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99 >
형권과 이야기한 이후.
옥션에서 판매된 대금은 바로 이체되었다.
갑자기 수십억을 받은 그였지만, 생각보다 반응은 잠잠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로또 1등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성우는 자신의 연락처를 주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말을 덧붙였다. 성우의 가장 큰 걱정은 그의 삶이 돈에 잡아 먹히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벼락부자의 부작용.
그것은 충분히 염려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형권은 생각보다 현명한 친구였다. 월세로 살고 있던 집에서 아파트로 이사한 것과 학자금 대출을 한 번에 정리한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그것을 제외하면 딱히 돈을 쓰는 곳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이 돈의 출처를 알아서인지 독립유공자 후원 재단에 1억을 흔쾌히 기부하는 모습도 보였다. 과거 그 재단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성우는 형권에게 전화했다.
“오늘 회사 끝나고 한잔하자. 요한이도 같이.”
-오늘요?
“바빠?”
잠시 고민하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요한과 형권은 제법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나이가 동갑인 둘이 살아온 과정은 달랐지만, 그래도 죽이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런 요한을 팔아가며 한 제안을 형권은 끝내 거절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야근해야 해요.
“에잉~ 심심한데. 놀아주지도 않네.”
-요즘 형 보면 일할 기운이 안 나요. 원래 이렇게 널널하게 연예계 생활하세요?
“웃겨. 바쁠 때는 한없이 바쁜 게 이쪽이야. 내가 또 부서장한테 전화 한 통 넣어 줘?”
-됐어요. 다음에 마셔요.
성우는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이내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은 킬리안이었다. 시계를 슬쩍 보니 어느덧 운동갈 시간이었다. 그가 전화한 이유야 뻔했다. 성우는 바로 나간다고 답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현관문으로 향했다.
딱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그가 문을 열자 킬리안이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특히 눈가에 들은 멍은 제법 컸다.
“병원 가보라니까.”
“이 정도로 무슨 병원까지 가.”
“그러게 왜 사범님한테 덤벼서 그 난리야?”
“내가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지.”
킬리안은 막내 사범 최구성에게 도전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도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처참하게 당하고 말았다. 처음 성우가 봤을 때 승률은 반반이라 여겼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위례검의 숙련도가 차이가 컸다.
맨손으로 하는 격투라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조건이라면 킬리안이 무난히 이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검으로 하는 대련은 차원이 달랐다. 최 사범이 지닌 위례검에 숙련도에 킬리안은 따라가지 못했다.
“치사하게 얼굴만 때리다니.”
“언제는 인정사정 봐주지 말라고 하더니.”
“그래도 배우잖아.”
“그런 녀석이 매번 그렇게 대련 신청을 하냐?”
킬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말싸움으로는 성우를 이길 수 없었다.
2주 가까이 한국에서 살면서 매 순간 느끼는 것이었다. 말 속에 칼을 숨겨 놓은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둘은 서둘러 도장으로 향했다.
이번에 새로 오픈한 그곳은 집과 그리 멀지 않았다. 위치도 제법 좋아 역세권이라 볼 수 있었다. 모두 성우와 킬리안 그리고 홍 감독의 투자 덕분이었다. 그 덕분에 위례 검도를 배우기 시작하는 이들이 제법 늘어났다.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유 사범님.”
“반갑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들리는 인사말.
그 모든 것은 성우를 향해 있었다.
이곳에서 성우의 직함은 사범이었다. 홍 감독은 아예 협회를 만들어 장을 맡기려고 했지만, 성우가 거절했다. 배우로 활동하면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도 될 문제였다. 이제 겨우 도장 두 개일 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다음 주에
강북에 오픈하는 도장까지 세 개였다.
파주, 강남, 강북.
이 세 곳은 홍 감독과 다섯 사범이 두 명씩 맡을 예정이었다. 촬영 일정이 생기면 빠지는 경우가 맡기 때문에 딱히 누구 한 명을 담당으로 지정하기는 어려웠다. 가장 큰 도장인 서래 마을의 담당은 홍문석 감독과 최구성 사범이었다.
“왔어?”
“요한이는 아직 안 왔어요?”
“방금 화장실 갔어. 오늘 연습하는 장면 촬영한다고?”
“마벨에서 요구한 것도 있고 해서요.”
출연 배우가 몸을 만드는 장면.
그것 역시 마벨에게 있어서는 좋은 자료였다.
오튜브 같은 동영상 사이트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영상이었다. 성우 역시 그 영상을 본 적이 있기에 딱히 거부감은 없었다. 더구나 위례 검도를 홍보할 기회이기도 했다. 그때 킬리안이 끼어들었다.
“나는 찍지 마.”
“창피한 거는 아냐?”
“얼굴 이렇게 해놓고 찍히면 혼난다고.”
킬리안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성우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몸을 풀기 시작했다. 도장 내부에는 그런 그를 향해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미 도장에 등록한 이들은 위례 검도의 실질적인 최고수가 바로 그인 것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저 몸 좀 풀고 싶은데...”
성우는 홍 감독과 최 사범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 둘은 고개를 저으며 곧바로 사양했다.
괜히 시달리기 싫었던 탓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성우는 홍 감독은 물론이고 다섯 사범이 모두 달라붙어도 이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단둘이라면 괜히 체면만 구길 뿐이었다. 아무도 없을 때면 모를까 지금은 수련생들이 꽤 많았다.
“킬리안 너는 어때?”
어쩔 수 없이 성우는 킬리안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목검을 휘둘렀다. 그런 그를 보며 성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킬리안이 휘두르는 검을 보며 성우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 달도 안되는 사이 녀석은 이미 1, 2단계를 넘어 3단계를 목전에 앞두고 있었다. 빨라도 너무
빠른 진도였다.
-저거 옛날에 태어났으면 장군감이야.
‘나도 인정.’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해볼래?
성우는 갸웃거렸다.
두부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눈앞에 보이는 환상을 느끼고 서둘러 벽면 근처에서 정좌를 틀었다. 그리고 그 환상에 집중했다. 두부가 보여주는 그 상황은 비참했다. 아마 왜놈들이 노략질하는 어느 마을 같았다.
‘이미지 구현해도 꼭 이런 식이지?’
-현실감이 중요하니까. 그래야 실력도 늘지.
‘멘붕에 빠지는 거는 상관없고?’
-그런 수준의 정신력이라면 위례검이 아깝지.
성우는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검 한 자루가 잡혔다. 어차피 시작된 것이라면 제대로 한판 칼춤을 벌일 생각이었다. 현실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었다. 목검이라도 자칫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환상에서는 진검도 사용이 가능했다.
그러고 있는 사이.
성우의 주변을 왜군이 둘러쌓다.
키도 쪼만한 녀석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니 시끄러웠다. 그래도 잡병만 있는 것은 아닌듯 했다. 그중의 한 명은 굉장히 독특했다. 게임 속에서나 보았던 그 기괴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는 피에 물든 칼날을 번쩍이며 뭐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성우는 거
침없이 달려들었다.
“죄책감 없이 베어주마.”
성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십여 명의 왜군이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휘둘러지는 검에 의해 햇살이 반사되어 곳곳에서 번쩍였다. 그런 칼날의 폭풍 속에서도 성우는 침착했다. 겨우 칼날 하나 차이로 피해내며 그의 검은 상대방의 손목을 집요하게 노렸다. 일대 다수의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순식간에 잡병은 정리되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실력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성우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어서 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지휘관으로 보이는 그 가면과 함께 여섯 명이 달려들었다. 확실히 그들의 칼은 잡병의 것과는 달랐다.
챙! 채엥챙!
연신 부르르 떨리는 검의 울림.
그 와중에도 성우는 차근차근 한 명씩 정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지휘관을 1:1 상황에서 목을 내리쳐 몸통에서 분리해냈다. 피가 솟는 그 장면은 무척 잔인했지만, 어차피 환상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서는 절대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 때문이었다.
‘으··· 기분 더러워.’
그래도 속은 시원했다.
현실에서 느껴보지 못한 충만감이 있었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환상이 끝나자 피로감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전에 비하면 검을 수련하며 정신력이 세져서인지 그 강도는 무척 낮아진 상태였다. 그런 그를 보며 킬리안이 물었다.
“너 갑자기 땀을 왜 그렇게 흘려?”
“조금 덥네.”
“무슨 소리야.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서 오히려 춥구만.”
킬리안의 지적은 옳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자리를 피해야 했다.
별안간 어깨로 떨어지는 목검 때문이었다. 그 검을 날린 이는 바로 어제 킬리안을 뭉개놓은 최 사범이었다.
“누가 수련하는데 한눈을 팔아?”
“죄송합니다.”
“내려치기 백 번 반복!”
킬리안은 울상이 되었다.
자유분방한 그에게 이런 반복 훈련은 쥐약이었다.
어제도 그 때문에 최 사범에게 대들었다가 완벽하게 깨진 그였다. 그것을 떠올리니 도저히 거부하기 어려운 눈치였다.
“하나. 둘. 셋···”
“자세 똑바로 하고!”
“여섯. 일곱···”
그러는 사이 요한이 돌아왔다.
그를 향해 성우는 카메라로 찍기 시작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용케 그것을 알아들은 요한은 DSLR의 전원을 켜고 성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성우는 곧장 두 사범을 향해 손짓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바퀴 돌리시죠.”
“나야 좋지.”
“이거 출연료 있냐?”
“그런 게 어딨어요. 그냥 연습하는 거 찍는 건데. 시작합니다.”
성우의 신호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세 사람은 동시에 칼을 치켜들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내부에 있던 모든 이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도장 내의 최고수의 수련 장면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물 흐르듯.”
“천천히 그리고 물 흐르듯.”
“좋아요.”
세 사람의 합은 절묘했다.
모든 동작이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칼의 각도며 몸의 움직임 모두 딱딱 맞았다. 간혹 최 사범의 실수가 나오기는 했지만, 아주 미세한 수준의 것이었다.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
“반 바퀴 뒤돌아 하단 쓸기 후 점프하며 상단 가로 베기.”
“후웃!”
“조금만 더 힘내요.”
문석과 구성은 숨을 헉헉거렸다.
매번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위례검은 결코 쉬운 무예가 아니었다. 어느 사이에 그들의 뒤에서 킬리안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실력으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성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난리도 아니네. 저게 검술이야 체조야?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저 녀석은 조금 다른데.
성우는 거울을 바라봤다.
그러자 자신의 뒤편에서 검을 쥔 한 아이가 보였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그 실력만큼은 성우도 인정할 수준이었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위례검의 모든 동작을 마친 이후. 성우는 최 사범을 불
렀다.
“형. 저기 저 애는 뭐에요?”
“왜 문제 있어?”
“여기 오픈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너무 빨리 배운 거 같아서요.”
“아~ 그거는 아니고 액션스쿨 소속이라 파주에서 배우다 이쪽으로 옮긴 거야. 배우기 시작한 지는 3달 정도 됐나?”
그제야 성우는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그 실력만큼은 확실히 좋았다.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여기 최 사범과 킬리안 사이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사범급이 1년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것을 고려하면 매우 빠른 성취였다.
“몇 살인데 액션 스쿨 소속이에요? 어려 보이는데.”
“저 녀석 엄청 동안이야. 작년에 고등학교 졸업했는걸.”
“어후~ 아직 아기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많네요.”
“쟤 앞에서 ‘아기’ 이런 이야기 하지 마. 그렇게 불리는 거 엄청 싫어하더라. 무술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라 하던데.”
성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장난기가 들기 시작했다. 더구나 직접 검을 맞대며 그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성우는 크게 숨을 마신 이후에 도장이 떠내려갈 정도로 소리쳤다.
“아기야! 나랑 대련 좀 해보자.”
< 광끼 -9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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