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75 >
성우가 머물 숙소.
그곳은 작은 집이었다.
아예 통째로 빌렸는지 그를 제외한 아무도 없었다. 다른 출연자는 아직이기에 오롯이 지난 밤에 그 혼자만 쓰게 되었다. 스태프는 아예 따로 숙소를 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편하지는 않았다.
지난밤에 성우는 굉장히 불편했다. 바로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 때문이었다. 어디를 가도 카메라의 앵글에서 벗어날 곳은 없었다.
-감옥이나 다름없네. 도망칠 곳이 없어.
‘화장실에 없는 게 다행이지. 그냥 그곳에 계속 있을까?’
-그럼 변비인 줄 알 거야.
리얼 버라이어티.
이런 것은 처음인 성우였다.
두어 시간에 불과했던 추격전도 비슷한 부류이긴 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엄청났다. 쉬고 잘 때도 어김없이 카메라는 그의 모습을 찍었다. 물론 그 대다수가 방송에 나가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그때 유부가 야옹 하며 울었다.
녀석은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고 싶은 것은 아니고 그냥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런 녀석을 보며 성우는 하품을 길게 했다. 벌써 밖은 해가 떠올랐고 정체 모를 새들이 울고 있었다.
“나가고 싶어?”
“야아옹.”
“여기는 맘대로 막 나가서 돌아다니면 안 돼. 잃어버리면 못 찾아. 알겠지?”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유부는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자기 맘대로 막 돌아다니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쓰는 타입이었다.
삐이익.
나무문을 여는 순간.
유부는 우다다 달려나갔다.
녀석이 뛰어든 곳은 집 안의 작은 정원이었다. 중정이라 불리는 그 장소는 이 나라가 한때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영향이 컸다. 제법 키가 큰 나무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그 장소였다.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특히 그 사이에 걸려있는 해먹이 최고
였다.
“나도 저기서 좀 쉬어볼까?”
가볍게 세수를 한 이후.
성우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흔들거리는 해먹 위에 올랐다.
허공 위에서 즐기는 그 여유는 모처럼 제대로 된 휴식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있자 어느덧 유부가 그의 곁에 다가왔다. 녀석은 주변 지형을 이용해 그의 배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품에 안겨 오는 유부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었다. 현재 그가 읽는 책은 한식에 관련된 책이었다. 사실 오늘 오전까지 식당에 올릴 메뉴를 확정해야 했다.
물론 주요 메뉴는 정해져 있다.
이 먼 땅에서 재료를 구하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성우는 조금 더 고민해야 했다. 이럴 때는 쉐프 찬스가 무척 아쉬운 그였다. 그때 뒤에서 주호민 PD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바로 내가 원하던 그림이야.”
그는 웃으며 성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오다가 말았다고 해야겠다. 그는 메인 카메라에 찍히지 않을 그런 곳에서 멈췄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성우는 그런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잘 주무셨어요?”
“물론이지. 아침부터 알아서 힐링 영상을 찍어주니 고맙네.”
“그런 적은 없는데요. 제 힐링이 먼저라...”
“그게 그거지. 메뉴는 다 정했어?”
“아직요.”
성우는 잠시 고민했다.
가능하면 시즌 1, 2의 메뉴는 빼고 싶었다.
식당의 명칭이 바뀌면서 아예 새롭게 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고를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현장의 상황 여건상 불가능한 것과 그의 실력 부족도 한몫했다.
-떡만둣국으로 하자니까.
‘떡이랑 만두는 어디서 구하고?’
-그래도 잘 팔릴 것 같은데.
일단 성우는 그것을 무시하기로 했다.
가능성이 그나마 높은 것은 현재 가진 재료로 해결하거나 현지에서 구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당장 이곳에서 뭘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시장 구경부터 좀 해보고 정할게요.”
“아직 시간 많으니 너무 스트레스받지는 마. 메인 메뉴도 충분히 좋으니까.”
“그것도 해봐야 아는 거죠.”
그 말에 호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음식이 더 잘 팔릴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현지 코디인 다나의 조언이 있겠지만,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호민은 말을 덧붙였다.
“시장 갈 때 다나랑 같이 가.”
“그래야죠. 제가 말이 되는 것도 아닌데.”
“영어는 잘 하더만.”
“글쎄요. 오면서 보니 영어는 하나도 안 통하던데요.”
그건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스페인어가 절실했다.
다나의 말에 따르면 젊은 층은 잘 하지만, 재래시장 같은 곳에서는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설마 숫자 1,2,3도 영어로 못 알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한 그였다.
“나머지 출연자는 언제 와요?”
“늦어도 점심 무렵에는 도착할 거야.”
“이제 슬슬 말해주시죠.”
“에~ 그럼 방송 내보내기 어려워. 딱 처음 봤을 때의 반응이 있어야 재미있지.”
성우는 알겠다며 말을 그만했다.
더는 물어봤자 안 알려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미리 알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 이제 겨우 몇 시간 후면 알 일이었다. 제발 케미가 잘 맞는 이가 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
그로부터 2시간 후.
성우는 다나와 함께 시장을 향했다.
하지만 살렌토에는 그런 시장을 찾을 수 없었다. 적어도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걸리는 아르메니아(Armenia)나 30분 거리의 만자냐(Manzana)까지 가야 했다. 둘이 향하는 곳은 그 가운데 더 가까운 만자냐였다.
“시장이 참 멀죠?”
다나의 말에 성우는 웃었다.
한편으로는 매일 이 거리를 장 보러 와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막막했다. 적어도 이거는 홀 담당에게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 만자냐로 가는 길의 풍경은 좋았다.
“저기는 뭐에요?”
“캠핑장이요.”
“그런 곳도 있군요.”
“물론이죠. 나중에 시간 되면 자전거 타고 주변에 있는 커피 농장도 가보세요.”
성우는 그 말에 설렜다.
콜롬비아에서 마시는 커피는 어떨까?
그 역시 커피에는 사족을 못 쓰기에 더 그럴지도 몰랐다. 그가 평소 내려 마시는 원두가 바로 이곳 콜롬비아의 수프레모와 케냐의 AA였다.
“역시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가 더 맛있겠죠?”
“글쎄요. 보통 저렴하게 마시는 커피는 그리 질이 좋지 않아요. 좋은 원두는 성우 씨처럼 해외에서 마시는 분들을 위해 수출하죠.”
“아하···”
“그래도 아마 마음에 드실 거에요.”
다나의 커피부심은 대단했다.
한동안 수다를 떨었더니 금세 그들이 탄 차는 만자냐에 도착했다. 성우는 운전해준 다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저기가 시장인가요?”
“네!”
성우 앞에 보인 시장.
그것은 거대한 창고처럼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 살짝 보이는 내부는 활기찼다. 벌써 온갖 냄새가 그 안에서 풍기는 것 같았다. 물론 그 모습은 뒤에 따라온 카메라맨이 담고 있었다. 그는 과거 추격전도 함께 했던 성우의 담당 VJ인 유재민이었다.
“여기부터는 성우 씨만 촬영할게요.”
“저 혼자 뭐 어쩌라고요.”
“그냥 시장 구경하는 그런 영상만 조금 따면 돼요.”
“알겠어요.”
성우는 주저없이 앞장섰다.
말이 안 통해도 바디 랭귀지를 믿었다.
주차한 차에서 내려 시장 안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시장에서 파는 식재료를 꼼꼼히 살폈다. 그의 예상보다 쓸만한 재료는 무척 많았다. 특히 그 가격이 저렴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꽌또 꾸에스타?(얼마입니까?)”
몇 개 모르는 스페인어 회화.
그것을 남발하며 성우는 시장을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이 동네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동양인이었다. 성우는 단숨에 시장통의 상인들의 시선은 단숨에 끌어모았다. 물론 잘생긴 그의 얼굴도 한몫하기도 했다.
“성우 씨. 이거 하나 먹어 봐요.”
다나가 그를 붙잡았다.
하나 먹고 가라는 시장 상인의 말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군만두 같은 것을 쥐고 있는 한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보였다. 그녀의 옆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아주 연세 지긋한 한 할아버지가 보였다.
“이게 뭐예요?”
“엠빠나다. 남미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이에요. 군만두 같죠?”
“그렇네요. 먹어볼게요.”
성우는 그것을 받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깊게 한 입 베어 물으며 그 맛을 느꼈다. 두툼한 겉면을 치아가 뚫고 들어가자 꽉 찬 속이 느껴졌다.
약간 느끼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맛있었다.
맛으로 봤을 때 닭고기인 것 같았다.
그때 다나를 붙잡고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그의 말 가운데 성우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 몇 개 없었다.
“여기 이분이 한국인이냐고 묻는데요?”
“왜요?”
“어! 자기가 젊었을 때 한국전에 참전하셨데요.”
“정말요?”
성우는 그 순간 깜짝 놀랐다.
다시금 그의 눈앞에는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이곳에서 또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바로 앞에 있는 할아버지와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그 이유는 환상 속에서 보이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이제 막 스물이 되었을 것 같은 그 청년은 성우의 바로 앞에 있던 할아버지와 너무나 닮았다. 한동안 그 안에서 있던 성우는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괜찮아요? 갑자기 땀을 왜 이렇게 흘려요?”
재민이 서둘러 성우를 부축했다.
내색하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조금 전에 본 환상은 그의 멘탈을 흔들어 놓았다.
“다나 씨. 정말 고맙다고 해주세요. 그리고.”
“그리고?”
“음...아니에요. 저희 잠깐 촬영 좀 접을까요?”
성우에 말에 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찍는 장면이 중요한 것이라 볼 수는 없었다. 잘해야 한두 컷 쓸까 싶은 것이다. 그보다 출연진의 건강이 우려되었다. 성우는 다시 한번 그 할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시장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사귀.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전쟁에서 죽은 병사였다. 그것도 바로 아까 보았던 그 할아버지 ‘디아즈’와 아는 사이라 했다. 죽고 못사는 절친까지는 아니더라도 함께 피를 나눈 전우라 했다. 그는 죽으며 못다 했던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풀어
낼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건 그거고... 내 안에 외국인 귀신까지 있었냐?’
-응. 저 녀석 말고도 몇 명 있는데.
‘에혀··· 내 팔자야. 해외에서도 이럴래? 너희들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새로운 미션이 도착했습니다.
‘시끄러!’
성우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전쟁이란 것이 참 무서웠다. 그 생생한 환상 속에서 성우는 그것을 직접 겪었다. 옆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전우와 빗발치는 총알 세례는 참 지독했다.
“좀 괜찮아요?”
다나가 생수를 건넸다.
그것을 받은 성우는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그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다시 그곳에 들어선 성우는 디아즈 할아버지와 한참을 이야기했다. 다나의 도움이 컸지만, 활성화(?)된 무사귀의 영향 때문인지 그녀의 통역 없이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혹시 한국에 계실 때 기억나는 음식이 있으세요?”
“글쎄··· 그때는 전쟁 중이라 먹을 게 그리 넉넉하지 않았어. 때로는 보급이 끊어질 때도 있었지.”
“그렇군요.”
“그래도 땡볕이 강하던 지독한 더위 속에서 마셨던 그 음료는 잊을 수 없어. 다들 정말 좋아했는데...”
성우는 그 말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막걸리나 그런 술의 종류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말을 계속 듣다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한국의 전통 음료의 종류가 그리 많지 않기에 성우는 금방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시나몬’. 바로 계피였다.
-삐익! 정답은 수정과입니다.
‘나도 이미 알고 있거든.’
-그거 여기서 만들 수 있을까?
‘글쎄. 한 번 재료를 찾아봐야지.
대충 생각나는 게 일단 계피와 생강이었다.
곶감도 있으면 좋겠지만, 이곳에 그런 재료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나마 다나의 말에 따르면 재료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 나중에 제가 식사 자리에 초대해도 될까요?”
“나를?”
“네. 제가 옆 마을 살렌토에 잠시 있을 거예요. 시간이 되시면 부탁드릴게요.”
그 말에 디아즈 할아버지는 반겼다.
분명 쓰라린 기억이지만, 젊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니 기운이 나시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성우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것을 대접해야 할지 벌써 고민이 되었다. 그게 무슨 메뉴이든 최대한 정성을 들일 생각이었다.
‘당신을 유식당에 초대합니다.’
< 광끼 -7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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