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95 >
다음 날 오전.
성우는 호텔로 향했다.
물론 차를 운전하는 이는 그가 아닌 요한이었다.
호텔에 차가 도착하자 시간에 맞춰 내려온 킬리안이 바로 올라탔다. 차는 그가 타자마자 바로 파주로 향했다. 이른 오전의 정체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변북로는 정체가 극심했다.
모처럼 출근길의 악명 높은 러시아워를 그대로 마주하고 만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향하는 길이 서울을 빠져나가는 방면이라는 것이었다. 반대편의 서울로 들어가는 방향은 거의 기어가고 있었다.
“월컴! 이게 바로 서울의 교통 체증이야.”
“뉴욕도 만만치 않아. 이 정도 규모의 대도시에서는 어쩔 수 없지.”
“그런가? 나는 서울 외에 그런 곳은 많이 못 가봐서.”
“어차피 촬영도 끝났는데 조금 돌아다니고 그래. 그게 다 나중에 연기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
“누가 그래?”
“우리 에이전트가.”
그 말에 성우는 크게 웃었다.
그런 이후에 킬리안에게 직접 실천은 하고 있냐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바로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을 본 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
“아~ 이제야 차가 좀 덜 막히네.”
“여기부터는 경기도.”
“확실히 서울을 벗어나니 달라지는구나.”
그들이 탄 차는 서울을 벗어났다.
그러자 제법 속도가 오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으로 보며 킬리안은 호들갑을 떨었다. 도시 내부를 관통하는 한강의 모습에 감명 깊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강 하구의 물줄기 너머에 바로 북한이 있다니 더 난리가 났다. 한동안 그렇게 잡담을 나누다 킬리안이 성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직접 운전 안 해?”
“나는 운전 못 하는데.”
“왜 무슨 트라우마라도 있어? 운전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트라우마는 무슨. 아직 기회가 없었을 뿐이야.”
“그럼 라이센스도 없는 거야?”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를 다녀온 이후에 면허를 딸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대하는 날부터 지금까지 급류에 휩쓸리듯 흘러왔다. 킬리안의 말을 들으니 슬슬 따야 할 것 같았다. 최근 느끼는 것이지만, 매번 요한한테 운전을 부탁하기에는 미안한 구석이 조금 많았다.
“그래도 나 오토바이 자격증은 있어.”
“허허. 그런 것도 자격증을 따야 해?”
“물론이지.”
성우는 한때 오토바이를 탔다.
그래 봐야 125cc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뺨을 훑고 지나는 바람은 잠시 그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뭔가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학교라는 감옥에서 탈출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탈선하지는 않았다.
오토바이는 그저 스트레스 해소의 수단이었다.
그런 그의 작은 일탈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진수였다. 녀석은 오토바이를 세워 놓을 수 있는 공간을 알아봐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녀석의 수완은 제법 좋았다.
“그럼 나중에 오토바이로 유럽 투어나 같이 할까?”
“오토바이 좋아해?”
“물론이지!”
킬리안은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 주요 내용은 데뷔 전에 시도했던 미국 횡단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내 그 이야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중고로 산 오토바이가 중간에 퍼져서 끝을 못 봤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에 용두사미라며 성우가 놀려댔다. 킬리안이 얼굴이 붉어질 무렵. 신호에 걸렸는지 차가 멈췄고 운전석에 앉은 요한이 고개를 돌렸다.
“거의 다 왔어요.”
“벌써?”
“출발한 지 1시간이나 됐거든요.”
“이 녀석이랑 이야기하느라 몰랐네. 수고했어.”
“밥은 드시고 들어가실 거죠?”
성우는 킬리안에게 의사를 물어봤다.
녀석은 밥과 무술 사이에서 고민하다 무술을 선택했다. 과연 성우가 말한 진짜 무술이라는 그것의 정체가 심하게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성우는 곧바로 액션 스쿨로 가자며 요한에게 말했다.
“우리 내려주고 너는 식사하고 좀 쉬다가 와.”
“저 혼자 뭘 먹어요. 그냥 기다렸다가 이따 같이 먹을래요.”
“맘대로 해. 대신 굳이 들어올 필요는 없으니 쉬고 있어.”
“알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성우는 차에서 내렸다.
그가 내린 건물에는 [위례검도]라는 팻말이 보였다. 나무 위에 파인 글씨는 제법 멋져 보였다. 두부마저 그 글씨를 보고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우와~ 이 시대에도 이 정도로 쓰는 사람이 아직 있구나.
‘그 정도야?’
-한자가 아니라 아쉽지만, 확실히 좋아.
‘나는 잘 모르겠는데.’
-획마다 담겨진 저 힘을 못 느끼는 거야? 아직 너도 멀었구나.
성우는 그런 두부의 말을 무시했다.
물론 지난번에 두부의 특수(?) 교육을 받은 그였다. 사인을 연습하기 위한 특훈이었다. 하지만 성우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글씨를 잘 쓰는 것보다 연기에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킬리안이 성우에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걸었다.
“여기 맞아?”
“응. 여기 위례검도라고 적혀 있잖아.”
“내가 한국어를 아는 것도 아닌데 보면 알겠냐? 그런데 생각보다...”
“작지?”
킬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대단한 무술이라면 이럴 수는 없었다.
하긴 자신이 이름조차 모르는 무술이니 유명하진 않은 것 같았다. 뭔가 비밀 유파 같은 분위기라 오히려 마음에 들기도 했다. 성우는 그런 그의 등을 떠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일반 검도를 배우는 도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큰 차이가 있기는 했다. 검도에서 큰 포지션을 차지하는 호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벽면에 쭉 나열된 죽도가 이 장소의 정체성을 보여줬다.
“이게 누구야!”
서둘러 다가서는 한 남자.
그는 성우에게 다가와 덥석 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성우가 슬쩍 피하며 무산되고 말았다.
“민상이 형.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종종 와서 봐 드려야 하는데 죄송해요.”
“미안하기는! 오히려 내가 찾아가서 배워야지. 그런데 이쪽은?”
“킬리안 몰라요?”
민상은 눈을 끔뻑였다.
킬리안은 그런 그를 향해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계속 눈치채지 못하고 있자 레오파드의 독특한 자세를 취했다. 민상은 처음에는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보다가 그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액션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보는 그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레오파드?”
“맞아요.”
“정말 그 레오파드가 맞다고?”
민상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그게 길게 가지는 못했다.
사무실에서 홍문석 감독을 비롯해 다른 팀장급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민상과 달리 그들은 성우가 온다는 것을 들었는지 그다지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일찍 왔네.”
홍문석은 악수를 청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두 무척 반갑게 맞아주었다. 언제 와도 반가울 사람이 바로 성우였다. 오히려 그들은 성우의 옆에 서 있는 킬리안을 오히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못 알아 본 것은 아니지만, 더 급한 것이 있었다.
“누구부터 봐줄 거야?”
“나이 순서대로 해야지.”
“또 저번처럼 시간 없어서 마지막에 잘릴 수도 있잖아요. 이번에는 미래지향적으로 막내부터 하시죠.”
성우는 웃으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오늘은 정해진 일정이 없었기에 시간 여유가 충분했다. 그런 사실을 인지시킨 후에 킬리안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위례검을 배우기 위해 한국까지 왔다는 사실에 홍문석과 팀장들은 크게 반겼다. 이제부터 같은 무술을 배운다는 동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성우는 잠시 이야기를 끊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다 한 명을 지목하며 말했다. 가르침을 주는 자리이기에 그들의 호칭은 어느덧 사범으로 바뀌었다.
“오늘은 이 사범님부터 하시죠.”
“에이··· 역순이네.”
“앗싸!”
“킬리안 너는 어떻게 할래? 나는 사범님들 봐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성우는 킬리안의 의견을 물었다.
가서 기초를 배우든 아니면 견학을 하든 선택하라는 말이었다. 킬리안은 한 치의 고민 없이 견학을 하기를 바랐다. 과연 성우의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을 상대로 언제나 한 푼 이상의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성우는 그러라고 허락해줬다.
“오시죠.”
성우는 목검을 들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그 느낌이 무척 좋았다.
역시 위례검은 적수공권이 아니라 검을 들어야 했다.
그래야 그가 배운 모든 것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다. 가장 처음으로 선택받은 최구성은 거리를 재며 틈을 노렸다. 성우는 편안하게 검을 늘어트리고 있었지만, 그는 좀처럼 한 발걸음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다.
‘제길··· 조금만 더 다가서면 박살 날 것 같은데.’
느낌이 싸했다.
최구성의 눈가는 씰룩였다.
극도로 긴장한 탓에 팔마저 떨려왔다.
이른바 살기라 말할 수 있는 기운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피부의 살갗은 오돌도돌하게 솟아났다. 그렇게 얼마나 대치했을까? 마침내 그 공포를 뛰어넘은 구성은 단숨에 성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퍼억!
그리고 동시에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이었다.
그저 몸 곳곳에 통증이 느껴졌고 그다음에 자신이 쓰러진 것은 인지했다. 그런 그를 슬쩍 본 이후에 성우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음!”
그 이후부터.
성우는 연달아 대련을 해줬다.
그들이 현재 이상의 성취를 올리기 위한 특훈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세 하나를 잡아주고 그런 것보다 실전이 더 중요했다. 위례검은 실전을 위해 태어난 무예라 어쩔 수 없었다.
도장 내부에 울리는 타격음.
그 소리가 울릴 때마다 킬리안은 움찔거렸다.
가차 없이 온몸을 두드리는 목검만 봐도 통증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킬리안은 입을 벌리고 그들 여섯 명의 수련을 바라봤다. 이게 과연 수련인지 의심될 정도의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웠다.
“안 되겠네요. 이제부터는 두 명씩 들어오세요.”
성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홍문석 무술 감독조차 1:1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과거 성우와 비슷한 수준이었던 그였지만, 그 당시와 지금의 성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는 아직 수련 중이었고 지금은 위례검을 마스터한 차이였다.
하지만 두 명씩도 무리가 있었다.
적어도 서너 명은 되어야 어느 정도 대련이 될 정도였다. 마지막에는 여섯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성우는 그 수많은 목검을 피하고 빗겨내며 모두 제압했다. 절묘한 몸놀림이었다. 처음 시작부터 모두 쓰러지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도 되지 않았다.
“아구구. 더는 못하겠다.”
“우리 내일 못 일어나겠는데요.”
“삭신이 쑤신다.”
그래도 그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렇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이었다. 성우가 아예 이 도장에 상주하면 모를까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아예 신경을 안 쓰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기회 한 번이 금쪽과 같았다.
“후우···”
성우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인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약간 거칠어진 숨과 이마에 흐르는 땀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과 비교하면 티도 안 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실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목검 하나만 있어서도 건장한 남성 대여섯 명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성우가 워낙 일반적인 수준을 벗어난 탓이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할게요.”
“수고했어.”
“고생 많았다.”
“조금 이르지만, 점심 먹고 올까요?”
최구성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
하지만 단 한 명만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성우는 킬리안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겨우 초점이 돌아왔다. 마치 잠시 넋이 유체이탈을 했다가 돌아온 느낌이었다.
“나 이거 꼭 배울래!”
“그러려고 온 거잖아.”
“그리고 이제 더는 대련해 달라며 귀찮게 하지 않을게.”
“갑자기 왜?”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
킬리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저기 멍들어 쓰러지던 사범들의 모습이 깊게 각인되었다. 조금만 잘못하면 정말 골로 갈 수 있는 그런 대련이었다. 자신 역시 그들 못지않은 실력인 것을 알고 있지만, 성우한테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 검을 들고 있을 때 그는 거의 전장의 사신과 같았다. 무섭다는 기분은 살면서 처음 받은 킬리안이었다.
“뭐래.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는 뭔데?”
“글쎄 사범님들이 정하겠지. 우리는 그냥 뒤만 따라가면 돼.”
“기대되는데?”
그 사이 다들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거리를 걷던 행인이 당황한 듯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재빨리 길가로 비켜섰다. 우락부락한 그들이 우르르 입구를 나서니 당연한 일이었다.
잘못 보면 어깨로 오해받을 비주얼이었다.
길을 걷는 그들의 모습은 어느 유명한 영화 포스터와 같았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 대련하며 흘린 땀과 핏줄기 때문에 더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성우는 옆을 흘깃 바라보다 남몰래 웃었다. 그리고 무척 유명해진 그 영화의 명대사를 중얼거렸다.
‘솨라있네(살아있네)!’
< 광끼 -9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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