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85 >
며칠 후.
성우는 유부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녀석의 증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을 그냥 두고 보고만 있기는 어려웠다. 잠시 녀석을 검진한 채린 선생님은 명쾌하게 진단을 내렸다. 역시 성우의 예상이 맞았다.
“발정기 맞네요.”
“그런데 조금 이른 거 아니에요? 아무리 길게 잡아야 이제 6개월 정도 된 거 같은데요.”
“그게 언제 딱 생긴다고 말하기도 어렵죠. 사람은 뭐 사춘기가 오는 나이가 정해져 있나요?”
확실히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성우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그녀는 웃으며 고양이마다 다 다르지만, 오차 범위 이내에는 든다고 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그 이유를 말해줬다.
“봄이라 더 그렇죠.”
사람도 봄꽃이 피면 사랑 하고 싶어지듯.
냥이도 그맘때 대부분 발정기가 찾아온다고 했다. 잠시 후 성우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질풍 같은 시기를 넘기기 위해서 그녀가 몇 가지의 제안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중성화였다.
그러나 녀석의 땅콩을 떼어내기는 싫었다. 되도록 어릴 때 하는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같은 남자로서 그것만은 지켜주고 싶었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나요?”
“그럼 일단 수술은 피하죠. 그러려면 집사분이 잘 하시는 방법밖에 없네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아니면 짝을 찾아주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라 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넘길 몇 가지 팁을 주었다. 그것은 당장 결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잠시 고민해 볼 문제였다. 성우는 선생님이 말하는 것을 메모지에 받아 적었다.
-탈출 주의.
-실내를 어둡고 조용히.
-같이 놀아주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요즘 계속 도전하고 있는 탈출을 막는 것이다. 실제로 콜롬비아에서도 하룻밤 동안 가출한 녀석이었다. 그 날 마음 졸인 것을 생각하면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슬쩍 이런 생각도 들었다.
유부 이 녀석이 그날 뭘 겪은 것일까? 혹시 광란의 밤은 아니었을까? 그 먼 타국에 DNA를 뿌리고 온 것은 아닌가 싶었다.
“냐아옹.”
온통 어두운 방 안.
집에 돌아온 성우는 그곳에 녀석을 두고 문을 닫았다. 조금 갑갑하겠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녀석 혼자 잠시 집에 있어야 했다.
손님이 오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미국에서 오는 이었다.
그는 바로 콜롬비아에서 만났던 캐스팅 디렉터 알렉스였다. 긴 기다림 끝에 미팅 날이 다가온 것이다.
띵동~!
막 나가려던 찰나.
현관에서 누른 벨 소리가 들렸다.
안 봐도 누군지 감이 왔다. 자신을 데리러 온 오만석 실장일 것이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그가 보였다. 그는 벌써 긴장한 듯한 눈치였다.
“어서 가자. 첫 만남인데 늦으면 안 되지.”
“뭘 늦어요. 이제 막 착륙 했을 텐데.”
“그래도 혹시 차가 막힐지 어떻게 알아?”
성우는 그 말에 웃을 뿐이었다.
그의 집에서 바이올렛 엔터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차가 막혀도 회사까지 40~50분이면 충분했다. 그것도 엄청 막힌다는 가정 하의 일이었다.
반면에 공항에서는 뻥 뚫려도 1시간이다.
그 격차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줄어들 수 없었다. 물리적인 거리의 차이가 너무 컸다. 하지만 오만석 실장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요한이 전화는 아직 없었어요?”
“아직.”
“뭐 알아서 잘 데리고 오겠죠.”
오만석이 그를 데리러 온 이유.
그것은 요한이 공항으로 손님을 마중하러 갔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그가 아닌 다른 매니저를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적어도 말이 통해야 했다. 그런 조건이 붙으니 요한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 어린 시절 꽤 긴 시간 해외에서 살았던 덕분에 그의 회화는 제법 좋은 편이었다.
그로부터 30분 후.
성우는 바이올렛 엔터에 도착했다.
오만석은 그를 데리고 회의실이 아닌 대표실로 향했다. 성우가 그곳에 가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강훈 대표가 그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 당시.
그는 직접 현장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스태프에게 자신의 배우를 잘 부탁한다며 커피와 밥을 쏘기도 했다. 성우가 주연이니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그런 것도 하지 않는 회사가 더 많았다.
“왔어?”
강 대표가 환하게 반겼다.
그는 지금 심경이 복잡한 상태였다.
방금 들어온 이 청년 때문에 강제로 미국 진출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처음에 그 보고를 들었을 때는 곧바로 믿지는 않았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오만석을 추궁했을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위령비를 세워달라고 하지를 않나. 18개월이라는 묘한 계약 기간을 내세우던 것도 특이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 역시 그때 뭔가 씐 것 같았다. 평소라면 말도 되지 않는다며 내쳤을 그런 것이었다.
“커피라도 한 잔 줄까?”
“아니요. 어차피 조금 있다가 또 마실 텐데요.”
“그렇기는 하지.”
“대표님도 회의에 참석하실 거죠?”
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번 건은 중요했다.
어쩌면 향후 몇 년 동안 회사를 지탱해줄 그런 사항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전에 해결할 일이 있었다.
이제 반 정도 남은 성우의 계약 기간.
그 계약이 끝나려면 아직 1년 이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마벨의 촬영은 그 이후가 될 것이라 불안했다. 하지만 혀끝에 맴도는 재계약이라는 단어를 강훈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괜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일단 상황을 조금 더 두고 봐야 했다.
“그런데 캐릭터는 어떤 거 같아?”
“알렉스가 며칠 전에 항공편으로 보내준 코믹스 원작을 봤는데 좋아요. 저한테 딱 맞는 옷을 입는 기분이랄까요.”
“그 정도야?”
“네. 탐나는 캐릭터에요. 꼭 하고 싶어요.”
성우가 이렇게 말한 경우는 없었다.
특히 작품 선정에 출중한 능력을 보이는 성우였다.
지금까지 그가 골랐던 영화와 드라마 모두 대박 신화를 썼다. 그러나 이 정도의 확신은 없었다. 이럴 때는 둘 중의 하나였다. 정말 이제와 다른 신기원을 이루든 아니면 쪽박이었다.
물론 강 대표는 후자를 걱정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실패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다 경험이라 여기면 되는 일이었다. 그의 나이에 할리우드를 제대로 경험해 본 국내 배우가 몇이나 될까? 강훈의 기억으로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월드 스타 ‘시우’
가수로 출발한 그는 확실히 대단했다.
이미 아시아권에서는 스타로 자리 잡았던 그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연기한 작품이 영화제에 출품되어 할리우드에 데뷔할 기회를 얻었다. 조연으로 출연한 그 영화 이후에 그는 곧 두 번째 작품마저 계약했다.
무려 단독 주연이었다.
그게 그의 나이 26살 때의 일이었다.
올해 성우가 딱 그때의 시우의 나이가 되었다. 아무래도 그와 비교되는 일이 잦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강 대표는 걱정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성우라면 꿀릴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소속사를 일으켜 세웠던 시우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렛에 큰 도약을 가져올 것 기대했다.
“왜 이렇게 늦지?”
오만석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연신 그의 손가락은 테이블을 두드렸다.
강훈은 모처럼 보는 그의 긴장된 모습에 웃을 뿐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성우는 그와 달랐다. 핸드폰을 보며 무척 여유로운 것 같았다. 도대체 심장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해부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고양이 발정기라...’
그가 고민하는 것.
그것은 유부의 일이었다.
계속 붙어있고 싶지만,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요즘처럼 바쁠 때는 최소 반나절에서 온종일 혼자 있을 녀석이었다. 그는 내심 그 짝을 찾아줘야 하지 않을까 고민이 되었다.
-그럴 걱정할 시간에 너나 연애를 해. 요즘 젊은것들은 어째 결혼할 생각을 하지도 않아?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그러다 훅 간다. 예전이었으면 네 나이면 애를 낳아도 서너 명은 낳았을 거다.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
때론 두부의 이런 면이 부담스러웠다.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 이 나이에 결혼하는 이가 몇이나 될지 궁금했다. 더구나 오포니 칠포를 논하는 요즘이었다. 물론 스타의 반열에 오른 자신은 그 범위에 포함되지 않지만, 현실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오 실장의 전화가 울렸다.
잠깐 통화한 그는 표정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긴장하던 그가 맞나 싶었다. 모처럼 업무 모드로 돌아선 것이었다. 그는 지하 주차장에 손님이 도착했다며 전해줬다.
얼마 후.
대표실의 문이 열렸다.
알렉스가 보이자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이 두 번째라고 제법 반가운 그였다. 하지만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한 남자를 보고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덩치가 산만 한 근육질의 흑인이었다. 물론 그를 보고 성우가 쫀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레오파드?”
“미안. 이 친구가 계속 따라오고 싶다고 하도 그래서.”
“반가워요. 미스터 유.”
레오파드.
아니 킬리안 터커.
그는 성우도 잘 아는 배우였다.
지난겨울 마벨 스튜디오에서 내놓은 영화 ‘레오파드’. 그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킬리안이었다. 성우 역시 그 영화는 본 관객 가운데 하나였다. 무척 바쁜 와중이지만, 마벨의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보는 그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미팅에 참석해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어서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강훈은 자리를 권했다.
그런 그의 영어 실력에 성우는 깜짝 놀랐다.
영국 억양이 강했지만, 자신 못지않게 유창했다. 그 모습에 오만석 실장만 인상을 썼다. 이곳에서 자신만 못 알아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는 요한이 있었다.
미팅의 속도는 무척 빨랐다.
어차피 이 자리가 최종 결정을 하는 곳은 아니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그가 출연할 경우를 가정해 여러 이야기를 해줬다. 특히 그 대우는 강 대표마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대우가 참 좋네요.”
“아무래도 최근 성우 씨의 인기가 한몫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조건으로 계약이 되는 건가요?”
“가계약이지만, 일단 내부에서는 통과되었어요.”
하지만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렉스는 성우를 바라보며 현지 오디션을 제안했다. 그는 평소 그가 보여준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큰 무리 없이 계약에 성공할 것이라 자신했다.
“언제쯤 가면 되죠?”
“빠를수록 좋죠. 마음 같아서는 내일 당장 같이 가고 싶군요.”
“요한아. 나 스케줄 어떻게 되니?”
요한은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잠시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곧바로 가기는 무리가 있었다. 당장 내일도 신문사 인터뷰가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강 대표가 말했다.
“성우야. 일이란 게 때가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로 가자. 괜히 뭉그적거리다가 계약 놓칠 수 있으니.”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겠다는 신호를 보내자 그는 요한과 오만석에게 오더를 내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우의 스케줄을 비워야 하는 것이었다.
“스케줄은 최대한 밀어서 3일만 만들어. 공손하게 양해를 부탁하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간다. 요한이도 준비해.”
그 말에 오 실장의 표정은 썩어갔다.
자신만 미국행 멤버에서 빠진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영어 실력이 바닥인 그가 가봤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짐이 될 가능성이 컸다. 강 대표는 바로 미국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알렉스에게 전했다.
“좋군요. 일정이 정해지면 말씀해주세요.”
“오디션은 어떻게 하나요?”
“어차피 현장에서 직접 보니 프로필 비디오까지 필요하진 않고 혹시 모르니 연기 장면만 편집해서 준비해주세요.”
강 대표는 알겠다고 답했다.
이미 그것이라면 만들어 둔 그였다. 예전에 성우가 무대에 올랐던 연극 ‘악의’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외주를 줘서 만든 거라 그냥 그대로 들고 가도 될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이야기는 금방 마무리되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며 악수를 했다.
그것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던 킬리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슬쩍 다가와 성우의 앞에 섰다. 그리고 평온한 표정으로 한마디 말을 건넸다. 그것을 들은 성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말한 내용은 충분히 그럴 만 했다.
“당신과 대련을 꼭 해보고 싶습니다.”
< 광끼 -8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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