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79 >
밤 늦은 시각.
갑작스러운 캐스팅 때문에 성우는 살짝 설렜다.
그 때문인지 누워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어린 시절 소풍 가기 전날의 기분과 살짝 흡사했다.
마벨의 슈퍼 히어로 영화.
그건 그 역시 좋아하는 것이었다.
온갖 능력으로 악을 처치하는 내용은 뻔했다. 그러나 화려한 CG와 캐릭터마다 가진 스토리 덕분에 어른들이 더 좋아했다. 참고로 성우의 열쇠고리 역시 캡틴의 방패 모양이었다.
성우는 침대에 누워 그걸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유부가 쪼르르 달려와 그의 손을 덮쳤다. 자신과 놀아달라는 표현이었다. 그런 녀석을 보고 성우는 슬쩍 안았다. 하지만 녀석의 우다다는 끝나지 않은 듯 했다. 유부는 몸을 비틀며 그의 품을 빠져나가 또 달리기 시작했다.
“기운이 아주 남아도네.”
그게 솔직히 부러웠다.
그 반만 자신에게 나눠줬으면 했다.
음식을 만드는 게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던 그였다. 확실히 그냥 혼자 먹으려고 하던 것과 장사하는 것은 차이가 컸다. 그래도 빈 접시가 들어올 때면 기분이 한없이 좋아졌다. 이런 맛에 요리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몇 접시나 남았어?’
-500개 조금 넘어. 잘하면 이곳에서 끝내겠어.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부가 말한 대로 이곳에서 진도를 꽤 뽑아냈다.
만약 김밥도 쳐줬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밥은 그의 손을 하나도 거치지 않고 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인기는 제법 좋았다. 그래서 혜정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운 메뉴도 추가했다.
-야채 김밥
-참치마요 김밥
-불고기 김밥
그 세 가지만 해도 할 일은 꽤 늘었다.
그래도 한식이 그들에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었다. 아마 이번에 유식당도 꽤 시청률이 나올 것 같았다. 그제야 성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 * *
타그닥! 타그닥!
발걸음에 맞춰 출렁이는 움직임.
그것을 느끼며 성우는 리듬을 맞췄다.
성우는 현재 말을 타고 있었다.
생전 처음 타는 것이지만, 그 느낌은 무척 좋았다. 아니 처음이라고 하기 조금 애매했다. 그의 몸에는 위례검을 알려준 사택천의 경험이 녹아 있었다. 과거 장군이던 그가 말을 못 탈리는 없었다.
오히려 상쾌했다.
종아리에 느껴지는 말의 근육은 탄탄했다.
마음 같아서는 넓은 평야를 이 말과 함께 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장소에서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도 성우는 꽤 만족했다.
‘이 맛에 승마를 하는구나.’
-어이쿠! 말 위가 이렇게 높았어?
‘뭐야. 두부 너 조선 사람이 말도 안 타봤어?’
-당연하지. 몰락한 가문의 선비가 말 따위를 탈 여력은 없다고.
두부의 목소리에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그 말에 성우는 뭐가 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뒤에서 들리는 비명에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꺄아악!”
혜정의 하이톤 목소리.
그것은 말을 타면서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었다. 말을 타자고 꼬득인 것은 그가 아니라 바로 누나였다.
“그냥 내려서 걸을까요?”
“조금만 기다려. 아직 카메라 감독님이 장면을 다 못 따셨데.”
“그럼 조금만 힘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놀러 온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성우는 천천히 말을 몰며 주변 풍경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보이는 그것은 무척 이질적이었다. 초록 벌판 위에 야자수는 시원스럽게 뻗어 있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서 아마 가장 긴 야자수일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우는 그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어딜가나 허풍은 있기는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 높이가 작다 할 수는 없었다. 야자수 아래에서 고개를 들면 그 끝이 너무나 멀리 있었다.
그때 성우의 뒤로 혜정이 다가왔다.
이미 그녀는 말에서 내려 걷고 있었다.
어차피 종점에 거의 다 왔기에 성우도 아쉬움 없이 내렸다. 그러자 현지인이 둘의 말을 몰고 사라졌다.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커피 농장을 갈걸.”
“뭐 거기도 자전거 타고 간다고 하던데요.”
“그래?”
그래도 혜정은 후회는 없었다.
그녀 역시 성우가 느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우거진 수풀 사이를 걷는 트레킹 가운데 만난 쉼터. 그곳에서 여러 종류의 벌새도 본 그녀였다. 사실 이곳에 오는 것도 경쟁이 치열했다.
성우를 제외한 세 명.
그들 모두 이곳에 오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뚫고 낙점된 것은 바로 혜정이었다. 성우가 그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와 함께 하는 것이 더 분량 나올 거라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저기 차 보이네요.”
성우는 멀리 보이는 차를 가리켰다.
그러자 혜정은 벌써 끝났다며 아쉬워했다.
그것은 성우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반나절의 자유 시간은 이제 끝이었다. 둘 다 다시 음식에 매진해야 했다. 특히 주방 멤버는 거의 밖을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더 아쉬웠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은 아니라던가?
잠시 후.
성우는 환호성을 질렀다.
시원하게 달리는 지프차 뒤에 매달린 그였다.
정확하게는 뒤편에 설치된 발판을 딛고 서 있었다. 볼을 스치는 바람은 모처럼 자유를 느끼게 해줬다. 그 순간 성우는 촬영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안에서 혜정이 그의 무릎을 톡톡 쳤다.
“뭐야. 재미있어?”
“당연하죠. 언제 이런 경험을 해봐요.”
“나도 나갈까?”
“위험해요. 그냥 안에 계세요.”
성우는 미소 지었다.
멀리 산등성이에 커피 농장들이 보였다.
촬영하느라 바빠 이런 것을 못 보고 있었다니 아쉬웠다. 그래도 어느 정도 그 아쉬움은 풀린 것 같았다.
하지만, 지프에서 내린 이후.
둘은 그제야 피곤이 확 밀려왔다.
아침 8시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늘어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바로 어제 담당 PD와 논의한 바대로 오늘 저녁에는 광장으로 나서야 했다.
성우는 살렌토로 돌아온 즉시.
바로 가게로 향해 그 준비를 했다.
오늘 저녁에 어느 정도 팔릴지 몰라 재료는 충분히 준비하기로 했다.
“고기 다지는 거는 제가 할 테니 김밥 속 재료 좀 부탁할게요.”
“네! 쉐프.”
“누나 부끄러우니 그거 하지 마요. 제가 무슨 쉐프에요.”
“왜? 재미있잖아.”
혜정은 확실히 ‘리조또’의 덕후다웠다.
벌써 10년 전에 방송된 그 드라마는 성우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의 여주인공이 입에 달고 다니던 것이 바로 ‘네! 쉐프’였다. 지금은 주방에 깊게 전염되어 있는 그 요상한 주문도 거기서 파생된 것이었다.
만약 누나가 그곳에 출연했다면?
그러면 어떤 드라마가 나왔을지 궁금했다. 성우가 봤을 때 혜정의 잠재력은 상당히 좋았다. 물론 까마득한 후배인 그가 그런 이야기를 건방지게 면전에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누나는 어떤 역이 가장 탐나요?”
성우는 고기를 다지며 물었다.
칼에 제법 속도가 붙은 덕에 꽤 시끄러운 타격음이 울렸다. 그러나 혜정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이것도 며칠 반복되니 슬슬 적응되고 있었다.
“어떤 거든 가릴 처지는 아니지. 나야 뭐든 기회만 있으면 좋겠어.”
“금방 그런 날이 올 거예요.”
“과연 그럴까? 벌써 연극을 시작한 지 7년째야. 벌써 이 누나 나이가 20대 후반이란다.”
“왜요. 당장 희선 누나만 봐도 서른 넘어서 떴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다.”
성우는 그 말에 뜨끔했다.
사실 그가 무명 시절의 서러움은 잘 몰랐다.
연극 무대에 오르며 배고프던 시절도 분명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몇 개월에 불과했다. 감히 수년에서 십여 년 이상 고난의 길을 걷는 배우에게 내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내 소원은 단 하나야.”
“뭔데요?”
“우리 엄마 앞에서 떳떳한 딸이 되고 싶은 거.”
“뭘 어떻게 하면 떳떳한데요?”
“글쎄. 어느 정도면 인정해주시려나.”
성우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이제 귀국이 코앞으로 다가온 부모님이 생각났다. 정확하게는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두 분을 뵌 것이 거의 4년 전이었다.
누군가는 무정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신을 키우느라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원망 같은 것은 없었다. 사실 그가 무주귀에 씌워 고생할 무렵에 두 분이 쓴 재산만 집 한 채 정도라 들었다.
오히려 미안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때 적막을 깨고 혜정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김밥 준비 완료!”
“저도 떡갈비 손질 다 됐어요.”
“우리 진짜 식당 열어도 되겠다. 이름도 아예 ‘작두’로 지을까?”
“그게 뭐예요. 크큭.”
성우는 모처럼 크게 웃었다.
누나의 엉뚱한 모습은 언제봐도 재미있었다.
나중에라도 꼭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그녀뿐만 아니라 작두의 모든 단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왈우에 같이 나왔던 철민이 형.
그는 요즘 제법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의 출연을 계기로 여러 영화에 출연하고 있었다. 대부분 비중이 작은 배역이었지만, 들리는 소문은 무척 좋았다.
“자! 다음에는 뭘 할까?”
“세팅은 제작진이 해준다고 했으니 조금 쉬어요.”
“그럴까? 아고고... 안 그래도 다리 아파서 미치겠다.”
혜정은 다리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말을 탄 후유증이 제법 큰 것 같았다.
성우는 그런 그녀에게 의자를 건네며 앉으라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받아서 놓아둘 뿐 앉지는 않았다.
“그 참전 용사 할아버지 초대하는 거 그건 언제야?”
“마지막 날이요.”
“그럼 내일모레인가?”
“맞아요.”
“그런데 뭘 대접할지 정했어?’
혜정에 물음에 성우는 답하지 못했다.
아직 뭘 해야 될지 확정한 것은 없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유식당의 메뉴를 모두 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좀 더 의미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부족한 재료와 요리실력.
둘 다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재료가 가장 문제였다. 그런 고민을 털어놓자 혜정은 웃으며 답했다.
“스태프 가방을 싹 다 털어.”
“네?”
“어차피 마지막 날이라며. 아마 적지 않게 들어 있을걸?”
하긴 그럴 것 같기는 했다.
어제는 누군가 만든 떡볶이와 파김치도 목격했다. 물론 그 양은 매우 적었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이 먼 땅까지 그런 것을 챙겨오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일단 봐서요. 첫 메뉴는 수제비를 해볼까 싶어요.”
“도대체 몇 가지나 하려고?”
“양은 적게 그리고 종류는 많이요. 어떤 거를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사실 이것도 무사귀의 조언을 받은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등겨 수제비라고 보리를 빻고 남은 가루로 만든 것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재료도 문제고 일부러 그걸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마 밀가루는 쉽게 구할 수 있기에 다행이었다.
“하긴 국물 낼 재료는 다 있으니...”
“그리고 두 번째는 호박죽이요. 씹기 어려워하실지 몰라서요.”
“오~ 의외로 섬세한데?”
“나머지는 유식당 메뉴로 내놓으려고요. 물론 떡갈비는 완전 얇게.”
하지만 그런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태프들이 광장 촬영을 준비하기 위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6시 전에는 오픈해야 하니 서둘러야 했다.
2시간 후.
성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들이 저녁 장사의 시작을 알리자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낮 장사를 할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이 마을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처음 알았다. 다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낮에는 마을 밖으로 다들 나가니 그 정도였다는 것이었다.
“우와···”
“우리 죽었다.”
“이게 몇 명이야?”
다들 사색이 되었다.
그건 성우도 마찬가지였다.
대충 봐도 그들 식당 앞에 줄지어 사람이 서 있었다. 특히 김밥을 맡은 혜정은 손을 바르르 떨었다. 대다수의 주문이 그녀에게 몰렸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저녁 장사에서는 과일은 제외한 것이 다행이었다.
“김밥 파업 안 될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성우는 불현듯 이 상황에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이런 일들이 평범하다 여겨질 정도의 그런 익숙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무사귀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당황하기보다 상황을 통제하려 애썼다. 그건 물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래서일까? 유식당의 다른 멤버 역시 점차 정신을 차렸다.
성우는 지웅이 적어준 쪽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당차게 읽기 시작했다. 유식당의 네 번째 밤에 들어온 첫 주문이었다.
“1번 테이블! 떡갈비 하나. 야김(야채김밥) 둘.”
“네! 세프”
< 광끼 -7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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