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80 >
주문이 밀려온다.
그것은 성난 파도와 같았다.
성우는 그때부터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손은 두 개에 불과했다.
그가 혼자 처리할 수 있는 한계는 분명 있었다. 혜정이 있었지만, 그녀 역시 성우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에게 더 많은 주문이 밀려 들어왔다. 그렇게 둘이 바쁜 것 못지않게 서빙도 바빴다. 외부에 깔아 놓은 테이블은 다섯 개에 불과해도 포장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줄은 이쪽으로 줄을 서 주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성우야. 야채 김밥 세 줄이랑 떡갈비 하나 추가.”
성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옆에서 희선 누나가 나가야 할 것들의 수를 정리해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석쇠가 문제였다. 꽤 많이 준비한 것 같았지만, 이 정도의 주문을 커버할 수준은 아니었다.
“형! 석쇠 다 떨어져 가요.”
“그럼 내가 닦아올게.”
희선이 나섰다.
하지만 그녀를 지웅이 가로막았다.
그녀가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이곳에서는 커피를 탈 일이 없어 오히려 조금 섭섭한 그였다.
“이건 나한테 맡겨.”
“제가 해도 되는 데요.”
“에헤이~ 원래 밖에 나와서는 남자가 다 하는 거야.”
“호호. 알겠어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지웅은 그걸 들고 냅다 뛰었다.
곰 같은 덩치인데도 제법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카메라맨과 스태프 몇 명이 같이 달렸다. 그가 석쇠를 닦는 장면을 놓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성우는 불 위에 올린 석쇠에서 눈을 떼지 않고 혜정에게 물었다.
“누나. 김밥 많이 밀렸죠?”
“열일곱 줄.”
“이거만 굽고 저도 붙을게요.”
“대환영!”
석쇠가 다시 준비될 동안.
밀린 김밥의 진도를 빼기로 했다.
성우 역시 김밥을 마는 것은 할 수 있었다.
혜정에 비하면 아직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그래도 옆구리가 터질 수준은 아니었다.
“끼야~ 고양이 너무 예뻐!”
“여기 고양이에요?”
“저랑 같이 사는 고양이 맞아요.”
“이 친구 이름은 뭐예요?”
“유부요.”
손님 접대는 유부의 몫이었다.
가게 바로 앞에서 녀석은 손님을 불러 모았다. 사실 녀석이 가게에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위생 문제 때문에 홀이나 주방에 들어설 수 없었지만, 이곳은 달랐다.
“냐아옹~!”
관찰 카메라를 달기 위해 올린 기둥.
그것은 원래의 용도와 달리 녀석의 캣타워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사용하라고 발판까지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 위에서 유부는 하품하며 엎드려 있었다. 그 모습을 배경으로 손님들은 인증 사진을 찍느라 바빴
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한국과 달리 이곳에서는 섣불리 손을 뻗는 이는 없었다. 아마 그런 일이 있었다면 누군가는 녀석의 발톱에 응징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와! 유부다!”
“이 고양이가 뭔데 그렇게 좋아해?”
“너 저승에서 온 차사 못 봤어?”
“나 지금 4개월째 여행 중이잖아. 뭔데 그래?”
“요즘 한국에서 가장 핫한 고양이.”
한국인 손님이었다.
이 먼 땅의 작은 마을에서 만나는 인연.
그것은 분명 작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촬영을 하는 중간에 그들과 이야기할 틈도 없었다. 그래도 성우의 입가에 미소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고양이를 좋아해 주는데 그 어느 집사라도 싫어할 리 없었다.
“띡똑.”
“띡똑···”
“맛있어져라!”
둘은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연달아 김밥을 만들어냈다. 같은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두 명의 손놀림은 현란했고 그 싱크로율도 제법 높았다.
김을 깔아 그 위에 밥을 넓게 편다.
재료를 올리고 천천히 말아 칼로 썬다.
오픈된 주방.
그곳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대단했다.
오죽하면 둘이 김밥 한 줄을 완성할 때마다 박수가 나왔다. 확실히 외국인들이 봤을 때 순식간에 김밥이 완성되는 것이 신기할 것이 분명했다.
뭐에 홀린 듯한 두 사람이었다.
그 콧노래를 제외하면 대화조차 없었다.
그것을 본 주 PD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이건 유식당이 아니라 체험 삶의 현장이잖아?”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작가들이 소리 죽여 웃었다.
확실히 그의 느낌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다른 날 분량을 상당히 뽑았기에 큰 우려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용했다.
“얼마나 더 버틸까요?”
메인 작가가 물었다.
그 질문에 호민은 답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본 성우의 성격상 중간에 접는 거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재료였다.
“지금까지 얼마나 나갔어?”
“김밥이 40줄에 메인 메뉴는 40접시 정도요.”
“밥이 없어서 얼마 못 가겠는데.”
“아니요. 방금 지웅 씨가 전기밥솥에 새로 앉혔다고 연락 왔어요.”
그 말에 다들 신음소리를 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우를 비롯해 네 명 모두 열의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애초에 이럴 작정이었는지 미리 쌀도 불려 놓았다고 했다.
“우리 전에 시리즈가 몇 편이었지?”
“시즌 2는 코멘터리까지 11편이었죠.”
“이번에는 두어 편 정도는 더 나오겠는데.”
“설마 예정되어 있는 편성을 바꾸시게요?”
메인 작가의 물음에 호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확답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내부의 반응을 보고 결정할 문제였다. 하지만 분량은 확실히 그 정도는 되었다. 편집하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너무 아쉬운 장면이 많을 것 같았다. 벌써 그의 귀에는 편집 PD의 불평이 들리는 것 같았다.
특히 구혜정이 변수였다..
이번에 성우 못지않게 분량이 나올 것 같았다.
실질적인 막내는 성우였지만,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그가 아닌 혜정의 몫이었다. 때로는 당차고 때로는 엉뚱한 매력과 함께 그 묘한 주문을 외울 때는 귀엽기도 했다. 마치 팔색조 같은 영혼이었다.
처음 그녀를 발탁했을 때.
그를 반대하던 이들도 내부에 분명 있었다.
여러 기획사에서 자신의 소속 배우를 넣어달라는 것도 물리쳤다. 뭐 최종 후보는 그녀가 아닌 손혜리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눈여겨본 그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내고 있었다.
‘나중에 드라마 쪽에서 제법 캐스팅 들어가겠는데?’
TCN의 매력.
예능과 드라마의 경계가 흐리다는 것이었다.
그걸 단점이라 여기는 이도 있지만, 확실히 배우나 팬의 입장에서는 좋아할 일이었다. 성우도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혜정은 김밥을 마는 데 집중했다.
이 순간은 촬영이란 것도 모두 잊은 것 같았다. 물론 성우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 밀린 주문을 모두 쳐낸 순간.
성우와 혜정은 동시에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무사히 고비를 넘긴 것에 대한 자축이었다.
“앗싸!”
“예스~!”
하지만 그 여유도 잠시뿐이었다.
오히려 8시가 다 되어가자 더 많은 사람이 광장으로 나왔다. 그 모습에 혜정은 사색이 되었다. 확실히 성수기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 사이 재빨리 석쇠를 닦고 돌아온 지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심스레 다가와 말했다.
“밥통에 전원을 슬쩍 끌까?”
*
와장창.
그릇이 깨지는 소리.
그 소리에 성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시계를 보고 다시 베개 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아직 일어날 때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그대로 놔둘 유부가 아니었다.
녀석은 베개 사이를 파고들어 성우의 뒤통수에 철썩 달라붙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결국, 머리통에 노크하는 녀석의 발에 의해 그는 일어나야 했다.
“배고파서 그래?”
“냐아옹.”
성우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곳에는 혜정이 있었다.
그녀는 깨진 접시를 치우다 성우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물었다.
“더 자지 왜 일어났어? 혹시 그릇 깨지는 소리 때문에 깬 거야?”
“아뇨. 유부가 배고프다고 난리 쳐서요.”
“그렇구나.”
“누나는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요?”
아침 7시.
아직 이른 시간이기는 했다.
보통 9시에 일어나 장사할 준비를 하는 그들이었다. 그의 질문에 혜정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뭔가를 꺼내 놓았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제법 두툼한 고깃덩이였다.
성우는 그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고기를 먹을 건가 싶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가 평소 만드는 떡갈비에 쓰던 것은 아니었다.
“이거로 수육 좀 만들어 보려고.”
“아침부터요?”
“호호. 지금 먹을 거는 아니고. 이따 저녁에 그분 초대하면 내놓을까 싶어서 연습하려고.”
“그렇구나.”
성우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늘만 지나면 벌써 유식당도 끝이었다.
물론 끝날 때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가장 마지막인 오늘 저녁 드디어 할아버지를 초대하기 때문이었다.
“이상하진 않겠지?”
“보쌈 종류는 싫어하는 사람 못 본 것 같아요.”
“하긴 무난한 편이지.”
“그래도 쉬운 음식은 아니죠.”
그 말에 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핏물을 빼고 잡내를 제거하는 것이 반 이상은 되었다. 그것에서 실패하면 모두 헛수고가 된다. 그녀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때문이기도 했다. 성우는 그녀가 꺼내 놓은 재료를 쓰윽 살폈다.
“된장은 있네요?”
“마침 식재료 가운데 섞여 있더라. 완전 다행이지 뭐야.”
“혹시 커피 가루 넣어 봤어요?”
“커피?”
혜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성우는 차분히 설명했다.
된장도 좋지만, 커피를 넣는 것도 잡내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더구나 커피의 고장이니 그런 이국적인 느낌도 좋을 것 같았다. 성우의 의견에 그녀는 동조했다.
“그런데 이런 거는 어떻게 알아? 한식 조리사 자격증이 있는 나도 모르는데.”
“예전에 어느 TV프로에서 나왔거든요.”
“기억력도 참 좋다.”
“잊으셨나 본데 저 1대300 우승자이거든요!”
성우는 슬쩍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모습에 혜정은 재수 없다며 웃으며 맞대응을 했다. 그런 둘을 잠시 멍하니 보던 유부는 앙칼지게 울었다. 그리고는 성우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마치 내 밥은 어쩌고 둘이 꽁냥(?)거리고 있냐며 으름장을 놓는 것 같았다.
“아차! 얘 밥 주는 거 까먹었네요.”
“유부 밥부터 챙겨 줘.”
유부의 밥을 챙겨준 이후.
둘은 수육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어느 정도 고기가 익을 무렵에 그 냄새 때문인지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성우야. 아침부터 고기는 너무한 거 아냐?”
“연습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냄새 때문에 배고파서 깼다.”
“뭐라도 조금 만들어 드릴까요? 김치볶음밥은 어때요?”
“아니 그건 됐고 연습했으면 맛을 봐야지.”
지웅은 수육에 눈독을 들였다.
그것은 희선도 마찬가지였는지 벌써 먹을 자세가 준비되어 있었다. 성우는 그것을 보고 잘됐다 싶었다. 어차피 맛을 보고 평가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놓을 수는 없었다.
“식을 때까지 기다려요.”
“왜?”
“지금 썰면 다 으스러져요. 커피 한 잔 어때요?”
“그건 나한테 맡겨줘.”
지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커피를 갈아 내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바리스타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니 능숙해 보였다. 주방에 가득했던 고기 삶는 냄새는 곧 커피 향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커피를 각자에게 건넨 이후에 지웅이 입을 뗐다.
“오늘 저녁에 다들 한잔해야지?”
“형 잊으셨나 본데. 저희 매일 저녁마다 마시고 있거든요.”
“그건 정말 간단하게 맥주 한 캔이 전부였잖아.”
“도대체 얼마나 드시려고요?”
희선의 물음에 지웅은 그저 웃었다.
그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성우는 대충 예상이 되었다. 그와 몇 번 술자리를 하진 않았지만, 주량은 얼추 알고 있었다. 그는 꽤 말술에 가까웠다.
“너 ‘아구아르디엔떼’라고 알아?”
“그게 뭔데요?”
“사탕수수로 만든 보드카인데 콜롬비아의 전통주라고 다나가 추천해주더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냉장고로 걸어가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냈다. 하얀 투명 병에 담긴 그것은 한눈에 봐도 도수가 높아 보였다. 잠시 그 이름을 해석해본 성우는 질겁했다. 그 뜻이 ‘불타는 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패스요.”
“다른 두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더구나 너는 내일 돌아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 소중한 하루를 술병이 나서 허비하고 싶진 않네요.”
“적당히 마시면 되지.”
성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물론 그가 술을 강권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마실 때마다 성우는 폭주했다. 그나마 자신의 주량이 센 편인데도 그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성우는 수육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김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그는 천천히 수육을 썰기 시작했다.
1cm 남짓 되는 두께.
아니 그것보다 살짝 얇은 수준이었다.
그가 먹기 좋게 고기를 썰자 혜정은 쌈장 서둘러 만들었다. 쌈을 싸 먹을 채소가 없는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김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성우가 썰어낸 즉시 그것을 집어 든 지웅과 희선은 맛을 보았다.
“오! 좋아.”
“나도 맛있어.”
둘의 반응에 혜정은 웃었다.
성우도 맛을 보고 내심 만족했다.
오늘 저녁에 내놓아도 충분히 통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시작도 못 한 오늘의 장사와 촬영은 뒷전이었다. 그것보다 할아버지가 만족할 그런 음식을 내보내고 싶었다.
‘과연 입맛에 맞을까?’
< 광끼 -80 > 끝
ⓒ l살별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