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97 >
그날 저녁.
성우는 손님을 맞이했다.
가구 등의 짐이 들어온 이후에 처음 맞는 손님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성우의 연기 인생에 있어 고향과 같은 작두의 단원들이었다.
집들이는 그저 명목에 불과했다.
그저 그들에게 맛난 저녁을 대접하고 싶었다. 그런 성우의 초대에 다들 반겼다. 요즘 들어 성우가 무척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네. 일단 이거 받아.”
“뭘 이렇게 많이 사 오셨어요?”
“우주대스타급인 너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 휴지랑 세제.”
“잘 쓸게요.”
성우는 안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오늘 그의 집에 온 이들은 총 네 명.
과거 연극 ‘악의’에 출연했던 혜정 누나와 상준, 철민 두 형과 주이호 단장까지 모두 출동했다.
“누나도 와주셨네요. 스케줄 있다면서요.”
“일찍 끝났어. 오늘 같은 자리는 빠지면 안 되지.”
“나름 열심히 준비했으니 어서 들어와요.”
누나는 최근 공중파에 진출했다.
아침드라마에 긴급 수혈되는 기회를 얻은 덕분이었다. 원래 캐스팅되었던 배우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음주 운전으로 인해 그 자리가 비었다. 누나는 그 빈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회사의 능력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연기력 덕분이기도 했다. 일일드라마의 시청자층의 특성상. 누나는 아주머니 층에서 슬슬 인지도를 모으고 있었다.
사실 2년 사이
그들 모두 제법 큰 변화를 맞이했다.
극단 작두와 단원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작두는 지난 2년 동안 무대 위에 올린 연극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모두 주이호의 연출력과 작품을 보는 안목 덕분이었다. 거기에 배우의 연기력까지 탄탄하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의 무대는 여전히 상준이 형이 주역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은근히 분위기가 묘했다.
상준과 혜정이 사귀었던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극단의 유일한 커플이었지만, 깨진 지는 조금 되었다고 들었다. 성우도 그 내용을 유식당 촬영을 떠나기 직전에 들었다. 그래도 안 좋게 헤어진 것은 아닌지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른 단원들은 초대를 못 해서 미안하네요.”
“그냥 1기 모임이라고 했어.”
“나중에 제가 따로 가서 밥 한 번 쏠게요.”
“지난번에도 와서 엄청 뜯겼잖아?”
혜정의 말에 성우는 웃었다.
분명 그날 먹은 고깃값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성우는 작두를 갈 때마다 옛 생각에 지금의 현실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고마워지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공간이 작두였다.
“선배는 그러라고 있는 거잖아요.”
“어이구. 네가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냐.”
철민의 말에 성우는 멋쩍게 웃었다.
상준도 그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성우는 잠시 뒤통수를 긁적거리다가 주이호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올해 3기 단원을 뽑았다면서요?
“다섯 명 더 들어왔어.”
“그럼 이제 다 합치면 열 명이 훌쩍 넘네요.”
“실제 연극 무대에 오르는 녀석은 여섯 명에 불과해. 최종 탈락한 녀석들한테 미안할 뿐이지.”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원이라고 모두 무대에 오를 수는 없었다.
자리는 한정적이었고 또 각자의 일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자신도 작두의 1기였다.
하지만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옆에 있는 혜정은 물론이고 철민도 마찬가지였다. 철민은 요즘에는 슬슬 연기파 조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정확히 따지면 이곳의 1기 가운데 작두 무대에 여전히 오르고 있는 이는 상준이 유일했다.
“네 녀석 덕분에 이번에 3기 뽑는데 힘들어 죽는지 알았다.”
“제가 뭘요.”
“너랑 혜정이 작두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돌아서 이번에 지원자가 엄청났어.”
“오~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데요.”
“기대는 무슨 아직 다 풋내기들이지.”
주이호의 말에 성우는 웃었다.
자신 역시 그런 풋내기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번 3기 지원자의 수는 과거를 생각하면 엄청난 수준이었다. 신입의 지원은 물론이고 기존에 데뷔한 경력자도 몰려들었다. 거의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였다.
“저도 나중에 한 번 더 무대에 오르고 싶네요.”
“당장 오지는 말고 늙고 불러주는 데 없으면 그때 와.”
“무슨 말씀을···”
“괜히 쓸데없이 예술혼 불태운다고 손해 보는 짓은 하지 말라고. 불러주는 곳도 많은데 왜 우리 무대에 오르려고 해?”
이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어려운 생활을 겪었거나 아직 겪고 있었다. 현실적인 이야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혜정도 주이호의 의견에 동의했다.
성우가 연극으로 복귀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주이호의 말처럼 최근에는 연극 무대의 스펙트럼은 넓어졌다. 그 와중에 주이호는 대선배가 출연하고 있는 노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연극을 예를 들었다.
연극 ‘장수상점’
현재 국립극장에서 공연되는 이 연극의 주인공은 이미 팔순이 넘은 신국 선생님과 칠순을 넘은 송숙 선생님이었다. 두 분은 연극에서 노년의 사랑, 치매 그리고 가족애를 그려내고 있었다. 가슴 먹먹한 그 스토리는 이미 영화로 제작된 바가 있었지만, 연극도 적지 않게 인기가 있었다.
“에~ 그럼 50년 후에 돌아오라는 건가요?”
“뭐 가능하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갈 길이 참 머네요. 그때까지 절대 그 강을 건너지 마세요.”
그 말에 다들 웃었다.
성우가 영화 제목을 빗대서 주이호의 나이를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칠순이 넘으면 주이호는 거의 아흔에 가까워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음식 다 식겠다.
‘아차! 내가 이야기 나누느라 깜빡했네. 알려줘서 고마워.’
-나도 식은 음식은 싫거든.
성우는 두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텅 빈 식탁 위에 앉아있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오늘 오후에 직접 만든 요리를 내왔다.
메뉴는 생각보다 간단한 편이었다.
국물은 밀푀유나베로 준비했고 고기류는 갈비, 훈제 오리고기 그리고 잡채 등을 내왔다. 그가 음식을 나르기 시작하자 혜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도왔다.
“뭐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그래도 오늘이 제 인생 첫 집들이잖아요.”
“그것도 큰 의미이기는 하지. 네 나이에 직접 돈 벌어서 집을 사는 경우도 거의 없을 거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산 서래마을의 집의 가격이 7억이었다.
제법 부담되는 가격이지만, 평수가 큰 곳을 찾느라 어쩔 수 없었다. 혼자 사는데 그 넓은 곳이 왜 필요하냐 따질 사람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다.
종종 오는 손님은 물론이고 매니저인 요한과 최정이 자고 가는 경우도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을 거실 소파 위나 바닥에서 재우기는 싫었던 탓이다. 음식이 모두 나가자 성우는 와인 냉장고에서 술병 하나를 꺼냈다.
“와인보다는 소주를 달라!”
“맞아. 우리 소주파인 거 알면서.”
“그건 조금 있다가 드시고 이것부터 맛보세요. 제법 비싼 거에요.”
“그런 거는 나중에 연애할 때나 마셔.”
“오늘 축하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그 말에 다들 관심을 표했다.
성우는 천천히 마개를 뜯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바로 마벨 스튜디오의 출연건이 그 핑계였다. 내일이면 다들 알겠지만, 먼저 말해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자랑질이냐 오해하겠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다.
성우의 발언 이후.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마벨 스튜디오라니 더 심했다.
할리우드 진출을 단숨에 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축하의 인사를 성우에게 건넸다. 남의 일이라 여기지 않고 자기 일처럼 여겨주었다. 하지만 쓴소리도 적지 않게 나왔다.
“너무 상업적인 선택이 아닐까?”
“상준이 형. 할리우드 영화가 다 그렇지 뭘. 그럼 아예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 같은 곳에 가서 예술 영화를 찍어야 해?”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반응이 있지 않을까 걱정돼서 말이야.”
“일리 있는 말이기는 해. 배우의 이미지가 고정되어 버리는 부작용도 생각은 해야지.”
주이호가 말을 덧붙였다.
사실 성우도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어느 영화에 출연해도 바로 ‘아크로’라는 슈퍼 히어로부터 떠올릴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그런 부작용을 겪는 배우가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다른 영화를 통해 더 파격적인 변신을 하려 해도 마벨과 계약 기간 중에는 그러기도 힘들었다. 이미 성우는 아크로 시리즈를 3편까지 향후 7년에 걸쳐서 촬영하기로 사인을 했다.
“계약 끝난 이야기를 왜 또 그래요?”
“이미 결정된 사항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지.”
“맞아요. 성우라면 알아서 잘 할 거예요. 원래 그런 녀석이잖아요.”
“나도 동감!”
“단장님이 덕담 한마디 해주시죠.”
“그래요. 건배사 해주세요.”
술잔에 술이 가득 채워졌다.
조명 아래 와인은 붉은색으로 빛났다.
모두가 그 잔을 들고 주이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잔을 들고 머뭇거리다 입술을 뗐다.
“유성우의 밝은 미래를 위해.”
* * *
그로부터 얼마 후.
성우의 소식은 외신을 통해 한국에도 전해졌다.
한국인 최초의 영웅 캐릭터 소식을 들은 팬들은 환호했다. 더구나 그 배경이 국내라 더 좋아했다. 아직 알려진 것도 적었고 향후 촬영이 어느 곳에서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대되는 부분이기는 했다. 요한은 소파에 앉아 있다가 소리쳤다.
“형! 실시간 검색 1위에 올랐어요.”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호들갑은 그만 좀 떨어.”
“그래도 좋은 걸 어떻게 해요. 형이 마벨에 출연한다고 난리에요.”
요한은 방방 뛰었다.
어째 휴가 며칠 다녀온 이후에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았다. 그를 괴롭히던 다크 서클도 조금은 옅어진 느낌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성우는 말했다.
“시나리오 받아온 거 어딨어?”
“깜빡하고 차에 놔두고 왔네요. 가져올까요?”
“부탁 좀 할게?”
“그런데 내년에 ‘아크로’의 촬영일정 있잖아요. 굳이 보실 필요가 있을까요?”
“괜찮은 작품이 있나 보게. 놀면 뭐하냐.”
그 말에 요한은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곧 집 밖으로 나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성우는 TV를 물끄러미 보다가 초인종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킬리안일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외의 인물이 그곳에 서 있었다.
-오 형사 아니야?”
“그러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성우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성우의 두 손을 잡았다. 뭔가 무척 기분 좋아 보이는 것이 성과가 있어 보였다.
“네가 맡긴 거 다 팔렸다고 손 과장한테 연락 왔다.”
“벌써요? 그냥 전화로 말해주시죠.”
“그럴 금액은 솔직히 아니잖아. 난 아직도 네가 금화 맡겼을 때를 생각하면 두 손이 떨린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일반인이 지갑에 아무리 많이 가지고 다녀봐야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 성우가 맡긴 것은 몇십억에 달하는 것이니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 자신도 그 때문에 은행의 금고를 이용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얼마에 팔렸어요?”
“금화만 33억. 나머지까지 합치면 35억 정도 되는 것 같아. 방금 뉴스도 하나 떴더라.”
“정말요?”
성우는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광무 금화로 검색하니 금방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화면을 잠시 보던 성우는 핸드폰을 집었다. 요한한테 전화해야 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매니저도 몰라야 하는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여보세요?
“어딨어?”
-방금 엘리베이터 탔는데요.
“미안한데 다시 내려가서 30분만 있다가 올라올래?”
-네에? 지갑도 위에 두고 왔는데요.
성우는 살짝 난감했다.
하지만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
그의 집을 제외하고도 공간은 있었다.
요한에게 신경 쓰지 말고 집으로 올라오라고 말하고 그는 현관문을 나섰다. 갑자기 밖으로 향하는 그를 보고 오한근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어딜 가는 거야.”
“매니저가 올라오고 있는데 녀석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하기 껄끄러워서요.”
“그런데 그렇게 입고 나가도 돼?”
성우의 옷차림은 후줄근했다.
그러나 성우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바로 앞에 있는 킬리안의 집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우가 현관문을 열고 앞집의 초인종을 누르자 오 형사의 표정은 더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때 킬리안이 문을 열고 슬쩍 고개만 내밀었다.
“왜?”
“나 잠깐 방 하나만 빌리자.”
“멀쩡한 너희 집은 뭐하고?”
“매니저 때문에 조금 애매해.”
“그런 취향이었냐? 내 침대는 여자만 사용이 가능하다.”
성우는 킬리안의 정강이를 찼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했던 킬리안이었다. 손쉽게 피한 녀석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때 마침 요한이 시나리오 몇 권을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시나리오 가져왔는데요.”
“나 잠깐 킬리안 집에 있을 테니 거실에 둬.”
“저는요?”
“쉬고 있어.”
성우는 오 형사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킬리안의 집 역시 성우처럼 빈방이 두 개나 되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처지니 뻔한 일이었다. 방의 문을 닫자 그제야 그는 성우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조금 전에···”
“킬리안 터커.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영화배우에요. 어차피 한국어는 모르니 편하게 이야기하셔도 돼요.”
“단순히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사인이라도 받아드려요?”
“아니 됐어. 일단 일부터 처리하자.”
오한근은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성우가 맡긴 것은 경매에서 모두 팔린 상태였다.
갑자기 나온 수량에 경매가가 떨어질지 알았지만, 선방한 편이라 했던 손이화의 말을 그대로 전달해줬다. 그리고 그 판매금은 현재 경매가 진행되었던 고려 옥션에 묶여 있다고 했다.
돈은 언제든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처리할 것이 있었다.
아직 그 돈을 받을 후손을 만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아무런 사전 교감 없이 대뜸 돈만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갑자기 자신도 모르는 거액의 돈이 입금되면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그는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누구를 만나야 하죠?”
“동활이랑 천산에 패물을 전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런데 박윤군의 후손은 네가 해야 할 것 같아.”
“증손자가 한 명이라고 했던가요?”
“맞아.”
성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벌인 일이니 마무리도 자신이 해야 했다.
이것까지 오 형사님에게 맡기는 것은 박윤군 의사에게 죄송했다. 드디어 기나긴 여정 끝에 종착점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강화도에서 군인과 마주쳤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성우는 아직 자신 안에 남아있을 그들에게 속삭였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 광끼 -9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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