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96 >
지글거리는 소리.
그것만큼 입맛을 돋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붉은 양념이 된 닭갈비.
그것은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물론 고기가 익기만을 기다리는 이는 성우뿐만은 아니었다. 그를 비롯한 킬리안과 사범들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모든 이들이 오전부터 격한 운동을 했다. 당연히 배가 등가죽에 붙기 일보 직전이었다. 적막한 가운데 최구성이 젓가락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했다.
그의 젓가락이 닭갈비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 멈췄다. 바로 민상이 내민 젓가락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킬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중국의 어느 무술 영상에서 본 장면이 연상 되는 장면이었다.
“아직 다 안 익었다.”
“무슨 소리에요. 떡은 다 익었어요.”
“감독님과 성우 사부님이 먹기도 전이다. 예의를 지켜라.”
“끄응···”
구성은 구시렁거렸다.
언제부터 그런 거를 따졌냐는 것이었다.
적어도 먹을 때만큼은 위아래 없이 항상 전투적으로 먹던 그들이었다. 그 모습에 홍문석은 어서 먹으라며 손짓을 했다. 그 순간 모두의 젓가락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물론 그 가운데는 킬리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야! 두 점씩 집는 거는 반칙이지.”
“선배님은 고기만 골라 먹지 마세요.”
“누가 보면 며칠 굶긴 줄 알겠네. 다 먹으면 더 시켜줄 테니 작작 좀 해!”
홍 감독의 말에 다들 조용해졌다.
그렇다고 젓가락의 속도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몸을 쓰는 이들답게 영양분 보충은 무척 신경 쓰는 것 가운데 하나였다. 홍 감독은 그저 물끄러미 그들을 보고 있는 성우에게도 어서 먹으라 권했다.
“안 먹고 뭐 해?”
“감독님도 어서 드세요.”
“그래야지. 그런데 저 친구는 정말 여기서 검을 배우겠데?”
“그러고 싶다고 하던걸요. 힘들까요?”
“뭐 언어가 통해야지. 하긴 저기 구성이 녀석이 영어는 곧잘 하니 상관은 없다만.”
홍문석은 최구성을 바라봤다.
그는 입가에 양념을 묻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 먹고 있는 닭갈비에 무척 만족한 그런 표정이었다. 상당히 맹한 구석이 보였지만, 그래도 사범들 가운데 엘리트라 말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평가의 기준은 무척 낮았다. 나머지는 고등학교를 졸업 하지도 못
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뭐 그러면 두고 가.”
“저도 이제 바쁜 거 거의 마무리 되었으니 종종 올게요.”
“그러면 나야 좋지. 그런데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문석의 고민은 도장의 위치였다.
그들이 처음 문을 연 장소는 액션스쿨 부근이었다. 저렴한 임대료와 액션스쿨의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단점도 분명히 있었다. 워낙 외진 곳이라 찾는 이가 없었다. 오픈하고 벌써 2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 도장에 등록한
수강생은 액션스쿨의 단원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더구나 위례 검도.
그 이름조차 생소하니 어쩔 수 없었다.
홍문석 감독은 어서 이 세월에 잊혀진 검도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이 위력적이고 심화된 무술은 어느 것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의 의견에 성우는 동의했다.
사실 이 도장을 세우는 것은 성우의 바람이기도 했다.
성우가 과거 위례검을 알려주는 대신 그들이 해주기로 약속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사범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배울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다시 대가 끊기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서울 부근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기는 했다.
그러나 성우 수중에 남은 현금은 거의 없었다. 이번에 서래 마을로 이사하며 꽤 큰 출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정산되지 않은 유식당과 광고 출연료 등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정산이 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일단 저도 고민 좀 해볼게요.”
* * *
며칠 후.
성우는 모처럼 늦잠을 즐겼다.
눈을 떠보니 햇살이 들어오는 각도가 꽤 높았다. 얼추 체감상 10시는 넘은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최근 성우의 일상은 백수나 다름없었다. 활동을 멈추는 휴식기에 접어든 것이었다. 얼추 급한 불은 모두 끈 것 같았다.
꾸욱꾹.
배를 누르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눈꺼풀을 떠서 아래를 슬쩍 보니 유부였다. 녀석은 아랫배에 꾹꾹이를 하고 있었다. 일어났으면서 왜 아직도 침대 위에 있냐며 채근하는 것 같았다.
“배고파?”
“냐아옹.”
성우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료를 꺼내 녀석의 밥그릇 위에 부었다. 녀석은 밥그릇 주변을 돌다가 머리를 박고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성우는 슬며시 아빠 미소를 짓고 핸드폰을 집었다. 그와 동시에 벨이 울렸다.
“깜짝이야.”
액정을 보니 오만석 실장이었다.
성우는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저 휴가 중인데요.”
-누가 뭐래. 그냥 알려줄 게 있어서.
“뭔데요?”
-마벨에서 너 출연하는 거 내일 공개하기로 했다고 연락 왔어.
성우는 알겠다며 답했다.
언제 밝혀도 무방한 그런 내용이었다.
더구나 한국과 아시아권 홍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당연히 마벨에서는 그의 이번 출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하지만 성우로서도 약간의 부담감은 있었다.
자신을 보러 영화관에 가는 관객들이 낚였다고 여길 가능성이 있었다. 이번에 촬영 분량이 워낙 적었기 때문이었다. 오만석 실장은 그런 걱정하지 말고 휴가를 잘 보내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때 두부가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오늘은 뭐 할거야?
“글쎄. 아직 생각한 거는 없는데.”
-그럼 여행이나 다녀올까?
“그건 힘들지. 저녁에 작두 단원들이 집들이 오기로 약속되어 있잖아.”
-아차! 그걸 까먹었네.
더구나 움직일 방법도 딱히 없었다.
요한과 최정 모두 5일의 휴가를 떠났다.
자신이 일부러 휴식기를 갖겠다고 고집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딱히 바쁠 일이 없었다. 마벨 스튜디오 촬영도 끝났고 유식당의 방영도 종료되었다.
유식당의 마지막 회.
디아즈 할아버지의 스토리는 반향이 컸다.
특히 지난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릴 때의 순간 시청률은 최고였다. 거의 25% 육박한 수치가 나왔다. TCN 예능 시청률의 최고 기록을 경신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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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관심은 드높았다.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기억해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성우는 약간의 자부심을 느꼈다. 한 명이라도 더 그 당시의 이 나라에 왔던 이들이 흘린 피를 기억해줬으면 했다. 적어도 지구 반대편의 땅에서 온 그들이 있었다는 것만은 잊지 말았으면 했다.
띵동.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갑자기 울리는 소리에 유부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성우는 그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이 시각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오만석 실장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지만, 방금 통화를 했으니 아닐 것이다.
“누구···”
“밥 먹자.”
문을 열었다.
그러자 거대한 체구의 킬리안이 보였다.
그가 갑자기 방문한 것보다 더 이상한 것이 있었다. 성우의 반대편 집의 문도 열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순하게 밥 먹자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성우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그는 현관문 앞에서 다시 손짓하며 말했다.
“아직 아침 전이지? 어서 넘어와.”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나 이 집 샀는데.”
“거기를?”
“시세에서 20만 달러 정도 더 얹어주니 그냥 바로 팔던데.”
성우는 어이가 없었다.
그가 집을 얼마 주고 산 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 가장 핫한 배우인 그가 벌어들인 돈은 적지 않았다. 몇십만 달러 정도 더 비싸게 산 거는 별로 티가 나지 않을 그런 수준이었다.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하필이면 자신의 건너편 집이라는 것이다.
“일부러 여기로 온 거냐?”
“물론이지. 한국에 아는 사람이 너 하나인데 가끔 음식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하아···”
“일단 오늘은 처음이니 내가 준비했어. 어서 들어와.”
성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뭐 옷을 입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몇 걸음 너머이니 잠옷 차림으로 곧장 그를 따라 들어갔다. 이미 유부는 후다닥 달려 킬리안의 집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저 녀석도 들어가도 되냐?”
“문제없어.”
“그럼 다행이네.”
성우는 킬리안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내부는 휑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제법 모던한 분위기가 풍겼다. 어제 막 이사했다는 것치고 중요한 가구는 거의 다 들여놓은 것 같았다.
“오~ 식탁 예쁘네.”
“오천 달러짜리야.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닌데 뭐.”
“500만 원?”
“평소 내가 애용하는 식탁은 한국에서 구하기 힘들더라.”
“갑부 자식.”
솔직히 조금 부러웠다.
다른 것보다 식탁이라 더 그랬다.
음식을 해 먹으니 요즘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싱크대와 식탁이었다. 주부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고 할까? 여하튼 킬리안은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샐러드와 샌드위치.
두 가지의 조합이지만, 정성이 제법 들어간 것이었다. 이른 점심이기에 브런치 수준으로는 적당했다. 특히 어디서 구했는지 치아바타 위에 아스파라거스와 달걀프라이 그리고 닭가슴살이 얹혀 있었다.
“제대로 만들었네.”
“나도 이 정도는 직접 해먹을 수 있다고.”
“누가 뭐라고 했나?”
“일단 먹어.”
킬리안은 무심하게 샌드위치를 집었다.
성우 역시 샌드위치를 들고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우선 치아바타의 그 부드러운 느낌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아스파라거스와 닭가슴살의 조화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맛있다.”
성우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킬리안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오히려 안달이 난 것은 유부였다. 방금 사료를 먹었지만, 그 냄새 때문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킬리안이 말을 걸었다.
“나 너희 도장에 투자하기로 했다.”
“푸읍! 뭐?”
“투자하기로 했다고.”
“네가 왜?”
“멀어도 너무 멀어. 이 근처로 옮기자고 어제 말했어.”
성우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차라리 집을 그쪽에 구하라고 조언을 해주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서 있는 이 집을 사놓은 상태라 이미 늦었다.
“돈 자랑이냐?”
“어차피 옮길 생각이 있었다며. 나는 조금 더 편하게 배우고 싶어서 거기에 조금 보태는 것밖에 없어.”
“얼마나 들어가는데.”
“글쎄. 30만 달러 정도만 보조하기로 일단 말해 놨는데 더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어.”
잠시 계산을 해봤다.
그 정도면 모자랄 가능성이 컸다.
이 동네 부근이 워낙 비싸기 때문이었다.
성우는 자신의 출연료가 들어오면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위례 검도는 자신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위례검 덕분에 마벨 스튜디오와 왈우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이 정도의 투자는 해줘야 마음이 편했다.
“그럼 나도 30만 달러 넣어야겠네.”
“너는 왜?”
“너 때문에 그런다 됐냐?”
“쯧쯧 불필요한 경쟁심은 넣어둬. 괜히 돈 가지고 그러는 거 아냐.”
킬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성우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이내 핸드폰을 집어 홍문석 감독에게 전화해 그 내용을 전했다. 난데없이 두 배우로부터 총 60만 달러의 투자를 받은 것이다. 당연히 그로서는 무슨 일인가 싶어 여러 번에 걸쳐 그 의도를 물어봤다. 그리고 통화 말미에는 그는 폭탄 발언을 했다.
-에잇! 모르겠다. 나도 30만 투자한다.
“감독님이 왜요?”
-무자본 창업도 염치가 있지. 적어도 33%의 지분은 가지고 있어야 운영을 할 거 아냐!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홍 감독의 고집은 대단했다.
뭐 그의 재력을 아는 성우이기에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은근히 돈을 제법 잘 버는 그였다. 물론 수익 대부분을 후학을 위해 액션스쿨에 계속 투자를 하고 있지만, 그 정도의 금액으로 휘청거릴 그는 아니었다.
“할 거면 제대로 하자.”
“뭘 제대로 해?”
킬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우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성우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하면 당연히 그에 대한 수익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경제관념이 꽝은 아니었는지 그는 성우의 말을 금방 파악했다.
“간접 광고를 하자는 거야?”
< 광끼 -9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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