으면 내가 바로 해줬지. 이제는 물량 공세로 나가는 수밖에 없어.”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이 선생을 쌓는 것으로 언제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김민은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할망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추천해주는 이 방법이 손해 볼 일은 아니라 여겼다.
이번 기회에 기부 천사 이미지를 쌓는 것도 연예계에서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네가 어릴 때는 한계가 있지만, 이제는 다르잖아.”
“뭐가 어떻게 다른데요?”
“모든 세상 사람이 사랑하는 배우. 그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무시하는 거야?”
“어··· 그럼 제가 직접 행하지 않는 것도 포함되나요?”
“당연하지!”
김민은 설명을 덧붙였다.
그가 말하는 행동으로 세상이 바뀐다면?
그것도 그의 선행으로 포함될 수 있을 거란 추측이었다. 거액의 기부도 물론 좋겠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으니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성우는 잠시 턱을 괴고 여러 생각을 해봤다. 뭔가 방법이 있을지 몰랐다.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대충 알아들은 것 같네.”
“조언해주셔서 감사해요.”
“부적은 2주 후에 찾아와. 그리고 그 고양이.”
“유부는 왜요?”
“소중하게 여겨. 그 녀석이 네 수호신이나 다름없어.”
성우는 유부를 바라봤다.
어쩌면 이 녀석과 만난 것은 운명일지 몰랐다.
그 생각이 들자 성우의 머릿속에는 여러 쇼핑 목록이 떠올랐다. 수호신의 복지 향상을 위한 노력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스크래치를 도와줄 물품과 새로운 캣 타워였다.
성우가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김민은 노란 종이와 붓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붉은색의 안료를 정성껏 준비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잉크 같은 것은 아니었다. 부적에 쓰는 그 안료는 무척 특별한 것이었다.
경면주사(鏡面朱砂)의 가루.
진사 또는 광명사라 불리기도 하는 이것은 천연광물에 속한다. 과거 동의보감에서는 약재로 취급하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수은의 독성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김민은 최고급 경면주사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 그녀가 쓰는 경면주사는 조각 하나에 300만 원이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부적 두 장을 써서 성우에게 건넸다.
“당장은 이걸로 버텨 봐.”
“얼마를 드려야 될까요?”
“이게 돈으로 얼마일 거 같아?
“글쎄요.”
성우는 설마 억이 넘을까 싶었다.
그 정도의 금액은 그로서도 부담이 되는 수준이었다. 제아무리 광고로 하루 만에 몇억씩 번다고 해도 매일 광고를 찍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향해 김민이 소리쳤다.
“시답잖은 소리하지 말고 그럴 돈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나 해.”
“그래도···”
“썩 꺼져. 저 요망한 고양이 때문에 영업하기 곤란하니 어서 데리고 나가.”
김민이 축객령을 내렸다.
성우는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보답하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일단은 알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보답은 다음에 부적을 찾으러 올 때 하면 될 일이었다. 문을 나서기 전에 그는 김민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요한이 그 앞에서 성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도 주지 않았는데 귀신 같은 녀석이었다.
그는 곧장 시동을 걸면서 성우에게 말을 걸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다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LA에 있는 알렉스한테 전화가 왔어요.”
“알렉스가?”
“네! 빨리 전화 달라고 하던데요.”
“지금 시간이면 거기는 밤 아닌가?”
“정확하게는 저녁 7시가 아직 안 됐죠. 그리고 늦어도 괜찮다고 했어요.”
성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바로 캐스팅 디렉터인 알렉스의 번호를 찾았다. 잠시 통화 대기음이 흘러나온 이후에 그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알렉스는 성우가 인사할 틈도 없이 자신의 용무를 말하기 시작했다. 숨은 쉬고 있는 것인지 의심될 정도였다.
그는 지난번에 성우가 보낸 영상.
그 안에서 대련을 하고 있는 우현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홍보용 영상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난 덕분이었다. 그게 결국 캐스팅을 담당하는 알렉스에게 퍼져나가는데 걸린 기간은 약 1주일가량이었다. 생각보다 제법 빠른 셈이었다.
-그 친구 도대체 누구야?
“누굴 말하는 거예요?”
-너랑 대련하던 꼬맹이.
“아~ 걔는 왜요?”
-그 영상을 보고 이쪽에서 아주 난리가 났어. 너랑 케미도 좋아서 그 친구도 캐스팅하려고.
성우는 솔직히 놀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 정식 시나리오를 보지는 못했지만, 원작 만화에서 ‘아크로’의 나이 어린 동생으로 나오는 캐릭터가 있었다. 훗날 아크로의 조력자이자 후계자로 일하게 되는 꽤 비중 있는 존재였다. 아마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우현이를 캐스팅한다고요?”
-이름이 우현이야? 확정된 것은 아니야.
“그러면?”
-오디션부터 봐야 하니 당장 그 친구 이쪽으로 보내.
“제가 무슨 에이전트도 아니고.”
-너밖에 지금 연락할 곳이 없잖아. 엎어지기 전에 서두르라고!
하긴 알렉스가 초조할 만 했다.
계약이 뒤엎어지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라 했다.
특히 할리우드에서 배우의 섭외는 험난했다. 자고 일어나면 다른 이로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자신도 그렇게 마벨 스튜디오의 작품에 출연한 케이스였다.
성우는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바로 집으로 향해야 했다. 검도장으로 바로 가고 싶었지만, 유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유부를 집에 내려 놓은 이후에 성우는 위례 검도의 도장으로 향했다.
아직 두부는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그래도 부적을 품고 있으니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서둘러 걷자 성우는 아슬아슬하게 11시에 맞춰 도장에 도착했다. 그가 도장 안으로 들어서니 우현은 물론이고 아웅다웅하고 있는 최 사범과 킬리안도 보였다. 성우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우
현을 불렀다.
“우현! 너 잠깐 나 좀 보자.”
“왜요? 오늘은 대련 없나요?”
“그건 이따가 하고 어서 따라와.”
성우는 도장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자신 역시 사범이니 그 공간을 이용하는 데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다행히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홍 감독이 새로운 작품 때문에 당분간 나오지 못하는 것을 떠올랐다. 성우는 우현을 소파에 앉히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너 여권 있어?”
“있기는 한데. 왜요?”
“다행이네. 소속사는 어디야?”
“액션 스쿨이요. 그런데 아직 정식 계약은 안 했어요.”
“그러면 무소속이지 뭐.”
성우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친구를 바이올렛에 소개하는 것이 맞는지 애매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험에 비춰봤을 때 소속사가 있는 것이 훨씬 편했다. 일단 본인의 의사가 중요했기에 그는 방금 알렉스에게 전달받은 내용을 전해주었다.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우
현의 표정은 볼만했다.
“제가 마벨 스튜디오에 캐스팅된다고요?”
“그런데 너 연기는 좀 하니?”
“글쎄요··· 딱히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럼 이렇게 하자. 회사를 소개해줄 테니 속성이라도 연기 수업받고 일단 오디션부터 보러 가.”
“소개해주시는 곳이 사범님이 소속된 회사인가요?”
성우는 맞다고 답을 해줬다.
그가 아는 에이전트가 바이올렛 밖에 딱히 없었다.
이번 할리우드 진출에 신경 써준 것을 보면 확실히 도움이 되고 있으니 나쁜 계약은 아니라 여겼다. 특히 강 대표의 의지와 지원은 확실했다. 하지만 우현은 그런 설명도 하기 전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약할래요.”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 괜히 나중에 나보고 책임지라고 하지 말고.”
“사범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 좋아요.”
“그러다 내가 이 회사에서 나가면 어쩌려고?”
“그럼 활동 접어야죠.”
순간 성우는 소름이 돋았다.
사생팬도 아니고 패기가 무척 격했다.
어찌 되었든 계약 의사를 밝혔기에 성우는 곧장 오만석 실장에게 전화를 주었다. 그의 전화를 받은 오 실장은 도장으로 오겠다며 답을 해줬다. 마벨에서 원하는 인재라면 어느 회사라도 계약을 마다할 리 없었다.
그로부터 30분 후.
도장에 오만석 실장이 도착했다.
강훈 대표도 같이 오려고 했지만,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못 왔다고 그가 전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성우는 내심 조금 섭섭했지만,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죠.”
“여기는 액션 스쿨 소속의 우현 씨.
“반갑습니다.”
“이쪽은 내가 소속된 바이올렛 엔터의 오만석 실장님.”
오 실장은 손을 내밀어 가볍게 악수를 했다.
그런 그를 보며 우현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그냥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도장에 별 생각 없이 나왔는데 뭔가 급물살을 타고 어딘가로 휩쓸려 가는 것 같았다.
그들이 모인 이후.
성우는 방금 온 전화의 내용을 다시 설명했다. 아무리 성우의 말이지만, 오 실장은 쉽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마벨에 전해진 그 동영상을 보여주니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친구지만, 확실히 실력 하나는 좋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뭔데?”
“이 친구 아직 연기해본 적이 없어요.”
“그게 가장 큰 문제구나.”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만석 실장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액션이 좋아도 연기가 안 따르면 말짱 도루묵이 될 것이다. 성우를 데려올 때는 단 한 번도 걱정해보지 못했던 문제였다. 그래도 아직 백지상태니 자신이 도울 일들이 제법 많이 있을 것 같았다.
“연기 레슨받아야지.”
“시간이 별로 없어요. 알렉스가 당장 LA로 와서 오디션 보라고 난리던 데요.”
“어떻게든 시간을 조금 끌어 봐. 그래도 기초는 배우고 가야지.”
“그럼 연기는 실장님만 믿을게요.”
“그런데 너도 같이 미국에 갈 거야?”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자신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우현은 스스로 헤쳐나가야 했다. 자신이 미국까지 따라가 케어해주기는 어려웠다.
아직 어린 우현이다.
그러나 그 역시 성인이었다.
매번 말로만 어린애 취급을 하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잘 해내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더구나 오늘 새벽의 일을 떠올리면 성우는 당장 그것까지 신경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갑자기 성우는 허전했다.
두부라면 지금 이 순간 치고 들어왔을 것이다.
사람이 들어온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다. 그가 떠난 뒤 드는 공허함은 생각보다 컸다. 더구나 뭔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았다.
성우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두부라면 뭔가 조언을 해줬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머릿속을 계속 간지럽히는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탁자를 내리쳤다. 잊고 있던 가장 중요한 것을 떠올린 것이다.
“그런데 너 영어는 좀 하니?”
“헉!”
우현은 사색이 되었다.
그 역시 전혀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그것은 오만석 실장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성우는 별안간 두통이 엄습해오는 것 같았다. 대사 처리도 못 하는 상태에서 오디션에 통과될 리는 없었다.
“큰일이네···”
< 광끼 -10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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