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78 >
3일 전...
알렉스 모이어.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바로 배우 하나를 섭외해 달라는 것이었다.
알렉스의 직업은 할리우드에서 제법 명성 높은 캐스팅 디렉터였다. 특히 수년 전에 마벨 스튜디오과 협약을 맺은 것이 컸다. 그 이후부터 그의 주가는 수직 상승했다.
물론 그 자리까지 쉽지는 않았다.
수많은 캐스팅 디렉터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캐나다에서 제법 늦은 나이에 이민 온 그에게 성공은 무척이나 절실한 것이었다.
마벨 스튜디오.
현재 그는 그곳에서 반쯤 직원같이 일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일종의 로비스트와 비슷했다. 제작사와 배우의 중간에 서는 조율자였다. 그들이 서로 원하는 배우와 작품을 연결해주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그리고 방금 오더를 넣은 곳이 바로 그 마벨 스튜디오였다.
“아니 갑자기 한국인 배우는 왜?”
-꼭 한국인이 아니라도 괜찮아.
“아직도 옛날처럼 어리숙한 한국어가 통할 거 같아? 너희가 한국에서 얻는 수익이 얼마인지 알기는 해?”
-대부분 영어로 대화하는데 뭐 어때.
제프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일하면서 살아남는 걸까?
알렉스는 그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마벨 스튜디오라는 그 거대한 조직 안에서 제프는 암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프로 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이 자식의 전임자였던 가브리엘이 그리웠다. 그는 이름 그대로 천사나 다름없었다.
“3달. 이게 최선이야.”
-안돼! 5월 중에 잠깐이지만, 지금 촬영 중인 영화에 잠시라도 넣어야 한다니까.
“미친···.”
-뭐라고? 분명히 나는 경고했어.
새로운 영웅이 필요했다.
그것이 마벨의 새로운 숙제였다.
기존에 한 시대를 주름잡던 캐릭터는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우선은 계약 문제가 가장 컸다. 이미 대표적인 배우는 대부분 그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착된 배우의 캐릭터 이미지.
그걸 이제 와 다른 배우가 그 영웅을 연기하기는 어려웠다. 어느 정도 잊힐 그런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마벨 스튜디오는 아예 판을 새로 짜기로 했다. 어차피 그들이 만들어 놓은 영웅은 넘쳐났다. 지금 제프가 찾는 배우가 그 시작이 될 예정이었다.
-못하겠다는 말은 아니지?
“일단 알겠으니 끊어. 한국행 비행기 표 예약해야 해.”
-하하. 좋은 소식 기다릴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휴가가 끝날 줄은 생각도 못 한 그였다. 그는 당장 업무 모드로 바뀌었다. 노트북을 열어 곧바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가 들어간 곳은 바로 그와 같은 디렉터들의 오아시스라 할 수 있는 캐스트넷이었다. 그곳은 할리우드를 비롯해 전 세계의 주요 배우들의 DB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 덕분에 그는 무척 편해졌다.
그토록 수많은 서류와 사진에서 해방되었다.
물론 주요 배우는 따로 관리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외부에서 일을 볼 때는 어쩔 수 없었다.
“스티븐은 힘들겠지...”
알렉스는 잠시 고민했다.
노트북 화면에는 ‘스티븐 한’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그는 한국계 배우 가운데 가장 유명했다. 전작 드라마에서 시즌 7까지 맹활약을 했던 그는 어느덧 소년에서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애매했다.
그가 원하는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았다.
예전에 원작 만화를 수십 번도 더 봤기에 그것은 확실했다. 이번에는 어떤 것보다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나야 했다.
캐스팅 디렉터로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캐릭터 분석한 것을 토대로 그것을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었다. 그게 가장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DB를 아무리 뒤져도 딱히 마땅한 배우가 없었다.
확실히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의 배우는 무척 귀했다. 특히 한국은 그 가운데서 가장 심한 편이었다.
“하아~ 모르겠다. 밥이라도 먹고 하자.”
그는 노트북을 덮고 집을 나섰다.
헐렁한 옷을 입고 거리를 걷는 모습은 한량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지금의 이 모습이 너무 좋았다. 아마 당장 내일 이 시각이 되면 이런 모습은 싹 사라질 것이다. 다시 할리우드라는 잔혹한 정글 속으로 돌아가야 했다.
“저기는 뭐 하는 거야?”
알렉스의 시선을 끄는 곳.
그곳에는 오늘따라 동양인이 제법 많았다.
은밀하게 설치된 카메라는 물론이고 멀리 드론도 날아다니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촬영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공간을 뛰어넘어 그가 맡은 그 냄새는 독특했다.
고기를 굽는 냄새 같지만, 보통 바비큐를 할 때 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체 모를 그 냄새는 그의 허기짐을 재차 일깨워줬다. 알렉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 가게 앞으로 향했다.
‘이 요상한 식당은 뭐지?’
일단 원래부터 있던 곳은 아니었다.
그는 3주째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살렌토가 워낙 작은 마을이라 확실했다. 입구 앞에 세워놓은 메뉴를 슬쩍 보니 한국 식당이었다. 그것을 보자 예전에 한인 타운에서 먹었던 바비큐가 생각났다.
메뉴를 슬쩍 넘겨봤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고기 메뉴가 있는 것은 확인했지만, 사진이 따로 없어 조금 애매했다. 그 순간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를 본 알렉스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번에 찾는 히어로 ‘아크로’.
그 캐릭터가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 데리고 가도 제작진이 오케이 할 것으로 보였다. 짧은 머리며 다소 카리스마 있어 보이는 얼굴도 한몫을 했다.
“안녕하세요.”
알렉스는 그와 잠깐 대화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그는 배우였다. 디렉터로 살면서 발달한 특유의 직감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말이 통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그는 이 배우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식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어서 그가 연기했던 작품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식당 밖으로 나서는 그의 손에는 메모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스태프에게 물어 그의 이름을 적어온 것이다.
“유성우라···’
* * *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알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지난 3일 동안 완벽하게 그를 홀린 한국인이 서 있었다. 성우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알렉스는 웃으며 말했다.
“앞치마도 잘 어울리네요.”
“빨간 팬티는 안 어울리고요?”
“하하. 그건 저희 쪽에 판권이 없어서 힘들 것 같네요.”
둘은 자리를 옮겼다.
그래 봐야 촬영장 바로 앞의 카페였다.
일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카메라 앞은 조금 애매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라는 게 정확히 뭐죠?”
“마벨 영화에 캐스팅하고 싶습니다.”
성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훅 들어올지 몰랐던 탓이다. 적어도 시나리오라도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그는 멋쩍게 웃었다.
“아직 시나리오를 따로 받은 게 없어서요.”
“네?”
알렉스는 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가 출연할 영화는 마벨 스튜디오의 한 캐릭터이며 자신이 캐스팅 디렉터라는 것도 포함되었다. 사실 만화책을 보았다면 ‘아크로’라는 캐릭터의 이름만 들어도 알 것이다. 한국인 캐릭터지만, 은근히 인기가 많은 히어로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성우는 그것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 만화는 전혀 안 봐서 잘 모르겠네요.”
“아쉽네요. 그걸 봤다면 금방 이해하셨을 텐데요.”
“사실 마벨 코믹이 한국에서는 영화로만 유명하죠.”
성우는 핵심을 짚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동의했다.
그가 알기로도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런데 뭘 보고 저를 섭외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여기서 요리 밖에 안 했는데요.”
“나중에 보면 아시겠지만, 성우 씨와 딱 맞는 캐릭터이기 때문이죠.”
새로운 영웅 ’아크로’
그는 육체적인 능력이 강했다.
어린 시절 체조선수 출신인 데다가 한국의 특수 부대원이라는 설정 때문이었다. 솔직히 알렉스는 왈우에 나온 성우를 보고 확신을 했다. 이 캐릭터는 그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을 갈 필요도 없었다.
제아무리 뒤져도 이보다 더 좋은 배우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군대까지 다녀왔다니 희소식이었다. 알렉스는 자신 있게 성우에게 그가 출연한 영화는 다 봤다는 이야기를 강조했다. 그래 봐야 영화는 단 한 편에 불과했기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행운이죠. 여기서 성우 씨를 보다니!”
“솔직히 안 믿기네요.”
“그렇죠. 다들 마벨과 계약하기 전에 그런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
알렉스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에 대해 믿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입고 다니던 옷차림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영낙 없는 동네 아저씨였기 때문이었다. 뭐 지금도 크게 차이는 없었다. 이번에 휴가를 오면서 정장은 아예 안 가져왔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할까요? 제가 마벨 스튜디오로 초대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요즘 조금 바빠서요.”
“드라마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지인의 말로는 엄청 인기가 좋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는 아니고요.”
알렉스는 잠시 고민이 되었다.
만약 할리우드의 배우라면 편했을 것이다.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명함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배우 정도는 자신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물론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그가 들인 노력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온갖 파티와 바자회.
그곳에 그는 가능한 참석 했다.
캐스팅 디렉터가 인맥을 빼면 시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성우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어갔다.
“저는 소속사가 있습니다. 이거를 혼자 맘대로 정할 수는 없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 그 논의를 하기 위해 제가 언제쯤 한국으로 가면 될까요?”
“이번 촬영이 다음 주까지니...”
“보름 정도 후면 괜찮을까요?”
성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종방영이 다가오고 있지만, 잠시 정도 시간은 될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주의할 점을 말해줬다.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는 비밀 유지 아시죠?”
“물론이죠.”
“하하하! 좋습니다. 그럼 저는 그때 찾아뵙겠습니다.”
알렉스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그의 모습에 성우는 매력을 느꼈다. 어차피 이곳에서 아무리 이야기를 나눠도 나올 결과는 없었는데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촬영 잘 마무리하시고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떠났다.
알렉스의 뒷모습을 보며 성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가 말한 ‘아크로’라는 캐릭터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검색창에 그 이름을 치니 여러 이미지가 쫙 나왔다.
-하하하! 너랑 붕어빵인데?
‘한국 사람의 98%는 이렇게 생겼을걸.’
-아냐. 내기해 볼래?
‘됐어.’
성우는 그럴 틈이 없었다.
당장 내일 요리할 재료의 손질을 해야 했다.
이미 유식당은 어느덧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하루에 그와 혜정이 만드는 요리가 120접시는 넘어갔다. 확실히 예전 시리즈보다 촬영 분량은 넘쳐났다. 반면에 몸이 고된 것도 그 배는 되었다. 성우는 주방으로 복귀하기 전에 슬쩍 주호민 PD를 향해 손짓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저 사람이랑 무슨 대화를 한 거야?”
“별거 아니었어요. 나중에 이야기해드릴게요.”
“만약 중요한 거면 우리 TCN을 통해서 발표해주는 센스~ 알지?”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은 정말 뼛속까지 TCN맨이었다.
나중에 사장까지 오를 생각인지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를 부른 목적을 떠올리고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저희 너무 중노동인 거 아시죠? 나가는 접시도 많고 영업시간도 전에 비해 길고요.”
“물론 엄~~청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그럼 내일 낮 영업은 접죠.”
그 말에 주호민은 충격을 받았다.
설마 반나절을 통째로 비워달라고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성우의 말에 그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주변 경치도 촬영해야 하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다나한테 물어보니 코코라 밸리 트레킹 코스를 물어보니 반나절 정도라 하던데요.”
“그럼 저녁에 광장에서 영업하는 거는 어쩌고?”
“그건 예정대로 해야죠.”
“가능하겠어?”
사실 쉽지 않은 스케줄이었다.
트레킹을 다녀와서 곧바로 저녁 장사를 준비해야 했다. 특히 이번에는 식당이 아닌 광장이었다. 애써 익혔던 주방의 환경이 완벽히 바뀐다. 하지만 성우도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녁마다 살렌토의 광장은 포차 거리로 바뀌는데 그게 또 은근히 매력적이었다.
“어쩔 수 없죠.”
“그런데 트레킹은 혼자 갈 거야?”
“아뇨. 일단 의견 물어보고 정하게요.”
“그럼 두 명씩 나누자. 커피 농장도 촬영해야 하거든.”
그 말에 성우는 잠시 고민되었다.
근처 커피 농장을 가는 것도 무척 탐났기 때문이었다. 실제 콜롬비아의 커피가 재배, 생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결국 성우는 코코아 밸리를 선택했다. 바로 어제 본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길게 뻗은 야자수.
녹색 초원에 총총히 박혀있는 이국적인 풍경.
그것을 본 성우는 완벽히 그 풍경에 매료된 상태였다. 물론 다나의 추천 역시 한 몫을 차지했다. 사실 커피 농장은 따로 기회가 있을 것 같았다. 하루 먼저 온 그의 스케줄은 다른 이들보다 하루 더 길었다. 적어도 하루 정도는 그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부탁한 것이었다.
이 휴식이 한국에서부터 너무나 절실했던 그였다. 아마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더 바쁜 나날이 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마벨 스튜디오의 건도 그의 고뇌의 한 몫을 더하고 있었다.
‘내가 슈퍼 히어로라니...’
< 광끼 -7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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