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90 >
성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앞에는 엄마가 서 있었다.
다음 주에 오기로 되어 있었던 두 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1주일이나 빨리 나타난 것이었다.
“이 녀석이 엄마를 보고 인사도 안 해?”
“어···엄마?”
“그럼 내가 네 이모냐?”
“다음 주에 오신다면서요. 아빠는요?”
성우는 엄마의 등 뒤를 살폈다.
하지만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싶었지만, 곧 거대한 가방을 들고 아빠마저 나타났다.
“어이~ 아들. 오랜만이야.”
“다녀오셨어요.”
“그래. 집 잘 보고 있었지?”
4년 만에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치고 반응이 밋밋했다.
마치 며칠 동안 나들이 다녀온 사람들 같았다. 그런 두 분의 모습에 성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원래 그런 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계단을 서둘러 내려가 아버지가 든 짐을 같이 들었다.
“녀석. 군대 다녀오더니 힘 좋아졌네!”
“요즘 운동 엄청 열심히 하거든요.”
“어쩐지 근육미 뿜뿜~! 역시 내 아들다워.”
철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둘이 가방을 들고 현관 앞에 도착하자 엄마 공윤혜가 성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성우가 버선발로 뛰어나가며 그 사이 문이 다시 닫힌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아. 우리 집 현관문 비밀번호는 도대체 뭐야?”
“예전 그대로인데요.”
“기억 안 나.”
“제 생일이요.”
성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설마 자신의 생일까지 까먹은 건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익숙하게 버튼을 눌렀고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웃었다.
“설마 틀릴 줄 알았던 거는 아니지?”
“그럴 리가요.”
“호호. 사실 엄마도 좀 쫄았어.”
“자기야. 어서 들어가자.”
철호의 재촉에 그들 모두 우르르 들어갔다.
그런 그들을 반겨준 것은 어느 사이에 깨어난 유부였다. 현관 앞에서 그 난리를 떨었으니 녀석이 깬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윤혜는 갑자기 나타난 생명체에 놀랐다. 그리고 곧 이어진 반응은 일반적인 여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꺄아아~ 완전 귀여워!”
“헛! 우리 없는 사이에 둘째가 생겼네.”
“이름은 유부에요.”
“유부?”
“털 색이 유부초밥을 닮아서 그렇게 지었어요.”
물론 두부의 영향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까지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두 분 모두 유부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내미가 다 커서 징그러워졌는데 잘 됐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특히 엄마의 편애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얘는 사료 먹니?”
“네. 간식도 종종 주는데 대부분 사료를 먹죠.”
“하긴 네가 음식을 해 먹을 거 같진 않으니...”
“저 요리 잘해요. 아들 완전 무시하시네~”
“그럼 우리는 먼저 씻을 테니. 오늘 아들이 실력 좀 발휘해봐.”
철호의 말에 윤혜마저 거들었다.
부부가 아주 쿵짝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성우는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를 떠올리며 알겠다고 답했다. 뭔가 낚인 것 같지만, 그래도 4년 만에 뵙는 부모님이었다. 뭔들 못 해줄 것이 있겠냐는 마음이 들었다.
성우는 냉장고를 열었다.
오늘 그가 할 메뉴는 순두부찌개였다.
어차피 반찬은 만들어 놓은 것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거기에 고등어구이까지 구울 준비를 했다. 원래는 저녁에 먹으려고 자연 해동시킨 건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두 분 모두 생선구이를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등어구이는 유부조차 열광
하는 메뉴였다.
우선 육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따로 뚝배기를 꺼내 들기름과 간장,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넣고 볶아준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불 조절이었다. 타지 않게 잘 섞다가 준비한 육수를 넣는다. 한껏 끓어 오를 때 송송 썰은 애호박과 느타리버섯을 넣는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주인공인 순두부
와 어슷하게 썬 파가 들어간다.
이내 주방은 맛있는 냄새가 가득 찼다.
순두부찌개의 얼큰한 냄새와 함께 고등어를 구워내는 냄새가 그 주범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사이에 유부가 다가왔다. 녀석은 좀처럼 성우의 발아래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네 몫도 굽고 있어.”
“냐아옹.”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녀석은 성우의 발목에 자신의 몸을 비볐다.
그리고는 발등에 기대어 누웠다. 자신을 잊고 고등어를 다른 곳에 가져가지 말라는 시위처럼 느껴졌다.
한 상 뚝딱 차려낸 이후.
부모님은 젖은 머리로 다시 나왔다.
긴 여행의 피로에 샤워는 역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두 분은 식탁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전에 알던 아들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 엄마한테 솔직히 말해.”
“뭘요?”
“우렁각시가 있는 것 같은데. 집 어디에 숨겨놨어?”
“그런 게 어딨어요. 제가 다 했구만.”
“우리 아들 이제 장가가도 되겠네. 그런데 너는 요즘 연애 안 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
성우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로서도 할 말은 참 많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 지 엄마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연애하라며 채근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이었다. 두부도 오랜만에 맞는 말이며 적극 동조했다.
“으음! 이거 맛있다.”
“그러게 어째 당신보다 더 잘 하는 거 같은데.”
“이 양반이 기분 좋은 날에 디스를 하네!”
“엄마. 요리 못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성우도 아빠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엄마에게 손맛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일까?
성우는 어릴 때부터 집밥이란 의미를 잘 모르고 자랐다. 의사 공윤혜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지만, 성우 엄마로서 집안일에 재능은 없었다. 그래도 자신감 하나 만큼은 최고였다. 윤혜는 순두부찌개를 먹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군대 면회도 못 가봐서 미안해. 아들.”
“괜찮아요. 진수랑 친구들이 있잖아요. 걔네가 자주 와줬어요.”
“참! 진수는 요즘 뭐해?”
성우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이야기가 제법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일을 봐주다가 영화를 배우겠다며 떠난 그 일을 간략하게 줄여서 말했다. 그런 그의 말을 듣고 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애초에 친구랑 같이 일하는 게 쉽지는 않아.”
“저도 이번에 절실히 느꼈어요.”
“그래서 진수는 요즘 영화 공부하는 거야?”
“조연출로 영화 촬영에 들어간 것 같은데 어느 영화인지는 말해주지 않네요.”
“그냥 믿고 기다리면 돼. 친구잖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괜히 꼬치꼬치 물어봤자 답을 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같은 직종이니 언젠가는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서로 형편이 되는 쪽이 도움의 손길을 건넬 수 있다면 그 역시 나쁘지 않은 관계였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
그들 세 명은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때로는 아프리카에서 겪은 그들의 경험이 주가 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성우의 연예계 경험담이 주가 될 때가 있었다. 특히 부모님은 성우가 연예인이 된 것에 대해 의외라 여겼다. 어릴 때부터 앞에 나서는 것은 무척 싫어하던 녀석이 바로 성우였다.
“네가 배우 한다고 해서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데.”
“그때 이 사람의 반응을 네가 봤어야 하는데. 특히 너 학교 그만둔다고 했을 때 아주 가관이 아니었다.”
성우도 그 부분은 죄송했다.
더구나 그가 다니던 구성대학교.
그 학교는 쉽게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국내 최고라 말하기는 어려워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곳이었다. 어렵게 들어간 그런 곳을 그만두겠다고 하는데 좋아할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단은 생각보다 쉬웠다.
영문학과에서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한 성우였다. 영어가 그가 가진 몇 안 되는 재능이었기에 고른 과에 불과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 당시 그가 내린 결정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끝도 없었다.
수년 동안 쌓인 각자의 삶이 있었다.
당연히 단시간에 미뤄 왔던 이야기를 모두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늦은 오후에 시작된 이야기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어느 정도 해가 떨어지자 철호는 서재로 향했다. 오랜만에 양주 하나를 꺼내올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고 말았다.
그토록 아끼던 그의 양주 컬렉션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단종되었다고 들은 로얄 OOO 38년산이 가장 속이 쓰렸다. 그는 한동안 눈을 감고 감정을 다스렸다. 하지만 이내 북받치는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치고 말았다.
“유성우!!! 내 양주 다 어쨌어?”
그 소동이 있은 이후.
성우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했다.
고작 술 한 병이 아니었다. 서재의 양주는 반 이상이 털린 상태였다. 수십 병에 달하던 아버지의 컬렉션이었다. 당연히 노여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가 대신 생활비를 낼게요.”
“네가?”
“두 분 모두 백수 되신 지 오래이니 가족은 제가 부양해야죠.”
“오~ 이제야 이 녀석 키운 보람이 있네. 그래서 얼마나 내놓게?”
성우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 7억 정도 되었다.
딱히 쓰는 돈이 없으니 계속 쌓이고 있었다. 그나마 이것도 유식당의 출연료와 강화도에서 습득한 금화는 제외한 것이었다. 어차피 금화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지만, 연말까지 10억은 채울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지금 추세라면 년간 5~10억은 앞으로 당분간
가능할 것 같았다.
“매년 생활비로 1억 정도면 되겠죠?”
“1원이 아니라 1억?”
“요즘 1원짜리 동전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우리야 뭐 그러면 좋긴 한데. 너 정말 부자 됐구나?”
특히 윤혜가 가장 좋아했다.
그 정도면 당분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일을 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만간에 다시 의료 봉사를 나가든 아니면 국내에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것은 철호도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워커 홀릭.
두 분 모두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아빠인 유철호의 일 중독은 과거 대단한 수준이었다. 괜히 대학병원에서 응급의학과 교수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실제 성우가 어릴 때는 집은 거의 1주일에 한 번 왔을까? 덕분에 어린 시절의 성우는 부모님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가 캠핑장에서 사라져 이틀 후에 발견된 이후. 자신이 바뀐 것만큼이나 부모님도 바뀌었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족이라는 것을 두 분이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이었다.
“그런데 해외는 또 나가실 건가요?”
“이제 막 돌아왔어. 우리도 이제 좀 쉬어야지.”
“그럼 당분간은 한국에 계신 거예요?”
“상황을 봐야겠지만, 그럴 것 같아. 이제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조금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어.”
하긴 두 분 모두 쉰이 넘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한참 때는 지나간 지 오래였다. 성우가 결혼만 일찍 했다면 벌써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셨을 두 분이었다. 그때 철호가 잠시 윤혜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너 이제 독립해라.”
“허얼! 저 내쫓기는 거예요?”
“나이가 들면 독립하는 게 당연한 거지. 그리고 우리 생활비는 필요 없으니까 그 돈은 그냥 저축이나 해.”
성우는 당장 집을 구할 생각을 하니 난감했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미국에 집을 구할까 싶었다. 당분간 한국에 있는 것보다 미국에서 더 오래 보낼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이내 부정적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자리를 잡으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작 영화가 개봉하려면 1년에서 2년
은 걸릴 것이 분명했다.
“지금 바로는 힘들고요.”
“얘는 누가 보면 우리가 너 쫓아내는 지 알겠네. 한번 고민해 보라는 의미지. 누가 오늘 밤 당장 나가래?”
“하하. 그렇죠?”
성우는 멋쩍게 웃었다.
하긴 부모님이 그럴 리는 없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사고의 폭도 넓어졌다. 어차피 통장에 들은 돈은 상당히 컸다. 그 정도 금액이면 어디든 집 하나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최근에 너 촬영한 드라마가 그렇게 인기가 좋았다며?”
“제 촬영한 거를 보시기는 했어요?”
“퀴즈쇼에서 우승한 거랑 영화는 봤는데 드라마는 아직이야. 여보 우리 정주행 한 번 할까?”
“그거 좋지. 성우야 어서 틀어 봐.”
“저 없을 때 보시면 안 돼요? 창피한데.”
“그런 게 어딨어. 어서!”
그날부터 이틀 동안.
성우는 ‘저승에서 온 차사’를 정주행하게 되었다. 다음 날에 잡혀있던 스케줄은 자연스레 다른 날로 밀렸다.
“하하! 저 친구 정말 사랑스럽네.”
“혜리요?”
“그래. 우리 아들은 저런 스타일 별로야?”
“쟤는 제 친구의 여자친구에요.”
그 말에 엄마는 아쉬워했다.
성우는 애써 그런 반응을 무시하며 TV를 바라봤다. 그러자 전과 달리 드라마의 느낌은 상당히 색달랐다. 현장에서 모니터링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가족이 함께 보는 드라마라는 것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역시 가족이 있어야 집안이 훈훈해.
‘맞아. 오랜만에 옳은 소리 하네.
-있을 때 잘해드려.
두부의 말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 시간 떨어져 있었던 탓인지 심히 공감되었다.
가까이 있을 때는 몰랐지만, 떨어져 있어 보니 그 소중함이 절절히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오는 광고 마다하지 말고 개인 병원이나 세워드릴까?’
< 광끼 -9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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