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91 >
어느덧 6월.
할리우드로 가기 직전이 되었다.
하지만 점점 더 몸은 바빠지고 있었다.
당분간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성우가 마음을 바꾼 이후에 광고 촬영 일정이 계속 이어졌다. 그 가운데는 혜정과 찍기로 예정되어 있던 광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띡똑~”
“띡똑~”
“맛있어져라!”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래.
그와 함께 혜정은 뭔가를 집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세팅 된 곳에 뿌리는 시늉을 했다. 요즘 그녀의 별명으로 붙은 ‘김밥 잘 싸주는 예쁜 누나’다운 모습이었다. 성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봤다. 그 직후 세트장 내부에서 컷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성우야~ 수고했어.”
성우는 살포시 웃었다.
혜정 누나의 첫 광고 촬영이었다.
사실 그의 기분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괜히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다운되길 바라지는 않았다.
“너 내일모레 미국으로 출국한다며?”
“광고 하나 더 찍고요.”
“전에는 광고 거의 안 찍는 거 같더니.”
“이번 기회에 효도 좀 하려고요. 이거 찍는다고 얼굴이 닳는 것도 아닌데요.”
그 말에 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자신을 위해 고생한 친언니에게 번듯한 가게 하나를 내주는 것이었다.
그게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에게 몇 개의 광고가 들어왔지만, 모두 오케이를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모두 광고업계에서 계약서에 넣는 ‘국내 동종 업계 출연 금지 조항’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들어온 대부분의 광고는 오늘 촬영한 요리 에센스와 비슷한 식품 업체였다.
물론 교묘하게 피해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연예인은 국내 광고를 한 이후에 라이벌 회사의 해외 광고를 찍기도 했다. ‘국내’에 한정된 조항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도 해외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일부 배우만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에는 그런 상황을 피하고자 국내와 국제를 모두 엮는 경우가 많기
는 했다. 성우 역시 이번 계약에 국제가 포함되었다.
‘왈우’와 ‘저승에서 온 차사’
두 가지 모두 해외에서 반응이 좋았다.
특히 저승에서 온 차사의 경우에는 중국, 동남아 등에서 반응이 엄청났다. 공항에서 종종 해외 팬이 보이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거의 폭풍과 같은 반향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하여튼 나 때문에 광고 출연해줘서 고마워.”
“에엑~ 오해하고 계시나 본데. 저 정말 돈 때문에 출연한 거예요.”
“나한테도 엄연히 귀가 있거든.”
“하여간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성우는 펄쩍 뛰며 부인했다.
괜한 오해는 절대 사절인 그였다.
사실 그녀가 말한 사유가 조금 영향을 주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이 광고를 찍기로 한 모든 이유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성우는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사실 부모님이 돌아오셔서 며칠 전에 따로 나가서 살 집을 계약했거든요. 그래서 타격이 좀 커요.”
“오! 어디로 이사하는데?”
“서래마을 부근이요.”
“연예인 동네구나.”
“그렇기는 하죠. 그런데 그곳에 이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어요.”
“혹시 그 동네에 찜해 놓은 여자라도 있나?”
그저 웃을 뿐이었다.
성우는 그 이유를 국립중앙도서관 때문이라 설명했다. 물론 그의 그런 말을 그녀는 100%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는 장소였다.
중앙도서관은 성우에게는 특별했다.
일종의 책으로 이뤄진 보물 창고와 비슷했다.
무사귀 덕분에 책에 취미를 붙인 성우였다. 처음에는 책을 사서 보고는 했지만, 이제 그것도 슬슬 무리였다.
도저히 보관할 곳이 없었다.
그의 방에 있는 책장은 이미 넘친 지 오래였다.
어느 사이에 아버지의 서재도 침범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본래의 주인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제는 따로 자신만의 공간을 가질 예정이기는 했다. 하지만 책을 꽂을 장소가 여의치 않았다.
“하여간 나중에 집들이는 해야지?”
“작두 선배님들 한 번 초대할까요?”
“좋지. 아마 다들 좋아할 거야.”
성우는 내심 상상이 되었다.
주이호 단장을 포함해 다들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
그 대답은 혜정이 해줄 수 있었다. 아직 그녀는 작두와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 끝이 다가오고 있지만, 확실히 하루아침에 떴다고 확 바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너도 종종 찾아뵙고 그래.”
“얼마 전에 새로 연극 올렸다고 하셔서 같이 갔잖아요.”
“아참. 내가 요즘 이런다. 하루가 1년 같아.”
“저도 마찬가지예요.”
유식당 덕분이었다.
프로그램은 이제 겨우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지난주의 방송에서 마을 광장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더 방영될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6주 정도 남았다고 들었다. 맨 마지막에 코멘터리는 이미 찍은 상태였다. 거기에 더불어 참전 용사인 디아즈 할아버지와 함께
한 식사도 따로 한 회차로 편성될 예정이었다.
아직 하이라이트가 나오기도 전이었다.
그런데도 시청률은 하늘 높은지 모르고 계속 오르고 있었다. 이미 20%를 넘을 거라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다. 덕분에 이렇게 광고도 계속 찍을 수 있으니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나 가봐야겠다. 매니저가 어서 나오라고 난리네.”
“또 어딜 가요?”
“인터뷰 잡혀 있어. 너도 갈래?”
“누나가 인터뷰하는데 제가 왜요. 구원투수가 필요하신 건가요?”
“아니 그런 거는 아니고. 아직도 그런 자리에 가면 떨려서.”
“평소처럼 씩씩하게 해요.”
혜정은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성우의 말에 힘을 얻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떠나자 성우 역시 촬영 현장을 빠져나왔다. 사실 그에게는 따로 약속이 잡혀 있었다. 오늘은 오한근과 약속이 있었다. 성우가 미국에 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
30분 후.
성우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요한도 같이 왔지만, 녀석은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혼자 들어가도 괜찮을 그런 곳이기 때문이었다.
은은한 불빛.
럭셔리한 분위기.
성우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고급 한식당이었다. 예약자인 오한근의 이름을 대니 직원이 그를 복도 안쪽 끝의 방으로 안내했다. 이런 곳은 또 처음인지라 성우는 주변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이곳 분위기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이곳입니다.”
“고마워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찾아주세요.”
직원은 인사를 하며 물러섰다.
목소리며 몸짓에 정중함이 뚝뚝 흐르는 것 같았다. 솔직히 이런 곳에서 약속을 잡은 오한근의 속셈이 궁금할 정도였다. 마치 이 분위기는 영화 속에서 정치인들이 밀담을 나누는 그런 곳처럼 느껴졌다. 성우는 가벼운 노크 후 문을 슬쩍 열었다.
“왔어?”
오한근이 보였다.
하지만 그 혼자는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분명 연예인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포스가 엿보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뻤다.
“이쪽은 아시겠지만, 요즘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는 유성우.”
“반갑습니다. 유성우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고려 옥션의 손이화 과장님.”
“반가워요. 손이화에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성우는 환하게 웃으며 손이화 과장과 악수를 했다.
가볍게 쥔 그녀의 손은 가늘고 길었다. 그리고 마주 잡는 순간 성우는 그녀의 강단이 느껴졌다.
“일단 앉으실까요?”
한근이 자리를 권했다.
둘 다 자리에 앉자 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둘 다 바쁠 테니 바로 이야기 시작하죠. 먼저 설명해 드린 대로 여기 유성우 씨가 위탁 경매를 원합니다.”
“형사님.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경매사에요.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고려 옥션에 경매를 맡길 수는 없는 건가요?”
성우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능하죠. 하지만 그런 거라면 제가 아니라 담당 업무를 맡고 있는 직원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꼭 고려 옥션에 진행은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경매사님이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왜 전가요?”
“여기 오한근 형사님이 추천해주셨으니까요.”
“단지 그 이유가 전부에요?”
“그거 말고 또 필요합니까? 저는 형사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형사님은 경매사님을 믿으니 소개해 주신 거겠죠. 아닌가요?”
한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사기가 난무하는 고미술품 업계였다.
하지만 흐린 물속에서도 보석은 있기 마련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여겼다. 물론 그 믿음이 그냥 직감으로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성우에게 말할 수 없지만, 그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그는 그런 한근의 눈빛을 읽었다.
특히 두부 역시 그녀의 관상이 사기 칠 그런 성격은 아니라며 한 몫 거들었다. 사실 그 이면에는 어떻게든 이거를 빨리 털어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박윤군 등의 무사귀가 바라던 것은 언제든 끝낼 수 있었다. 그냥 패물만 동활 제약과 천상 상회의 직계
후손에게 건네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을 돕고 싶다는 것은 성우 본인의 결정이었다.
성우는 작은 가죽 가방을 꺼냈다.
그 안에서 주먹만 한 물건을 꺼냈다.
곱게 싸여 있는 그것을 풀어내고 그 안에서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슬쩍 손 과장 앞으로 굴려 보냈다. 식탁 위를 데구루루 구른 그것은 그녀의 바로 앞에서 툭 쓰러지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타악!
그것을 본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어떤 반응도 보이기 어려웠다. 그녀의 눈앞에는 그 희귀하다던 광무 금화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금화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건···”
“광무 10년 금화에요.”
“팔아달라고 한 것이 이건가요?”
“맞아요.”
성우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리고 나머지 금화도 테이블 위에 쏟아냈다.
와르르 쏟아지는 금화는 조명이 반사되며 번쩍였다. 성우가 긴 시간 닦아낸 덕분에 찾은 광택이었다. 그것을 본 한근은 입을 쩍 벌렸다. 그 역시 성우가 팔려고 하는 것이 뭔지 모른 상태였다.
무슨 금화라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 가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게 실제 금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비쌀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오··· 이게 다 금이야?”
“모두 합쳐서 8개 세트. 총 27개의 금화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놀랍네요. 이게 어떤 건지는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예전 경매되었던 기억이 맞다면 대충...”
“25억에서 많게는 35억 정도는 되죠.”
10년 전.
한 경매장에서 3종 세트가 4억 대에 팔렸다.
개당 1억 5천에 팔린 적도 있으니 어쩌면 40억이 넘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이렇게 많은 물량이 한 번에 푼다면 그 정도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희소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성우의 의견에 이화는 동의했다. 하지만 옆에 앉아있던
한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3···5억? 그게 정말이야?”
“예상가일 뿐이에요. 더 비쌀 수도 더 저렴할 수도 있죠. 실제로 경매 붙여지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성우 씨의 말이 맞아요. 그런데 이거 출처는 확실한가요?”
“길에서 걷다 동전을 주웠어요. 그럼 누군 건가요?”
“흘린 사람의 것이죠.”
“그런데 그게 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이면요?”
이화는 조금 짜증이 났다.
무슨 선문답을 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대답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금화의 위력이었다. 물욕이 생겨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물품의 경매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아마 이게 경매장에 나타나면 모두가 뒤집어 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부문
에 있어 전문가는 그녀가 아닌 오한근이었다.
“습득물의 경우. 신고 후 보관 기간 6개월 경과 후 소유권 취득이 가능하다.”
한근이 줄줄 외웠다.
경찰이었던 그에게 습득물 처리는 흔한 일이었다.
물론 그가 보통 처리하던 주인 잃은 물건과 차원이 달랐지만, 법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과 조금 의미가 달랐다.
“정확하게는 매장물이에요.”
“그러면... 조금 골치 아픈데?”
“하지만 주인을 알고 있어요. 과거의 소유권을 알고 있으니 돌려주면 되는 거죠.”
“누군데?”
“형사님이 요즘 찾고 계신 분이요.”
성우는 가방에서 뭔가를 더 꺼냈다.
그의 손에 쥔 것은 박윤군과 그의 동지들이 쓴 유서였다.
바스러질 것 같은 그것을 조심스레 받아든 한근은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확실히 그의 연륜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유서 안에는 적지 않게 한자가 적혀 있었다. 성우는 그걸 두부가 해석해주기 전까지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물론 그런 그의 옆에서 손
이화 과장도 같이 그 내용을 확인했다.
“이건···”
“박윤군 의사와 동료가 남긴 유서죠.”
“그럼 이 금화의 주인이 그들이라는 거야?”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설명했다.
매장물을 습득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걸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었다. 만약 일반인이 금화를 받는다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은 손이화 과장도 인정하는 바였다. 성우는 마지막으로 자신 역시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제 조각이 조금 맞춰지네.”
“네?”
“네가 찾던 박윤군 의사의 증손자가 동활 제약에 있더라.”
“정말요? 결국, 찾으셨군요!”
성우는 무척 기뻤다.
그런 그의 모습에 한근은 미소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 궁상 맞던 살림을 떠올리고는 미소를 지워야 했다. 그들 세 명은 저녁 식사를 주문하는 것도 잊고 대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내 성우는 음식을 시켜야 했다. 두부의 재촉 때문이었다.
-제발~ 일단 먹고 일하자!
< 광끼 -9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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