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86 >
킬리안의 꺼낸 말.
그것을 들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특히 그와 함께 온 알렉스의 반응은 무척 격했다. 하는 말투로 봤을 때 이미 그는 어느 정도 킬리안과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긴 킬리안 정도 되는 배우가 아무런 이유 없이 한국까지 따라왔을 리 없었다.
“이봐! 그거는 안 된다니까.”
“살살 할게요.”
“그게 말처럼 쉬워? 당장 내일모레 오디션을 봐야 할 사람이야.”
알렉스는 결사반대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영화에서 킬리안의 촬영은 거의 끝났지만, 성우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다. 첫 등장부터 눈가에 멍이 든 상태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반면, 성우는 피가 끓었다.
그 역시 영화에서 킬리안의 실력을 보았다.
한눈에 봐도 그의 액션은 진짜였다. 오랜만에 보는 실력파라 느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도전해온 것이다.
“저랑요?”
“네. 미스터 유가 나오는 영상을 알렉스를 통해 봤어요. 그런데 몸이 끓어 올라서 바로 달려왔죠.”
“하지만, 지금은 안 되겠네요. 당장 오디션이 있어서.”
“설마 자신 없나요?”
도발이었다.
자신이 없을 리 없었다.
그에게 질 거란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물론 육체적인 스펙은 킬리안이 더 앞서 있었다. 키도 성우보다 약간 더 컸고 체중이며 근육도 무서울 정도였다. 어떻게 저 덩치로 영화에서 그렇게 재빨리 움직였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피가 흥건한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무예였다.
자신이 배운 위례검은 무도보다는 실전용에 가까웠다. 비록 칼이 없더라도 한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순식간에 가능했다. 적절한 힘의 분배와 정확한 타격만 이뤄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럴 리가요. 지금은 때가 아닌 거죠.”
“언제가 적당할까요?”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군요.”
강훈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도 제법 덩치가 좋은 편이었지만, 킬리안과 성우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둘의 대결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물론 곁에 오만석 실장도 있었지만,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요한의 통역에 버퍼링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배우끼리 주먹다짐이라니 옳지 않아요.”
“주먹다짐이라뇨. 무술을 배운 이들끼리 대련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게 그거죠.”
“성우 씨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성우는 두 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은 별로 상관이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자리의 모두가 반대하니 그로서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대신 그는 킬리안의 체면을 고려해 두 가지의 조건을 내밀었다.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대련은 이번 영화의 촬영이 끝나면 하죠.”
“아직 계약도 못 했잖아.”
“꼭 따낼 거니 그건 걱정 안 해주셔도 됩니다.”
“믿어보지.”
킬리안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건 자신도 도와줄 예정이었다.
물론 그것까지 대놓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는 첫눈에 성우에게 호감이 생겼다. 그의 직감은 이 젊은 동양인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구나 그는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잭키 챈과 제트 리를 닮았다. 그때 성우가 말을 덧붙였
다.
“그리고 에이전시의 변호사랑 함께 오세요.”
“변호사는 왜?”
“괜히 나중에 골치 아픈 소송 당하기는 싫으니까요.”
“좋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킬리안은 손을 내밀었다.
지금 당장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감수할 그런 내용이었다. 더구나 변호사는 자신보다 성우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마주 잡은 손에 느껴지는 악력은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주짓수와 가라데 그리고 킥복싱.
닥치는 대로 온갖 무예를 배워온 자신이었다. 만약 영화계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격투가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데뷔 이전에 아마추어 경기에 참여했던 경력도 있었다. 물론 그 결과는 너무 손쉬운 우승이었다.
“마벨과 계약하러 LA에 오면 우리 집에 꼭 놀러 와.”
“봐서요.”
“헤이~! 이거 자랑은 아니지만, 흔하지 않은 기회야.”
“솔직히 남에게 신세 지는 것보다 호텔이 편해요.”
“누가 재워 준다고 했나. 저녁이나 함께 먹자는 거지.”
둘은 함께 웃었다.
조금 전까지 치루던 신경전은 모두 사라졌다.
기본적으로 둘의 성향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오늘 처음 보는 사람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특히 액션에 능한 배우라는 공통점이 가장 컸다. 둘의 대화는 쉽게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 배고프다.”
알렉스가 둘 사이에 끼었다.
그러자 강 대표가 식사를 권했다.
마침 회사 주변에 꽤 괜찮은 한정식 전문 식당이 있었다. 보통 업무상 대접을 할 때 그가 자주 찾는 곳이었다. 그의 제안에 알렉스는 물론이고 킬리안도 반겼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지난 반나절 이상 비행기에 갇혀 있었다.
비즈니스석이라 기내식은 제법 먹을 만 했다. 그러나 둘 다 그것을 제대로 된 음식이라 여기진 않았다. 상황은 그렇게 정리되었고 강 대표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요한과 함께 먼저 내려보냈다. 그들이 나가자 성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유식당 함께했던 혜정 씨 혹시 소속사가 있나 해서.”
“글쎄요.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확실한 거는 아니에요.”
“이번에 우리랑 계약하려고. 네 생각은 어때?”
성우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이번에 유식당을 찍긴 했지만, 아직 눈에 띄는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향후 몇 년 후를 생각해서 계약한다고 보기에는 조금 이상했다. 누나한테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이 때문이었다. 그래도 누나와 한솥밥을 먹는 것은 대환영이었다.
“저야 좋죠!”
“그래. 일단 알겠어.”
“그런데 계약하실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거에요?”
“아··· 어제 TCN의 주 PD와 성 국장하고 저녁을 했어. 그런데 다들 칭찬 일색이더라. 이번에 대활약했다던데.”
그 말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가장 주목받을 사람이 그녀라는 것은 성우도 인정했다. 시즌이 방송되기 시작하면 바로 반응이 올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회사에 자신이 먼저 추천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었다. 성우가 강 대표에게 그걸 말하자 그는 웃었다.
“어차피 네가 말하면 안 들었을 거야.”
“제 말은 믿을 수 없나요?”
“그게 아니라. 같은 극단 출신이라 객관성이 없기 때문이지.”
“그런데 왜 지금 저한테 이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요즘 네가 바이올렛은 물론 한국을 통틀어 가장 대세잖아.”
강훈의 말은 뼈가 있었다.
하지만 성우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덧붙여 그는 말했다.
“혹시 내가 모르는 그런 문제 될 사항은 없는 거지?”
전혀 없었다.
성우는 이 기쁜 소식을 누나에게 바로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강 대표가 말렸다. 아직 계약에 대해 정식으로 논의하기도 전이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있으란 것이 그의 지시였다.
그리고 서둘러 한정식 식당으로 향했다.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매너가 아니었다. 강 대표와 식당에 들어서자 이미 그곳은 술병 두어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제 겨우 반찬이 깔렸을 뿐인데 무척 빠른 진도였다. 더구나 그 병은 막걸리도 아니고 소주였다.
“캬아~ 소주 좋아요.”
킬리안은 춤을 출 기세였다
역시 흥이 많아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알렉스는 핀잔을 줬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아예 독립된 그런 방이었다. 강 대표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구조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착과 동시에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음식이 줄지어 나왔다.
“오~ 이건 뭐죠.”
“이거는 스튜인가?”
“갈비찜이요. 한 번 맛보세요.”
성우가 권하자 알렉스는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맛을 보았다. 한입 먹더니 그는 이내 순식간에 갈빗대 하나를 그대로 해치웠다. 그것은 옆에 앉은 킬리안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는 한식은 처음이라더니 입맛에 잘 맞는 것 같았다.
“역시 한식이군요. 저는 성우 씨의 음식을 먹을 때부터 완전 팬이 되었어요.”
“그럴 리가요. 먹는 것보다 저 보느라 바쁘시던걸요.”
“다 보고 계셨군요.”
그 말에 알렉스는 웃었다.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그는 캐스팅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거의 그 매듭이 풀려가고 있었다. 골치 아프던 그 건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몰랐다. 성우만 미국에 오면 일사천리로 일이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그 식당 방송은 언제 되나요?”
“아직 편집 중인데 다음 주부터는 나갈 것 같습니다.”
“무척 빠르네요.”
“맞아요. 평소라면 두어 배 이상 걸릴 텐데 서두르더군요.”
유식당은 벌써 광고를 하고 있었다.
‘저승에서 온 차사’의 팬을 붙잡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성우는 그런 그들의 마케팅이 그리 좋진 않았다. 유식당까지 합치면 거의 반년을 계속 방송에 출연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중이 쉽게 질릴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면 다음 달에 이쪽 영화에 출연하는 거는 괜찮은 거죠?”
“네. 현재는 딱히 일정은 없어요.”
“꼭 계약해요. 제가 잘해줄 테니.”
성우는 고마움을 표시했다.
알렉스의 말에 따르면 킬리안과 그는 제법 많은 촬영을 같이해야 했다. 특히 원작에서도 둘은 꽤 많이 얽혀 있었다. 성우가 연기할 예정인 ‘아크로’는 킬리안의 ‘레오파드’와 앙숙이었다. 라이벌이라 해도 무방했다. 물론 그 관계가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
니었다.
마벨 스튜디오의 특징이었다.
어제의 동료가 적이 되기도 하고 또 동료가 되기도 했다. 서로가 믿는 정의에 따라 진영이 바뀌는 것이었다. 덕분에 팬들은 온갖 조합으로 이뤄진 영웅들의 대서사시를 볼 수 있었다.
“한 잔 받으시죠.”
성우는 빈 잔을 채워줬다.
다시 한번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어느덧 또 하나의 술병이 비워졌다. 그렇게 식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 비워진 소주병만 무려 열 병이 넘어갔다. 밥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신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알렉스는 꾸벅이며 졸기 시작했다.
“허허. 이 아저씨 벌써 가셨네.”
“킬리안도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정말 대련 안 해 줄 건가?”
“다들 말리는데 방법이 있나요.”
“내일 새벽에 다들 몰래 한 판 어때? 그저 운동일 뿐이잖아.”
성우는 고개를 끄덕일 뻔 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킬리안에게 속삭였다.
“LA에서 한 판 붙죠. 준비 단단히 하고 계세요.”
그 말에 킬리안은 크게 웃었다.
갑자기 웃는 그의 모습에 다들 의아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킬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그래 봐야 며칠 후의 이야기니 충분히 납득한 것 같았다. 성우는 그 순간 일단 붙기로 했으니 완벽하게 이겨야겠다는 다짐을 했
다. 그래야 또 덤비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 날을 위해.”
둘은 건배를 했다.
그리고 그 잔을 마지막으로 식사는 끝났다.
* * *
3일 후.
성우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급하게 구한 표라 비즈니스석은 구하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더 먼 콜롬비아까지 다녀온 이력 때문인지 그 정도는 참을만 했다. 사실 비즈니스가 비싸기는 해도 그 값어치는 톡톡히 했다.
그와 같은 연예인.
특히 성우와 같은 요즘 대세인 배우.
그가 일반석에 타니 쏟아지는 관심은 제법 많았다. 오죽하면 외국인이 누구냐며 물어볼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인 요청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11시간의 비행 이후.
성우는 LA 공항에 도착했다.
기회의 땅으로 유명한 미국이었다.
물론 지금에야 골 때리는 대통령 덕분에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할리우드는 여전히 그에게 최종 보스와 같은 곳이었다. 과연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 성우는 벌써 흥분되었다. 그의 뒤를 따라 나온 요한도 그와 비슷했다.
이번에 미국 진출을 하게 되면?
요한도 계약상에 큰 변화를 맞이한다.
국내에서 매니저를 보는 것과 달리 먼 타국에서 보낼 시간이 더 많아진다. 당연히 그에 따른 보상이 그에게 필요했다. 성우가 그 조건까지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제법 강 대표가 통 크게 지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내 캐리어만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저거 아니에요? 똑같이 생겼는데요.”
“아니야. 태그 확인해 봤는데 다른 사람꺼더라.”
“강 대표님이 왜 안 나오냐고 난리에요.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는데요.”
하루 먼저 출반한 강훈 대표.
그는 차까지 렌트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짐이 나와야 출발할 텐데 한참을 기다려도 그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성우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요한을 보며 말했다.
“제길! 혹시 바뀐 거 아냐?”
Cross Pick-up.
누군가 그의 캐리어를 가져간 것이었다.
성우는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국 진출의 초장부터 꼬이는 기분이었다.
< 광끼 -8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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