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84 >
한근은 할 말을 잃었다.
유철호 교수는 그도 익히 잘 아는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물론이고 옛 동료와도 적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아니 본인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될 분이 바로 그였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성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를 아시나요?”
한근은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유철호 교수를 빼다 박은 성우의 얼굴이 보였다. 이처럼 똑같이 생겼는데도 못 알아본 자신을 탓했다. 어느덧 그 예리함을 뽐내던 눈도 동태 눈깔이 된 것 같았다.
“물론이지.”
그는 잠시 옛일을 떠올렸다.
한참 잘나가던 당시 그가 일했던 강력계.
경찰의 꽃이라 불리는 그곳은 명암이 뚜렷했다. 매일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당연히 병원도 뻔질나게 오가던 그였다. 물론 그가 다친 경우보다 피해자 또는 가해자 때문에 갈 일이 더 많았다. 그는 그것을 가볍게 설명했다.
“아하···”
성우도 이제 이해했다.
그의 아버지 유철호는 대학병원의 교수였다.
그것도 매일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하는 응급의학과였다. 아버지가 일하던 구성대학병원은 오한근이 일했던 경찰서와 무척 가까운 편이었다. 당연히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향하는 곳이 그 병원일 것이다. 확실히 경찰과 응급실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그런 관
계였다.
“하하. 선생님이 거의 우리 강력반 주치의나 다름없었지.”
“그렇군요.”
“그런데 요즘에는 어디에서 근무하셔?”
한근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다.
집안에는 딱봐도 함께 사는 흔적이 없었다. 더구나 일이 있어 몇 번 퇴직 이후에도 응급실에 갔으나 윤 교수는 보이지 않았다.
성우는 한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먼 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자 애를 타는 것은 오한근이었다. 그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오해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향해 성우는 처량하게 말했다.
“두 분 모두 먼 길을 떠나셨죠.”
“언제?”
“4년 정도 되셨어요.”
“하긴 내가 경찰을 그만둔 게 벌써 5년이 넘었구나. 어떻게 가셨어?”
먼 길을 떠났다는 말에 그는 오해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들은 성우는 뜨금했다. 더 장난을 치기에는 멀쩡히 살아계신 부모님에게 죄송했다. 괜히 멀쩡한 두 분을 요단강 건너로 보내기는 싫었다.
“비행기 타고요?”
“비행기? 그런 사고도 있었나?”
“무슨 소리에요.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하러 가신 지 4년 되었다고요.”
능글맞게 말하는 성우의 말.
그것을 들은 오한근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핏덩이 같은 녀석에게 농락당할 줄은 생각도 못 한 그였다.
그런 그의 표정을 성우는 차분히 감상했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나는 그였지만, 형사 특유의 포커페이스가 깨진 것은 처음이었다. 두부 역시 그 반응에 대만족하며 웃었다.
-큭큭큭! 이 녀석 악취미가 있네.
‘왜 내가 뭘 어쨌는데.’
-너 그러다 저 아저씨한테 맞는다.
‘내가?’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를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사택천의 가르침을 받은 이후부터 그런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18대 1까지는 몰라도 한 자릿수의 사람들은 나무 막대 하나만 쥐고 있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격투기 대회에서도 타격이라면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오한근은 정작 크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오히려 교수님답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그의 배포는 제법 커 보였다. 오랜 지기 사이라고 밝힌 오 실장님과 비교하면 태평양 같았다.
“보름 후에 돌아온다고 하는데 안부 전해 드릴까요?”
“물론이지. 이번에 아예 들어오시는 거야?”
“아니요. 한 달 정도 머물다 가실 예정이라 들었어요. 비자며 서류상 정리할 게 있다던데요.”
“그렇구나.”
한근은 자신의 무릎을 바라봤다.
그의 이 고장 난 육신도 성우의 아버지인 유철호 교수의 손길을 거쳤다. 도주 중인 범인이 몰던 차에 치여 쓰러진 그를 살려준 것이 유 교수님이었다. 만약 그의 신기에 가까운 응급 처치가 없었으면 이미 이 세상을 하직했을 그였다.
부상의 후유증은 무척 심했다.
그 덕분에 은퇴까지 선택한 오한근이었다.
그래도 매일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갔다. 적어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내미를 볼 수 있다는 기쁨이 있었다.
물론 요즘에는 서로 조금 서먹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내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커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오늘 이 자리에 오면서 무척 고민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유 교수님의 아들이니 체면 불고하고 부탁하기로 했다.
“사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우리 딸내미가 자네 팬이라더군. 사인 한 장만 부탁해도 될까?”
“해드릴게요. 뭘 그걸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하세요?”
“쑥스러워서 그렇지. 고놈이 내가 요즘 네 일을 봐주고 있다는데 전혀 믿지를 않아.”
성우는 시계를 살짝 보았다.
바늘은 오후 5시를 살짝 넘기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이후에 그는 오한근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화기 잠시 저한테 주세요.”
“왜?”
“어서요. 아마 후회하시진 않을 거예요.”
성우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런 그에게 한근은 조심스레 핸드폰을 내밀었다.
*
딴따 따라딴딴.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
그것을 들은 유미는 서둘러 소리를 줄였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의 액정을 확인했다. 역시 눈치 빠른 아빠였다. 학원을 땡땡이치고 노래방에 온 것을 벌써 알아차린 것일까?
“히잉··· 또 수사관 뜨셨네.”
거짓말은 소용없었다.
유난히 촉이 좋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특히 한 번 거짓말이라는 느낌을 받으면 수사망을 좁히듯 파고들었다. 그걸 지난 17년간 겪은 그녀이기에 이미 반쯤 포기했다. 더구나 물증이라도 잡으려는지 영상 통화였다.
그 순간 유미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코인 노래방에서 뛰쳐나와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녀석이 달리는 속도는 거의 빛의 속도에 버금갈 수준이었다. 헉헉거리며 화장실에 도착한 그녀는 빈칸에 들어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빠! 나 화장실이야. 왜 갑자기 영상...”
액정에 보이는 남자.
그는 확실히 아빠는 아니었다.
분명 아빠의 핸드폰으로 걸린 것이라 머릿속이 엉클어졌다. 더구나 그 남자는 유성우로 보였다. 아니 누가 봐도 유성우였다. 요즘 가장 인기 좋은 그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저승에서 온 차사.
그건 요즘 그녀가 홀딱 빠져있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 액정 안의 그 꽃미남이 입을 열었다.
-안녕. 나 누군지 알겠어?
-오유미. 왜 말이 없어? 내 말은 그렇게 안 믿더니.
-아저씨 잠시만요. 혹시 통화 가능할까?
그 순간 유미는 눈물이 났다.
왜 하필 이 순간일까? 다른 곳도 아닌 화장실에 있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보이면 그곳에 숨고 싶었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소녀 감성은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아빠. 미워!!!”
*
그 소란이 있고 난 뒤.
성우는 진땀을 흘리며 눈치를 봤다.
그의 옆에서 서슬 퍼런 눈으로 째려보는 오한근 때문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실수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전화를 받을지 전혀 상상도 못 했다.
십여 분 정도 지났을까?
그는 어렵게 오한근의 딸과 다시 통화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영상 통화는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울기라도 했는지 코맹맹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그 목소리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비명(?)과 같은 환호까지 합쳐지니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성우는 10대의 그 풋풋한 모습을 보고 좋을 때라 여겼다.
“그럼 아빠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
십여 분의 통화 이후.
성우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오한근에게 그의 전화를 돌려줬다. 그는 얼굴에 퍼지는 미소를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딸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저 친구 알고 보니 딸바보네.
두부가 혀를 찼다.
하지만 성우는 그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아마 자신이 유부를 바라볼 때 눈빛이 저럴 것 같았다. 이내 오한근은 다시 예전과 같은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그 분위기는 전보다 제법 편해진 느낌이었다.
“통화해줘서 고마워.”
“함부로 영상 통화를 걸어서 죄송해요.”
“뭐 그럴 수도 있지. 그 녀석 딱 보니 학원 아니더만.”
역시 그의 눈은 매서웠다.
그 짧은 찰나에 딸 너머로 보이는 배경을 분석한 것 같았다. 누가 봐도 그는 천직이 경찰이었다. 그런 그가 그 직업을 손에서 놓아야 했으니 그 아쉬움이 성우에도 전해졌다.
“때론 모른 척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죠.”
성우는 이미 식은 커피잔을 들었다.
그런 그의 말에 한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번 일로 애써 만든 계기를 그렇게 날리기는 싫었다. 그는 괜히 헛기침하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두 분은 남은 한 달 동안 추적해볼게.”
“아! 아까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는데요.”
“뭔데?”
“박윤군이라는 분은 약간 경상도 억양이 있었어요.”
“억양이?”
오한근은 가자미 눈을 떴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투를 안다는 것은 직접 보았다는 말과 비슷했다. 그는 그것을 성우에게 따졌다.
“실제로 만난 적이 있어?”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알아?”
“그거는 말씀을 드릴 수 없어요.”
성우는 대답을 회피했다.
한근은 재차 물었지만, 그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뭘해도 입을 열지 않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취조만 십여 년을 한 그이기에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심 그 속내가 궁금했지만, 한근은 묻어두기로 했다.
“너 어디 가서 사기는 치지 마라. 그쪽에는 전혀 재능이 없다.”
“제가 뭐가 아쉬워서 사기를 왜 쳐요. 당하면 모를까.”
“그렇기는 하네.”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연락해. 후배 중에 아직 현역인 얘들 꽤 있으니까.”
성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리고 성우는 그에게 하나 더 부탁하기로 했다. 이제 슬슬 은행 안에 들어있는 금화를 처분해야 했다.
원래는 그냥 현물로 주려고 했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애매했다.
후손에게 그것을 줘도 결국 파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땅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습득했기 때문이었다. 성우는 가능하면 문제가 없는 현금으로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혹시 골동품 경매 쪽에 아시는 분은 없나요?”
“뭐 살 거면 그냥 경매장에 가면 되지.”
“아뇨. 팔려고요. 위탁 경매를 진행하고 싶은데 믿을 수 있는 분이 있을까요?”
그 말에 한근은 잠시 고민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인물이 떠올랐다.
하지만 대부분 장물아비나 질이 좋지 않은 범죄자였다. 경매를 믿고 맡길 그런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내 예전에 수사 과정에 도움을 주었던 경매사가 떠올랐다. 그는 잠시 숙고한 이후에 말을 꺼냈다.
“경매사 한 분은 알고 있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
“제가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일단 통화 한 번 해보고. 급한 거야?”
“아니요. 시간 될 때 부탁드릴게요.”
한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는 수첩에 그것을 적었다.
성우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꽤 아날로그 방식이라 생각했다. 하긴 오만석 실장님도 비슷한 면이 있기는 했다.
“볼 일은 다 본 것 같은데. 나는 이만 가본다.”
“부모님 입국하시면 연락 드릴게요.”
“그보다 네가 맡긴 일이 먼저 끝날 거야.”
자신 있는 목소리였다.
이제껏 찾지 못했음에도 믿음직했다.
성우는 알겠다며 그를 배웅했다. 그런 그의 등 뒤로 유부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성우는 서둘러 녀석을 붙잡았다. 정말 발정기인지 녀석은 요즘 틈만 나면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 녀석 어딜 도망가려고.”
“캬아~옹!”
녀석은 앙칼지게 울었다.
좀처럼 볼 수 없던 발톱마저 드러냈다.
하지만 성우는 유부를 껴안고 놓지 않았다. 그 사이 한근은 현관을 열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이후에 성우는 유부를 눈높이로 들어 올려 호통쳤다.
“인마! 너만 외롭냐?!”
< 광끼 -8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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