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92 >
오한근과 손이화.
결국, 둘은 성우의 일을 돕기로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공짜로 함께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의 진행비.
그 명목으로 각 5천만 원씩 주기로 했다.
물론 그 비용은 패물과 금화를 제외한 것으로 마련하기로 했다. 그래도 충분히 지불은 가능했다. 성우의 개인 돈이 그 출처는 아니었다. 그가 찾은 보따리에 금화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돈이 될 만한 온갖 것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당시 지폐도 상당했다. 그런
것들만 팔아도 어느 정도 나올 것이라 손이화 과장이 장담했다.
대신 그녀가 승낙한 조건이 있었다.
후손에게 바로 판매 대금을 보내는 것이다.
이 거래의 진행은 신뢰를 바탕으로 맺어진 것이다. 만약 셋 중의 하나라도 딴마음을 먹으면 쉽게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성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둘 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었다.
그들이 배신하고 도망친다면?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약속해줄 수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을 거라 후회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성우에게 당연히 그럴 실력이 충분히 있었다. 더구나 독립 자금을 돌려주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누구라도 마음대로 손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져온 금화를 둘에게 맡겼다.
이제는 자신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 둘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살포시 숙였다. 그리고 둘에게 부탁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
비행기의 창문 너머.
그곳에 펼쳐진 풍경은 평화로웠다.
뭉게구름이 풍성하게 날개 너머에 펼쳐져 있었다. 손을 뻗어 한 웅큼 쥐어 입으로 베어 물면 솜사탕 맛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옆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뭐야. 긴장한 거야?”
“그럴 리가요. 대표님 요즘 무척 한가하신가 봐요.”
“내가 뭘.”
“이번에는 왜 같이 가시는 거예요?”
성우 옆에 앉은 강 대표.
그는 이번 미국행 비행기에도 함께하고 있었다.
바이올렛 엔터가 구멍가게도 아닌데 이래도 되나 싶었다. 소속 아티스트만 스무 명이 넘는 회사다. 그들의 케어를 위해 딸린 직원까지 합치면 어지간한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그런 회사의 대표가 바로 그였다.
“소속 배우가 할리우드로 가는 거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 같아. 네가 있을 때 즐겨야지.”
“누가 들으면 계약 종료하면 바로 도망갈 준비만 하는지 알겠어요.”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뉘에~뉘에~”
성우는 고개를 돌렸다.
뒷좌석에는 요한이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오만석 실장은 함께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가 이번 촬영에 따로 할 역할은 없었다. 그래서인가 지난번에 오디션 당시에 꽤 삐진 눈치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치열한 현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촬영에 임해야 했다.
국내라고 대충했다는 뜻은 아니다.
세계 최정상에 오르기 위해 그 정도의 각오는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그냥 헛된 포부라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한 번 발 디딘 이상은 어쭙잖게 끝낼 생각은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부딪치면 안 될 일은 없다고 여기는 성우였다.
그때 알림음이 들렸다.
어느 사이에 착륙할 시간이 온 것이다.
그 소리에 스튜어디스는 안전 벨트를 해달라며 기내를 돌아다녔다. 성우는 벨트를 채우고 뒤를 돌아보니 요한 역시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성우를 담당한 이후에 제대로 쉰 적이 거의 없는 녀석이었다. 요즘 같아서는 통 크게
1주일 정도 휴가를 주고 싶었다.
당장은 힘들어도 조만간 가능할 것 같았다.
이번에 2~3일 정도 촬영 일정만 마치면 더는 예정된 것이 없었다. 성우는 한국에 있는 최정 등도 함께 해외여행이나 다녀올까 고민했다.
‘저승에서 온 차사’의 스태프도 보내준 여행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멤버는 가지 못했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 성우였다. 그러나 실제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저 녀석이라면 그냥 돈으로 달라고 할 것이 뻔했다. 그때 강 대표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가방 제대로 챙겨.”
“그게 뭐 제가 실수한 건가요. 다른 사람이 가져간 거지.”
“그렇기는 하지.”
성우는 한 달 전 생겼던 일을 떠올렸다.
가방을 잃어버렸던 당시를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곧 그녀가 부동산 일을 한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LA에도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싶은 그였다. 호텔을 전전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킬리안의 집 같은 곳은 엄두가 안 났다.
청소, 정원, 수영장, 요리사.
그 모든 것이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들어본 바로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다고 했다. 킬리안의 경우에 적어도 1년 동안 들어가는 관리비가 억 단위가 넘는다고 했다. 그래도 솔직히 욕심이 나기는 했다. 언제 또 그런 곳에서 살아볼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촬영 내내 함께 계실 건가요?”
“그럴 수는 없지. 나도 일이 있는데.”
“그럼 계실 동안에 맛있는 거나 많이 사줘요. 킬리안 말로는 맛있는 곳들 제법 많다고 하던데.”
“시간이 가능하다면.”
그 말이 정답이었다.
과연 시간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곧바로 촬영 중인 스튜디오로 향해야 했다. 이번 촬영은 성우가 철저한 을이었다. 이번 영화에서 출연하는 영웅만 십여 명이 넘었다. 마벨 스튜디오에서 최근 활동하는 거의 모든 영웅이 총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케줄은 철저히 맞춰야
했다.
“어서 가자.”
출국 게이트를 통과한 이후.
렌트한 차를 타고 일행은 서둘러 출발했다.
공항에서 오늘 촬영이 예정되어 있는 스튜디오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꽤 멀었다. 운전은 강 대표가 맡았고 그 옆에 성우가 앉았다. 요한은 아직도 피곤했는지 뒷좌석에서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성우는 창밖을 한참 바라보다 심심해서 라디오를 만지작거렸
다.
지지직~!
잡음이 흘러나온 이후.
컨트리 음악이 흘러나오는 채널에 맞췄다.
그 음악을 들은 강 대표는 어깨를 들썩이며 흥에 겨워했다. 성우는 그런 그가 새롭게 보였다. 한참 그러던 그는 성우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너는 다시 음악 하고 싶은 생각 없어?”
“유브로를 다시 한번 하라고요?”
“아니! 유브로는 이제 내가 바라지 않아.”
강훈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유일한과 다시 묶는 것은 성우에게 추천하기 어려웠다. 이제는 둘이 가진 사이즈 차이가 너무 벌어졌다. 그런 그의 반응에 성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요?”
“그쪽으로 나갔어도 성공했을 것 같으니 말한 거지.”
“글쎄요. 나중에 취미 생활로 하면 모를까 지금은 생각 없어요.”
“언제든 마음 생기면 말해. 싱글 앨범 하나 정도는 만들어줄 테니까.”
그 말에 흥미가 동했다.
하지만 방금 대표에게 말했듯이 당장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뭔가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성우도 앨범 만드는 비용 정도는 대충 알고 있었다. 유일한이 술자리에서 몇 번 해줬던 이야기 중의 하나였다.
“장르가 뭐든지 상관없어요?”
“뭐 설마 판소리 앨범 같은 거를 낼 생각이 있는 거는 아니지?”
“그건 나중에 봐서요.”
“허얼! 설마 그쪽에도 재능이 있는 거야? 너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강 대표는 경악했다.
이 녀석의 잠재력은 어디까지일까?
하지만 성우는 손사래를 치며 그건 아니라 말했다. 사실 그런 쪽의 무사귀가 있을 법도 했다. 아직 만난 적은 없었지만, 두부가 그런 확인은 안 해주기에 딱히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도대체 자신의 안에는 이 존재들이 몇이나 있는 것일까?
성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서둘러 잡념을 털어내야만 했다.
지금은 그러고 있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잠시 후에 연기해야 할 ‘아크로’에 대해 집중해야 했다.
오늘은 ‘아크로’의 첫 합류였다.
이 자리가 데뷔 무대나 다름없었다.
이번 영화를 통해 향후 나올 그의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최대한 올려놔야 했다. 그래도 그가 맡은 캐릭터의 인기는 제법 좋은 편이었다. 리서치 자료대로라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지는 못해도 20위 안에는 들어갔다. 영화가 훗날 공개되면 10위권 이내도 어렵
지 않아 보였다.
“다 왔다.”
강훈의 말에 성우는 주변을 살폈다.
스튜디오의 입구라더니 휑한 것이 딱히 별것이 없어 보였다. 정말 이곳이 영화를 촬영하는 곳이 맞나 싶었다. 만약 스튜디오라는 간판이 없었으면 그저 거대한 창고로 오해할 뻔했다. 내부의 건물들은 3~4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회색 박스에 불과했다.
그사이에 차는 멈췄다.
입구 앞에서 멈추자 경비가 다가왔다.
딱 봐도 덩치가 어마어마해 보이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 외모와 달리 그는 무척이나 친절했다.
“어떻게 오셨죠?”
“촬영 때문에 왔습니다.”
“누구신지 잘 모르겠는데 출연하시는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유성우입니다.”
“아! 기억났습니다. 미스터 유.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는 간이 박스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멀리서 누군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키가 190cm는 넘어 보이는 남자였다. 평범한 얼굴이라 특이점은 없었지만, 엉클어진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서둘러 다가와 차를 안쪽으로 안내해줬다. 잠시 후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리자 그는 성우에게 다가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벤 헨더슨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벤이라고 불러주세요.”
“반갑습니다.”
“이번 촬영에서 제가 성우 씨를 담당하게 되었어요.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그런데 문제가 있네요. 다른 분들은 오늘 안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성우와 일행은 당황했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향해 벤은 양해를 부탁했다. 미리 사전에 비밀 유지에 관련된 서약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스토리의 내용이나 촬영 현장이 공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설명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사전 유출은 문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존에 출연 중인 배우들의 스태프는 서약서를 모두 작성했기 때문에 성우만 약간 특별한 케이스였다.
“어쩔 수 없죠.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릴게.”
“촬영 끝나면 연락해주세요. 바로 태우러 달려올 테니.”
“알겠어요. 누가 보면 처음으로 혼자 학교 보내는 아이처럼 보이겠네.”
“그게 그거지. 힘내.”
그렇게 말하며 강훈은 돌아섰다.
그리고 곧 둘은 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들이 나간 것까지 확인한 이후에야 벤은 성우를 어느 곳으로 안내했다. 그를 따라 제법 안으로 들어가자 정체 모를 하얀 트레일러 십여 개 가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곳에서 멈춰섰다. 성우는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이번 촬영에서는 이곳을 쓰시면 됩니다.”
“저 혼자 쓰는 건가요?”
“물론이죠. 향후 마벨을 이끌어나가실 주인공이신걸요.”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그러자 벤은 촬영 순서 때 부르겠다며 쉬라고 권했다. 그런 그에게 성우는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는 그만 가보겠다고 발걸음을 돌리다 잠시 멈춰 돌아섰다. 뭔가 못한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아차! 오늘 입으실 복장은 벽에 걸어 놓았습니다.”
“고마워요.”
“뭘요. 이따 뵐게요.”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성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트레일러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제법 훌륭한 내관의 카라반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바와 냉장고 그리고 에어컨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갈색의 소파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
-오우~ 여행 온 기분이 제대로 난다.
‘여행은 무슨. 조금 있으면 출근해야 하는 회사원 심정이구만.
-회사도 제대로 안 다녀본 녀석이 말은...
‘그러는 너는 관직에 오른 적이라도 있냐?
두부는 답이 없었다.
그 반응을 봤을 때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곧 성우는 벽에 단정하게 걸어 놓은 옷을 발견했다. 그것을 본 성우는 실소를 흘렸다. 두부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와하하하! 이게 뭐야.
성우는 무척 난감했다.
만화로 그 복장은 보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과연 입을 수는 있을까 의심되는 사이즈도 문제였다. 입으면 몸에 딱 달라붙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날 것 같았다.
색도 무척 원색에 가까웠다.
킬리안의 ‘레오파드’ 캐릭터는 온통 검은색이다. 반면에 성우의 ‘아크로’는 완벽한 노란색이었다. 과거 미국을 휩쓴 제임스 리의 그 노란 운동복을 연상시키게 만들었다.
“제길···”
< 광끼 -9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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