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83 >
인사동 부근의 한 장소.
그곳은 거의 광기에 사로잡혔다.
사람이 술을 먹는 것이 아니었다. 술이 사람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자리의 누구도 그걸 탓하지 않았다. 오늘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 쭉!”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저승에서 온 차사’의 종방연.
그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모두 다시 뭉쳤다.
물론 새로 작품에 들어간 몇 명의 스태프가 빠져야 했지만, 참석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이 찍은 드라마는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누구?”
“저.차.사!”
“우리의 시청률은?”
“26%!!!”
바로 어제의 시청률이었다.
이들은 매주 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썼다.
TCN이 가지고 있던 기존 기록 20.5%를 훨씬 뛰어넘은 수치였다. 압도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방금 방송된 마지막 회차의 시청률은 아직 나오기도 전이었다. 어쩌면 27% 이상도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매번 촬영할 때마다 시청률이 이렇게만 나오면 정말 좋겠다.”
옆에 앉은 지웅이 말했다.
그 말에 성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그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청률이란 곧 성적표였다. 한 번 말아먹기 시작하면 다음 작품부터 당장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스태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대박 난 작품.
그것은 곧 명함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이번 작품을 계기로 여러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 그 범위 안에 자신은 물론이고 하태국 PD와 홍근석 작가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우는 지웅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홍 작가의 빈 잔을 채워주기 위해 술병을 들었다.
“작가님. 제 술도 한 잔 받으시죠.”
“고마워요.”
“다음에 또 작품 쓰시면 저 잊지 마세요.”
“그러고 싶은데 성우 씨 몸값이 이제 엄두가 안 나겠던데요.”
“그래 봐야 지웅이 형이랑 비슷한걸요?”
성우는 지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왜 자신을 끌고 들어가냐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역시 이번 작품을 계기로 한풀 꺾여 가던 인기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하지만 아마 당분간은 힘들 거예요.”
“당분간 쉬시려고요?”
“그건 아니고. 제가 잠시 유학을 가기로 얼마 전에 결정했거든요.”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고쳐 썼다.
그 안경은 홍 작가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존재였다. 차분하게 말하는 것과 달리 그의 말은 파장이 제법 컸다.
주변에 앉은 이들의 이목이 모조리 집중되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이다. 이제 막 그의 이름 석 자가 방송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걸 다 버리고 홀연히 떠난다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정말요?”
“뭐 그렇게 됐어요.”
“어디로 가시게요?”
성우의 말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 모를 웃음을 보이며 묵묵하게 술을 들이켰다. 그런 그를 보며 성우는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했다. 홍근석 작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작가로서 그 능력은 확실히 대단했지만,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는 무척 어려운 타입이었다.
상당히 아쉬웠다.
사실 그의 차기작은 무척 기대되었다.
이미 이번 작품으로 그 실력을 충분히 경험한 성우였다. 확실히 그가 쓴 글은 뭔가 달랐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런 매력이 있다고 할까? 그것은 지웅도 마찬가지로 느꼈던 것 같았다.
“작가님! 어딜 가시려고요. 저랑 또 작품 해야죠!”
“인연이 되면 그럴 기회가 있겠죠.”
“흐으응~ 그러지 마시고 저를 위해 딱 하나만 더 써줘요.”
지웅의 부담스러운 애교.
그것은 여러 사람의 구토를 유발시켰다. 하지만 그의 그런 모습에도 홍 작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돌하르방과 같은 굳건한 부동심이었다. 그때 하태국 PD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동안 다들 고생했어요.”
“감독님도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다음에도 또 같이해요. 감독님~!”
“흐흐 고마워요. 이 드라마의 성공은 제 능력이 아니라 여러분 덕분에 잘 된 것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압니다.”
그는 짧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제 이 자리는 여기서 끝을 내야 했다. 물론 2차로 따로 헤쳐 모일 것이 분명했지만, 공식적인 종방연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그 대부분의 내용은 어느 현장을 가더라도 ‘저승에서 온 차사’를 찍은 멤버라는 프라이드를 가져 달라고 했다.
그의 말에 다들 환호했다.
하 PD는 입에 검지를 갖다 댔다.
다소 잠잠해진 틈을 타서 그는 성우를 향해 손짓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성우 씨. 소감 한번 말해 봐.”
“또요? 아까 했잖아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마지막 인사는 주연이 해야지.”
성우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십 명의 눈은 오롯이 그를 향해 있었다. 이제 정말 끝이라 생각하니 뭉클했다. 그래서인지 일부 스태프는 괜스레 먼 산을 바라봤다. 성우는 그들을 보며 살포시 웃었다. 이게 정말로 끝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여권은 다 준비하셨죠?”
뜬금없이 뱉은 말.
대부분 기대하고 있던 것이었다.
성우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자신이 했던 약속을 되짚어 줬다.
“시청률 20%. 그것을 넘기면?”
“해외여행!”
“맞아요. 고맙게도 TCN과 혜리가 속한 소속사에서 지원을 해주셨죠.”
“야! 우리가 가장 많이 냈어!”
그 말에 오만석이 소리쳤다.
그는 구석에 앉아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우렁찼다. 그런 그의 반응에 다들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아는 사실이었다. 모두 그를 향해 박수를 치자 오 실장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필리핀으로 떠날 준비 되었나요?”
“네!”
“그럼 갑시다!”
성우는 잔을 들고 외쳤다.
그러자 다들 떠나자며 환호했다.
물론 오늘 당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20%는 몇 주 전에 넘긴 탓에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성우는 그 날을 위해 아예 작은 리조트 하나를 빌렸다. 인원이 많은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성우 짱!”
“다음에도 같이 촬영해요~”
“사랑해요~”
성우는 조금 쑥스러웠다.
사실 이것은 혜리와 함께 할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만 잠깐 비추고 사라졌다. 아직 이런 자리가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 덕분에 모든 환호는 성우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아직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저와 혜리는 함께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 함께 가요!”
“주연 없는 여행은 재미없다~”
“가능하면 같이 가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그 역시 그들과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러나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회사에서 세팅한 여행 일정과 알렉스와 잡아 두었던 미팅 날짜가 미묘하게 겹쳤다. 무리해서 다녀온다면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오히려 자신이 없어야 더 재미있게 놀다 올 것이라 여겼다.
“그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성우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왈우 때와 또 다른 아쉬움이 있었다.
매번 이렇게 헤어질 때마다 겪는 것이지만,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완전한 이별은 아니라 생각했다. 활동을 계속 이어가면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이들이었다.
* * *
“냐아옹~”
우다다 뛰어가는 유부.
그것을 보며 성우는 아빠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귀국한 이후에 며칠 만에 원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히려 지금은 전보다 기운이 넘쳐 흘렀다. 종종 녀석을 보며 발정기가 아닌가 오해할 정도였다. 수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하긴 녀석도 이제 5개월 되었나?”
-요즘 밤마다 너무 울어.
“맞아.”
성우는 두부의 말에 동의했다.
요즘 유부 저 녀석은 밤잠이 없어진 건지 밤새 울었다. 그나마 그의 집이 방음이 잘 되는 단독주택이라 다행이었다. 아버지 취미가 악기를 치는 거라 애초에 지을 때부터 꽤 신경을 썼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가 유브로를 할 수 있었던 거는 무사귀 덕분이 아니라 타고난 DNA 때문일 수도 있었다.
-웃기네. 음치였던 네 목소리 기억 안 나?
“노래는 너희 덕인 거 완전 인정.”
-그러고 보니 그 남매 둘 다 요즘 안 보이네.
유일한과 그 동생 유하나.
그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한때 뻔질나게 오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연애설이 터진 이후 잠잠했다. 일한 그 자식이 오지 않으니 동생 하나가 따로 올 일은 없었다. 성우는 작년의 일들이 생각이 난 김에 기타를 꺼냈다.
유일한이 준 선물.
깁슨의 빈티지 썬버스트였다.
성우는 오랜만에 거실에 앉아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모처럼 치는 기타지만, 그의 손가락은 배신하지 않았다. 가장 첫 곡은 유브로의 앨범에 수록했던 연주곡이었다. 원래 일렉 기타로 치는 곡이지만, 이걸로 치니 또 다른 맛이 있었다.
한참 그렇게 몰입하고 있을 무렵.
성우는 두부가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가 연주에 몰입하고 있던 사이에 두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액정에 찍힌 이름을 보고 성우는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깐의 통화 이후에 끊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로 온대?
“응.”
-한달 보름 걸린다며. 벌써 다 찾은 건가?
“나도 모르지.”
방금 전에 전화를 준 남자.
그는 바로 콜롬비아로 납치되기 직전에 만났던 오한근이었다. 이제 겨우 2주도 되지 않았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전에 중간보고를 언급했으니 그거라 생각되었다.
성우는 다시 기타를 잡았다.
어차피 오는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연주곡을 다시 시작하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성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자 오한근이 서 있었다.
“집 앞에 계셨어요?”
“맞아.”
“그럼 그냥 초인종 누르시지.”
“일종의 직업병이자 버릇 같은 거라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성우를 지나쳐 거실로 향했다. 그 특유의 절뚝이는 걸음걸이는 예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물어볼 이유는 없었다.
“커피 하실래요?”
“아니 됐어. 온종일 돌아다니니 커피만 몇 잔째인지 모르겠네. 그냥 생수면 돼.”
“알겠어요. 잠시만요.”
성우는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이 마실 커피와 함께 생수 한 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거실 테이블 위에는 서류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성우가 흘깃 그것을 보자 오한근이 설명해줬다.
“우선 동활 약방과 천산 상회는 다 끝냈어.”
“수고하셨습니다.”
“뭐 거기는 워낙 유명해서 쉬운 편이었지. 여기 가계도는 정리해 놨고 직계 가족의 재산은 추정치에 불과해.”
“그건 어쩔 수 없죠.”
금융 감독원의 직원이 아닌 이상.
남의 통장을 맘대로 뒤질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들이라도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오한근이라도 그것까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수저의 색만 구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야··· 다들 부자네요.”
“뭐 가족 사이에 틀어진 관계도 있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이지.”
“부자가 3대는 못 간다던데 그 말이 틀렸네요.”
“그 말과 반대로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도 있지. 그래도 이 두 집안은 꽤 잘 풀린 경우야.”
하루아침에 폭삭 망하는 집안.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사기꾼 하나가 꾀면 집안 하나를 통째로 말아 먹는 것은 금방이었다. 오한근은 경찰로 근무하며 그런 경우를 꽤 많이 보았다. 대대로 물려받은 선산까지 다 털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성우는 페이지를 넘겨 다른 이의 조사 결과를 봤다.
“김원려 선생님의 후손 중에 납북되신 분이 있네요?”
“맞아. 그분이 외아들이라 이쪽에 다른 후손은 없어.”
“어쩔 수 없죠. 이거는 완료한 것으로 인정할게요.”
“그래 주면 나야 좋지.”
문제는 다른 두 분이었다.
광주 출신의 김재명과 출신지 미상의 박윤군.
두 선생님의 자료는 좀처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아직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오한근은 밝혔다. 성우는 그럴 거라 이미 예상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해합니다. 워낙 오래전의 분들이니 어쩔 수 없죠.”
“뭐 다른 힌트는 없어?”
“글쎄요··· 잠시만요.”
성우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때 보았던 그 환상 속에 힌트가 있을 수 있었다.
자신이 놓친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가 잠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지자 오한근은 집안을 둘러봤다. 요즘 꽤 잘나가는 배우라던데 사는 곳은 평범한 단독 주택이었다. 그나마 남자 혼자 사는 것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러다 그의 시야에 가족사진이 보였다.
젊은 두 부부와 학생복을 입은 아이 한 명.
세 명이 찍은 그 사진은 한눈에 봐도 화목해 보였다.
그러나 가족 가운데 아버지로 보이는 이의 얼굴이 유독 낯이 익었다. 한근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사진 앞으로 향했다. 한동안 그곳에 서서 바라보고 있자 그 남자가 누군지 기억났다.
“유... 철호 교수님?”
< 광끼 -8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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