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98 >
독립 운동가의 비애.
그것은 시대의 상처와 같았다.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후손은 빈곤했다. 친일파가 떵떵거리며 잘 사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컸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설명하기 너무 복잡했다.
그것은 박윤군의 후손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집안의 가장 큰 기둥이 사라진 이후에 몰락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더구나 독립 이후에 들이닥친 전쟁의 여파가 가장 컸다. 성우는 오 형사와 차를 타고 이동하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속상한 이야기군요.”
“다른 독립운동가 집안도 대부분 비슷하지.”
“그래서 다른 형제자매는 그때 돌아가셨다고요?”
“그런 것 같아. 워낙 손이 귀한 집안이었던 탓도 있고.”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착한 이들의 끝은 매번 이런 것일까?
권선징악이란 것은 동화나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것 같았다. 오히려 악랄하게 사는 이들이 더 잘사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 험준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착한 것이 장점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근무하는 곳이 동활제약이라니 무척 신기하네요.”
“그러게 말이야. 그 친구는 과거 증조부와 동활제약의 인연은 모르는 것 같던데.”
“그래요?”
“확실한 것은 아닌데 그런 느낌이야.”
차는 순식간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탄 차가 무척 빨리 달리지는 못했다. 일단 그럴 수준의 차가 절대 아니었다. 오한근의 차는 꽤 오래된 고물에 속했다. 소리부터 요란한 것이 언제 멈춰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수준이었다.
“아저씨. 이번에 돈도 꽤 버셨으면서 차 좀 바꿔요.”
“이게 뭐 어때서.”
“요즘 극성인 미세 먼지의 원인이 형사님 때문인지 몰랐네요.”
“무슨 소리야. 이 녀석이 정년퇴직하려면 아직 멀었어.”
한근은 슬쩍 대시보드를 보았다.
그곳은 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었다. 계기판에 찍힌 주행 거리도 이미 50만 km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차를 버릴 생각은 없었다.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전직 형사로서 지금 하는 일이 다소 부끄럽지만, 벌이는 적지 않은 편
이었다.
어쩌면 옛 영광의 흔적이라 그럴 수도 있었다.
그가 형사 시절 이 차를 타고 수많은 범인의 뒤를 쫓아다녔다. 당시의 이 녀석은 힘이 좋고 크게 눈에 띄지 않아 추적과 잠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한근은 이 차를 더 오래 타고 싶었다.
“거의 다 왔다.”
“그런데 무슨 수로 불러냈어요? 갑자기 나오라면 거부감이 들 거 같은데요.”
“네 이름 파니까 금방이던데.”
“네?”
성우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한근은 웃으며 설명해줬다.
오늘 만날 박윤군의 후손은 성우도 알고 있는 이였다. 바로 과거 광고 촬영 현장에서 만났던 동활 제약의 직원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한동안 설명을 듣던 성우는 그 인연에 깜짝 놀랐다.
“마케팅 부서에서 일한다고 해서 슬쩍 흘렸더니 바로 물던데. 전에 광고 현장에서 만난 적이 있다며?”
“그 친구가 박윤군 의사님의 증손자였다고요?”
“기억나나 보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촬영 현장에서 본 그 청년.
윤장훈 마케팅 부서장과 함께 온 그는 박윤군과 워낙 똑같이 생겼기에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그의 증손자라 하니 신기할 뿐이었다.
“다 왔어. 먼저 들어갈래?”
“왜요?”
“여기 주차할 곳이 없어. 만나기로 한 곳은 저 카페야.”
한근이 손을 들어 카페를 가리켰다.
성우는 알겠다고 말하고 서둘러 내렸다.
서울역 부근이 워낙 붐비는 장소라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내리자 오한근은 주차장을 찾아 차를 출발시켰고 성우는 카페로 들어섰다. 여름이 슬슬 다가오고 있어 다행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저기 있네.
‘어디?’
-왼쪽 구석진 자리에 앉은 저 녀석 아니야?
성우는 고개를 돌렸다.
두부가 알려준 곳에 앉은 한 청년을 발견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박윤군의 후손이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것 같았다. 지금 다시 봐도 그는 박윤군과 싱크로율이 엄청났다. 그가 다가서자 그 청년도 성우를 발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갑습니다. 유성···”
“쉿! 괜히 소란스러워지니 부탁합니다.”
“아차. 죄송합니다. 음료는 어떤 거로 하실 건가요?”
“일행이 주차 중이라 조금 후에 주문할게요.”
동활제약의 박형권 사원.
성우는 슬쩍 그를 살펴보았다.
입고 있는 옷은 제법 깔끔했지만, 조금 몸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맞춤형 정장이 아닌 이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신발이며 와이셔츠도 조금 오래된 느낌을 받았다. 확실히 금전적인 문제가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성우가 자리에 앉자 그도 따라 앉았
다.
“그런데 저는 어쩐 일로 부르셨나요. 혹시 광고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전혀 그런 내용은 아닙니다.”
“하긴 그런 것이라면 대행사나 부서장님에게 연락이 갔겠죠.”
“동활 제약에도 볼 일이 있지만, 오늘은 형권 씨를 만나러 왔어요.”
“제 이름을 알고 계시네요?”
그는 놀란 표정이었다.
광고 촬영하던 날 자신의 소개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였다.
솔직히 그가 촬영 현장에 나갈 그런 짬은 아니었다. 그런데 과장이며 대리도 못 간 그 자리에 부서장과 함께 간 것은 단 하나의 이유였다. 바로 부서장이 중요한 미팅 때문에 저녁 식사 자리에서 술을 서너 잔 마셨기 때문이었다. 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가 찍은 광고 반응은 괜찮았나요?”
“물론이죠! 전년도 판매에 비하면 30~40%는 더 늘어난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둘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오한근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때 성우의 전화가 바르르 떨려왔다. 액정에 뜬 이름은 오한근이었다. 성우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대뜸 물었다.
“왜 안 들어오세요?”
-주차장 입구에서 차가 퍼졌어. 렉카 불러서 근처 카센터에 들어가야 할 거 같아.
“못 오시는 거예요?”
-그럼 차를 길바닥에 버리고 갈까?
“알겠어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들어가세요.”
성우는 전화를 끊었다.
안 그래도 불안해 보이더니 결국 퍼진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성우는 어찌 되었든 상관은 없다고 여겼다. 어차피 이 자리의 주최는 자신이었고 한근은 조력자에 불과했다. 더구나 바로 앞에 앉아있는 형권은 연신 핸드폰으로 시계를 보고 있었다. 이제
겨우 사원에 불과한 그이니 자리를 길게 비우기 어려워 보였다.
“빨리 들어가셔야 하나요?”
“아무래도 길게 자리를 비우기는 힘들어서요.”
“그럼 제가 잠깐 통화해도 될까요?”
“누구랑요?”
성우는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광고 촬영할 때 받았던 동활 제약의 윤장훈 부서장의 명함이었다. 오히려 그것을 본 형권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런 그에게 안심을 시켜주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는 의외로 간단했다.
우선 박형권 사원과 함께 있다고 말했다.
광고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오늘 바로 퇴근해도 되냐 물었다. 그런 성우의 부탁에 부서장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는 부서장은 은근히 다음 광고를 할 생각이 없냐 물어왔다.
성우는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
동활제약의 광고라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기존 광고로 인해 판매량도 늘었다고 하니 둘 다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아마 다음 광고는 소화제가 아닌 상처에 바르는 약이 될 것 같았다. 그 제품은 성우 역시 어릴 때부터 줄곧 사용하는 것이었다. 의
사인 부모님이 쓰던 것이라 거부감도 없었다.
“이제 안 들어가셔도 되겠네요.”
“뭐 어찌 되었든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햇살 구경도 하겠네요.”
“회사에서 야근을 많이 하시나 봐요.”
“마케팅 일이 다 그렇죠. 그런데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성우는 잠시 형권의 눈치를 보았다.
과연 자신의 이야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확인할 것이 있었다. 금액이 워낙 크니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신중을 기해야 했다.
“혹시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되나요?”
“네? 어떤 거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증조부님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어려운 것은 아니죠. 함양박씨 정랑공파에 윤자 군자를 쓰셨습니다.”
성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혹시 몰라 확인했지만, 마침내 찾아낸 것이다.
그와 함께 그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박윤군이 남긴 한 장의 유서였다. 한눈에 봐도 굉장히 오래된 것이라 형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왜 자신에게 보여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권 씨의 증조부님이 남기신 유서입니다.”
“증조부님이요? 그래서 아까 성함을 여쭤보신 건가요?”
“네. 혹시 배달이 잘못되면 안 되니까요.”
“죄송하지만, 읽어주실 수 있나요? 한자는 제가 좀 약해서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성우는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박윤군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매번 읽을 때마다 집에 남기고 온 아내와 갓난아기에 불과한 아들에 대한 걱정이 묻어나왔다.
“증조부님의 유서라면...여기서 언급되는 아기가 저희 할아버지겠네요.”
“그렇겠죠.”
“갑자기 사라지신 이후에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한 지 알고는 계실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형권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아니 그 집안의 서러웠던 과거사였다.
박윤군이 실종된 이후에 형권의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엄청 고생하셨다고 했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될 정도였다. 형권의 할아버지는 당시를 지옥 같은 시절이라고 종종 말하고는 했다.
“가난은 끈질기죠. 덕분에 저희 아버지도 그리고 저도 엄청 고생했죠.”
“그러셨군요.”
“아마 그래서 그렇게 일찍 가셨나 봐요.”
“몸이 안 좋으셨나요?”
“평생 공사장에서 일하셨으니 그럴 만도 했죠.”
둘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의 주제는 형권의 집안일이었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성우는 마침내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한 꺼내놓아야 했다. 언제까지 핵심을 두고 겉을 맴돌 수는 없었다.
“박윤군 의사님이 남기신 유산이 있습니다.”
“유산이요?”
“네. 그걸 전해주기 위해 오늘 제가 나온 겁니다.”
“여기 유서를 보면 그건 독립자금이잖아요. 제가 아니라 자금을 지원해준 분들에게 돌려주셔야죠.”
“아니요. 그쪽에 돌려줘야 할 거는 따로 있어요. 이거는 형권 씨의 몫입니다.”
성우는 고려 옥션의 서류를 꺼냈다.
금화가 판매된 이후에 금액의 지급이 보류되어 있다는 증빙 서류였다. 그 서류를 본 형권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숫자 ‘0’이 너무 많았다.
“35억이요?”
이게 정말 현실일까?
형권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혹시 몰래카메라에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앞에 있는 이는 요즘 누구나 다 아는 그런 배우였다. 그런 그가 사기를 칠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더구나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주겠다는 것이었다.
“세금을 떼면 많이 줄어들 거예요.”
“그거는 어쩔 수 없죠.”
“너무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형권 씨의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성우의 착각이었을까?
형권의 눈가는 촉촉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지만, 성우는 충분히 이해되었다. 만약 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3대에 걸쳐 그들을 괴롭히던 가난이 있었을까 의문스러웠다.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했다.
그래도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성우의 속 안에 숨어있던 박윤군이 슬쩍 모습을 나타냈다.
-우리는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
‘성불하시는 건가요?’
-아니 우리 증손주를 조금 도와주려고.
‘그냥 떠나셔도 돼요.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그러면 믿고 떠나고.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권은 그보다 나이가 서너 살은 어렸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는 면제를 받았으니 제법 이른 나이에 취업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형이 되어주기로 했다. 물론 본인의 승낙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그럼 자네한테 미안하지만, 뒤의 일은 맡기고 가지.
‘제가 오히려 고맙죠.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때가 되면 잊히는 것이 당연한 거야.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웠네.
박윤군과 그의 동료들.
그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성우를 떠났다.
성불할 시기에 내려오는 빛이 카페를 가득 채웠다. 성우는 그 느낌이 들 때마다 매번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성취감도 느껴졌다. 성우는 그들이 사라진 빛을 향해 고개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이제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길...’
< 광끼 -9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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