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72 >
난감한 일이었다.
멧돼지와 싸우느라 그들을 잊고 있었다.
그만큼 조금 전의 혈투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번의 작은 실수도 없어야 했다.
잘못하면 멧돼지의 돌진에 받치거나 물려서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쓸 틈은 없었다.
-아차. 나도 까먹었다.
‘멧돼지 고기에 아주 홀려서.’
-뭐 그것도 옛날에 배고플 때나 맛있다고 먹었지. 역시 한우가 최고야.
성우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칼은 여러모로 유용했다. 하지만 그걸로 누굴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사귀의 소원을 풀어주려다 인생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시끄러워! 그건 나중에 부대에 가서 이야기해.”
“그럴 수는 없거든요.”
퍼억.
어깻죽지를 내리치는 개머리판.
홍 상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쓰고 말았다. 성우는 그 순간 열이 확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총을 겨눈 저 병사가 지금은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 서 있었다.
“아얏···”
“닥쳐. 야! 무전 쳐서 거수자 잡았다고 알려.”
홍 상병은 손이 떨려왔다.
당장 무전을 보내서 지원을 받아야 했다.
자신이 통제할 범위를 한참 넘어선 상황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포상 휴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도 조금 있었다.
“저 무전기 칠 줄 모릅니다.”
“그 정도는 좀 알아서 해. 어서 가!”
“알겠습니다!”
자신도 무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병에게 맡겨 놓을 수는 없었다.
어리바리한 저 녀석은 아직 그 정도의 믿음을 주지 못했다. 한 명의 병사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성우는 어쩔 수 없이 결심했다.
더는 지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대로 끌려서 내려갔다가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일단은 자신에게 총을 겨눈 상병부터 제압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총이라는 무기.
그것을 피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원거리에서는 확실히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것이지만, K2처럼 총열이 긴 총은 오히려 근접 거리에서는 다루기 어려웠다. 그때 수풀 사이에서 또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
홍 상병의 시선은 그쪽으로 향했다.
또 멧돼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조금 전에 보여준 그 야생 동물의 난폭함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성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때다’
살짝 주저앉으며 한 바퀴 돌았다.
오른발에 얹힌 무게중심 덕분에 그 회전은 순식간이었다. 총을 겨누고 있던 홍 상병이 알아차린 것은 그의 몸이 180도 회전을 한 이후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달빛에 번쩍이는 칼날이 날아오고 있었다.
“씨벌!!!”
칼날이 번쩍였다.
단숨에 목덜미가 꿰뚫릴 것 같았다.
하지만 성우가 노리는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방아쇠에 걸쳐있는 그의 오른손. 그 손목을 나이프의 손잡이로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바깥다리를 걸어 왼손으로 뒤로 밀쳤다.
우당탕거리며 쓰러진 군인.
그 사이에 성우는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그의 소총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것을 쥔 성우는 다소 어이가 없었다. 그의 총에는 여전히 안전 장치가 걸려 있었다. 그것만 알았더라면 이렇게 과격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성우는 능숙하게 총을 메고 칼로
손짓했다.
“일어나.”
홍 상병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리고는 성우의 요구대로 참호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걷는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잡아먹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니까 왜 민간인한테 총구를 들이대?”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뭡니까?”
잠시 고민되었다.
하지만 지금 말할 거는 아닌 것 같았다.
“잠깐 산책 나온 동네 주민.”
“허! 말도 안 돼.”
“정말이야. 어서 안 가고 뭐해?”
성우는 그의 등을 밀었다.
시간을 끄는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가 바라는 것은 이러는 사이에 동료가 무전을 보내는 것일 게 뻔했다. 성우는 서둘러 그를 이끌고 참호로 향했다. 만약 그가 도착하기 전에 무전이 성공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우려에 불과했다.
최 이병은 어둠 속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전원조차 켜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연신 뭔가를 만지다가 어느 사이에 다가온 성우를 발견했다. 그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총을 찾았지만, 그보다 성우의 손이 더 빨랐다.
“이것도 압수.”
그것을 보고 홍 상병은 어이가 없었다.
총을 그렇게 놔두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평소라면 온갖 욕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반면 성우는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총 두 자루.
모두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성우는 홍 상병을 참호 안으로 보냈다.
그리고 모두 앉으라며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제 이야기 좀 가능할 거 같네.”
“뭘 원하시죠?”
“아. 내가 말 놔도 되지? 이래 봬도 너희보다 군번이 꽤 높아.”
그렇게 말하며 눈치를 살폈다.
둘은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성우 역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멧돼지와 싸우며 피에 젖은 칼날을 바싹 마른 낙엽 잎으로 살살 닦아냈다. 이대로 칼집에 넣기는 조금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별생각 없이 한 그의 행동.
그 모습은 무척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며 둘은 사시나무 떨듯이 바르르 떨었다. 공포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최 이병은 순간 뭔가 떠올랐다.
지금 보는 것들이 낯설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자뷔가 아닌 이상에 어디서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확하게 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뭔가를 기억해냈다.
“저기요.”
적막을 깨고 들리는 목소리.
그것을 듣고 홍 상병은 그에게 허튼소리 말라며 눈치를 보냈다. 하지만 이 멋모르는 막둥이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오롯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괴한을 향해 있었다.
“말해.”
“혹시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거 아는데 말입니다. 아까 움직임이 많이 눈에 익는데 혹시... 흑표 아닙니까?”
성우는 어이가 없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자신이었다.
더구나 이 어둠 속에서 알아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뭘 보고 내가 흑표라는 거야?”
“그 옆으로 스텝 밟는 거 영화 중간에 흑표가 보여준 것이지 말입니다.”
“그걸 기억하는 거야?”
“무려 세 번이나 봤지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맞습니까?”
“그 흑표가 맞다면 어쩔 건데?”
그 말에 최 이병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슬쩍 옆을 보자 홍 상병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 설명해보라는 뉘앙스 같았다.
“혹시 맞으시면 마스크 벗어주시죠.”
“뭘 믿고?”
“제가 아는 그분이 맞으면 오해에 불과하니 그냥 보내드리겠습니다.”
“야!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해?”
“홍 상병님. 상병님도 요즘에 그 드라마 보시지 않습니까. ‘저승에서 온 차사’에 나오는 유성우 배우 모릅니까?”
홍 상병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 역시 요즘 장안의 화제라는 그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손혜리가 나오는데 안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유성우라는 배우도 잘 알고 있었다.
요즘 대세인 배우.
그런 그가 이런 인적이 뜸한 산에 있다?
전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히려 이상한 말을 하는 최 이병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병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아닙니다. 제가 눈썰미 하나는 좋지 말입니다.”
“그런 놈이 무전기 전원도 못 찾아?”
최 이병은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렸다.
분명 그의 예감은 바로 앞에 있는 이가 유성우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증명해낼 수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군대에 오기 직전에 완전 꽂혀서 보던 것이 바로 그의 액션이었다. 사실 그의 미래의 꿈이 스턴트맨이기에 더 그러했다. 왈우에서 선보인 그의 액션은 자신의 이상향에 가까웠다.
둘은 끊임없이 서로의 의견을 내놨다.
그런 둘을 성우는 말없이 그저 바라봤다.
자신이 그들이라도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놔둘 수는 없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훈련이 끝나 복귀할 것이다.
만약 이대로 의문을 품고 간다면 이 근처에 다시 오기 어려워질 것이다. 분명 주변에 경계가 강화될 테니 박윤군이 숨겨 놓은 것을 회수하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성우는 결국 마음을 정하고 마스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말 마스크 벗게?
‘답이 안 나오잖아.’
-그냥 도망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러면 부탁받은 거를 해결해줄 수 없잖아.’
성불과는 상관없었다.
이대로 끝내면 무척 찜찜할 것 같았다.
이내 마음의 결심을 한 성우는 마스크를 벗고 그들의 옆으로 다가섰다. 갑자기 다가서는 그의 모습에 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주춤거렸다.
“나 맞아. 확인하고 싶으면 플래시 꺼내서 얼굴 비춰 봐.”
최 이병은 플래쉬를 꺼냈다.
그리고 성우의 얼굴을 향해 스위치를 켰다.
성우는 눈부심에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손으로 그 빛을 막지는 않았다. 한동안 그 상태로 계속 있자 성우는 벌컥 화를 냈다.
“꺼라. 눈부시다.”
달칵.
최 이병은 스위치를 내렸다.
그리고는 곧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순간에 다가오는 그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성우는 깜짝 놀랐다. 그가 방어 자세를 갖추기도 전에 최 이병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악수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완전 팬입니다.”
“감사합니다.”
“것 봐요. 제 말이 맞잖아요.”
“허어...얼 정말 그 유성우 맞아요?”
“맞는데요.”
그 말에 홍 상병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제야 잔뜩 긴장하던 몸의 근육이 쫙 풀리는 것 같았다. 확실히 마스크를 내린 그의 얼굴은 익숙했다. 자신이 즐겨보던 드라마의 그 배우가 맞았다. 간첩이 그처럼 똑같이 생길 리는 없었다. 그건 확실히 반칙이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 밤에 여기서 뭐 하세요?”
“얼마 전에 뭐 잃어버린 게 있어서요.”
“여기서요?”
“저 아래 5층 석탑 보러 왔다가 올라와 봤거든요.”
“아··· 그 뭐냐 보물인가 그거요?”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는 보물 제10호인 오층석탑이었다.
그게 현재 그가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이었다. 홍 상병은 잠시 고민하다 말을 꺼내 놓았다.
“혹시 시신 유기 뭐 이런 거는 아니죠?”
“설마요.”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해서 말입니다. 아니라면 제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뭐 당연히 그러실 수 있죠.”
“그런데 아까는 말 놓으시다가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하세요?”
“팬이라는데 반말을 하기는 쫌... 원하면 말 놓을까?”
셋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가 비슷한 남자끼리라 할 이야기는 당연히 군대와 여자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홍 상병은 자신이 출연하는 드라마의 여주인 손혜리에 대한 궁금증이 엄청났다. 팬이라더니 확실히 인증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무전기에서 그들의 복귀를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희 가봐야 합니다.”
“그래. 아까 쓰러뜨린 거는 미안해.”
“벌써 몇 번째 사과한 지 아세요?”
“미안하니까 그렇지. 내가 사과하는 의미로 둘이 같이 휴가 나오면 맛있는 밥 한 번 사줄게.”
“정말요?”
“물론이지. 혹시 볼펜 있어?”
최 이병은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자 곧 수첩과 모나미 볼펜 하나가 나왔다. 역시 이등병답게 그의 수첩은 군가를 외우기 위한 메모가 빼곡했다. 성우는 그곳에 자신의 번호를 적었다.
“이거 누구한테도 알려주면 안 돼. 알겠지?”
“물론이죠.”
“그럼 다음에 보자. 꼭 연락해.”
“형님은 여기 더 있으실 건가요?”
“조금만 더 찾아보고 내려가야지. 멧돼지 녀석이 독기를 품고 다시 올 수 있잖아?”
“아까 보니 아예 회를 치시던데요. 멧돼지가 오히려 형을 두려워할 듯요.”
야산에서 만난 두 군인.
그들은 나무 상자를 들고 다시 내려갔다.
성우는 그들을 보며 나름 잘 끝난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겼다. 혹시나 몰라서 자신을 봤다는 말은 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하지만 그게 지켜질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확 묻어 버려. 그럼 안심될 거 아냐.
‘미친놈.’
-우리도 일 마무리를 하러 슬슬 가볼까?
‘도대체 어디라는 거야?’
성우는 짜증을 냈다.
두부가 잘 알려줬다면 이럴 일도 없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두부는 박윤군의 말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분 후.
성우는 마침내 그 장소를 찾았다.
무사귀가 설명한 그것과 동일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거대한 바위였다. 두부는 바로 그 아래 독립 자금이 묻혀 있다고 했다. 성우는 그것을 들어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겁나 무겁네!”
장정 세 명이 들었을 돌.
그것을 혼자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살짝 들어서 그 아래 다른 돌로 받침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밑에 공간이 보이자 가져온 삽으로 살살 그곳을 파헤쳤다.
조금씩 파헤쳐지는 땅의 속살.
그곳에서 성우는 마침내 자신이 찾던 박윤군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것은 손바닥 두 개 넓이의 제법 두툼했다. 그것을 꺼내 손에 쥔 순간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작게 터트렸다. 이 야밤에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찾았다!”
< 광끼 -72 > 끝
ⓒ l살별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