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87 >
가방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가져갔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의 것과 똑같은 가방은 한참이 지나도 그대로 있었다. 아마 그 가방의 주인이 범인인 것 같았다.
혹시 한국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탄 그였다. 상당히 가능성은 높은 일이었다. 하지만 태그에 적인 이름은 누가 봐도 서양인의 것이었다.
[줄리아 오먼드]
성우는 슬슬 기다림에 지쳐갔다.
벌써 1시간이 넘게 공항에 묶여 있었다. 공항의 직원도 보통 1~3일 정도면 찾아서 호텔로 보내준다고 했다. 더 이상의 기다림은 불필요하다 여겨 나가려고 했다.
그때 분실물 센터로 누군가 들어왔다.
굵은 웨이브의 황금빛 머리칼이 돋보이는 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상담 중이지 않은 직원 한 명에게 다가섰다.
“무슨 일이시죠?”
“저기 제가 다른 사람의 가방을 잘못 가져갔어요.”
무척 당황한 듯한 목소리였다.
성우는 혹시나 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자신의 가방이 보였다. 태그를 확인해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일단 그렇게 보였다. 성우는 지금껏 자신을 상담해주었던 직원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기 제 가방이 온 것 같은데요.”
“운이 좋으시네요. 가서 확인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성우는 그 여자를 향해 다가섰다.
그녀는 갑자기 다가오는 성우를 보고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성우는 그녀에게 다가서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실례합니다.”
“네?”
“제 가방인 것 같은데 확인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성우는 잠시 허리를 숙였다.
태그에 적힌 이름을 찾아봤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것이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일어나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제 가방이 맞네요.”
“어멋!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이제라도 찾았으니 괜찮아요.”
성우는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그와 이야기하던 공항 직원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성우는 그런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 직원은 자신에게 상상 이상으로 친절했다. 아마 마벨에 오디션을 보러 왔다는 이야기를 해서일지도 몰랐다. 성우는 밖에서 기다리는 이들을 떠올리고 서둘러 가방을 가지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그녀가 잡았다.
“죄송한데 제가 저녁 대접을 해도 될까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일행이 있어서 힘들 것 같네요.”
“다 같이 오셔도 됩니다. 너무 죄송해서 그래요.”
“제 일행이 몇 명이나 될지 알고 그런 약속을 하세요?”
“많아야 서너 명? 그 정도 아닐까요?”
성우는 사악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내 결심한 듯 몇 명이라도 상관없다고 했다. 수십 명씩 몰려다니는 단체 관광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확실히 동양인들은 그런 여행을 많이 하기에 걱정되기는 했다.
“가방도 찾았으니 괜찮아요.”
“제가 미안해서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그녀는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혹시라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찾아달라고 했다. 명함 위에 적힌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 오먼드였다. 역시 성우의 예상대로였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오먼드 씨.”
“언젠가 꼭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좋은 여행 하세요.”
성우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그런 모습에 줄리아는 이미 여행은 끝났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녀의 긴 여행은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국에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성우는 공항 밖으로 서둘러 나갔다. 그가 나오자 강 대표가 그를 반겨주었다.
“시작부터 난리구나.”
“뭐 이게 제가 실수한 건가요. 요한이는요?”
“너 나온다는 문자 받고 차 가지러 주차장에 갔어. 가방은?”
“보시는 대로 여기 찾아 왔죠.”
성우는 가방을 툭툭 쳤다.
그 모습에 강 대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공항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산뜻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도 늦게나마 찾아서 다행이었다. 당장 내일 오디션에 입고 갈 옷도 없을 뻔 했다. 때마침 요한이 그때 차를 끌고 나타났다.
“호텔로 바로 가자.”
둘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곧바로 시내의 호텔로 향했다.
성우는 물끄러미 창밖을 보다 그녀가 준 명함을 꺼냈다. 그 위에 적힌 직업은 ‘Realtor’라 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NAR(전미부동산협회) 마크가 찍혀 있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공인중개사 그쯤 되는 것 같았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강 대표가 목을 쭉 빼며 명함을 바라봤다.
“그건 누구 명함이야?”
“내 가방 잘못 가져간 여자 명함이요.”
“그새 번호를 딴 거야?”
“그럴 리가요. 그냥 주던데요. 나중에 밥이라도 하자고요.”
“오~ 네 얼굴이 여기서도 먹히나 보다.”
강 대표의 말에 요한이 웃었다.
그는 운전하면서도 예쁘냐 물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줄리아의 외모는 인정할 수준이었다. 어지간한 할리우드의 배우나 모델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만약 이 명함이 없었다면 배우라 오해했을 것이다. 사실 이번 미국행이 그냥 여행에 불과했다면 그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밥 먹자고 해. 뭘 그렇게 고민해?”
“벌써 싫다고 했는데요.”
“하여간 눈은 진짜 높아.”
“원하신다면 열애설 하나 준비해서 터트릴까요? 대.표.님?”
“아냐! 미안하다.”
강훈은 열애설이란 말에 치를 떨었다.
올봄에 유일한 그 녀석 덕분에 한바탕 홍역을 치른 그였다. 사귀려면 가수나 사귈 것이지 하필 멜로퀸인 손혜리였다. 덕분에 회사의 전화는 한동안 불통이 될 정도였다. 국내의 모든 기자가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그는 녀석의 꼴도 보기 싫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할리우드 강제 진출시켜준 거요? 아니면 알아서 유식당 같이 프로그램을 알아서 물어오는 거요?”
“아니. 열애설이 터질 염려가 없다는 거야.”
“남들이 들으면 엄청 큰 오해 하겠네요. 저라고 뭐 독수공방하는 게 좋은지 알아요?”
“딱 몇 년만 참아.”
몇 년이라니...
성우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꽃 같은 이십 대가 다 지날 것이다.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냐며 성우는 따졌다. 호텔로 가는 내내 둘은 그 내용으로 투닥거렸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저럴 때는 오만석 실장과 비슷한 곳이 참 많았다. 긴 시간 함께 회사를 이끌어 온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어쭈~ 나 대표야!”
“꼬우면 씨~입팔 개월 후에 두고 보죠.”
“너 발음이 좀 거시기하다?”
“전혀 안 거시기 하거든요.”
“이왕에 말 나온 김에 계약은 어떻게 할 거야?”
뜬금없이 진지해지는 포인트였다.
하지만 성우는 곧바로 답을 할 수 없었다.
아직 계약 기간이 반이나 남았다며 그는 그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물론 강 대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5년이고 7년이고 계약하고 싶었다. 하지만 1년 후에 어떤 상황이 올지 몰랐다.
하루가 다르게 몸값이 치솟는 그였다.
더 많은 계약금이나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라면 그가 거절한 광고 몇 편만으로도 충분히 만회가 가능했다. 성우는 그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적어도 계약의 종료가 다가올 때 정도에 다시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도망 안 가니 조금만 기다려 봐요.’
* * *
다음 날.
성우는 마벨 스튜디오를 찾았다.
그의 상상이 그려낸 그곳은 엄청난 곳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향한 곳은 딕스 랜드로 유명한 그곳이었다. 그제야 성우는 과거 마벨을 인수한 곳이 여기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당시 딕스의 통 큰 빅딜은 항간에 큰 화제를 몰고 왔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딕스의 평소 느낌은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마벨은 비교적 연령대가 높은 편이었다.
“이런 식으로 딕스에 올지 몰랐네요.”
“시간 되면 이따 딕스 랜드나 보고 갈래?”
“나중에 생각해보죠.”
사실 가보고 싶기는 했다.
딕스 랜드는 워낙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은 꿈과 환상이 가득한 그런 놀이공원이었다. 전 세계의 어린이들이 이곳에 오고 싶어 하는 이유는 분명 있었다. 딕스가 가진 수많은 캐릭터가 랜드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는 곧 멈췄다.
성우와 강 대표는 천천히 내렸다.
그러자 곧 입구에서부터 뒤따라오던 차에서 제법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동양인 한 명이 내렸다. 중절모에 체크무늬 재킷까지 제법 멋쟁이 어르신이었다. 그를 발견하자 강 대표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셨어요?”
“너 때문에 이런 곳도 다 오네.”
“강 변호사님.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설마 인색하게 하루만 고용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강 대표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강 변호사라 불린 그는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는 성우를 보며 물었다.
“여기 이 친구가 오늘 주인공인가 보군.”
“안녕하세요. 배우 유성우입니다.”
“나는 오늘 자문을 맡은 스티브 강. 오늘 이 녀석들 제대로 벗겨 먹어 보자고.”
스티브 강 변호사.
그는 재미 교포 사이에서 리더였다.
정확하게는 정신적인 지주 가운데 하나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누가 시킨 것도 또 그가 바라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먼 타지에서 고생하는 동포를 위해 봉사한 긴 시간 덕분이었다.
“들어가실까요?”
강 대표가 앞장섰다.
그러나 곧 그 당당함은 사라졌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 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때 그들을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오늘 오디션을 보러 오신 분들 맞으시죠?”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들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걸었다.
꽤 걸었다고 느껴질 무렵에 직원은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거대한 문 앞에서 선 그는 배우만 따라오고 나머지는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에 성우는 그를 따라 사라졌다.
“오디션 잘 보고 와.”
강 대표가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그렇게라도 힘을 불어 넣어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긴장은 그가 더 한 것 같았다. 성우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 그는 소파에 털썩 기대앉았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왜 또 그러세요.”
“심장이 그렇게 콩알만 해서 어떻게 회사를 이끌어 가는 거야?”
“고모부나 저를 그렇게 띄엄띄엄 보시는 거죠. 저 나름대로 한국 안에서 잘 나가는 기획사 사장이에요.”
“그래 봤자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지.”
강훈은 할 말을 잃었다.
적어도 한국에서 그를 이렇게 대접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스티브 강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는 했다. 그가 강 대표의 고모부라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의 거물 변호사.
보통 그가 맡는 의뢰의 사이즈는 상당히 컸다.
물론 때때로 교민 사회를 위해 작은 건도 맡지만, 거의 취미 생활에 가까웠다. 그만큼 그의 작년 수임료는 대단했다. 바이올렛 엔터의 연간 수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이 꽤 흘렀지만, 성우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섭외에 교감은 있었더라도 대충 오디션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향후 수년 동안 마벨 스튜디오를 이끄는 역할이었다. 당연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루함에 하품이 절로 나올 무렵.
성우가 마침내 나타났다.
하지만 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썩은 표정이 가득했고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안에서 도대체 뭔 일이 있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그를 눈앞에 놓고 강 대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곧 그 이유를 물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그게요···”
“혹시 결과가 안 좋은 거야?”
강 대표는 조심스레 물어봤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에도 성우는 반응이 없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 빈 껍질만 남은 것 같았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 침묵이 깨진 것은 그가 나온 문이 다시 열릴 때였다.
“성우 씨! 축하해.”
캐스팅 디렉터인 알렉스였다.
그제야 성우는 환하게 웃으며 환호했다.
마벨 스튜디오의 새로운 영웅 ‘아크로’는 그의 손에 들어왔다. 뒤늦게 성우가 장난을 친 것을 깨달은 강 대표 역시 방방 뛰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월드 스타로 가는 지름길의 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숨이 헉헉거릴 정도가 되자 그들 뒤에 있던 스티브 강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슬슬 계약하러 가볼까?”
< 광끼 -87 > 끝
ⓒ l살별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