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71 >
바스락...
마른 잎이 부서지며 비명을 냈다.
성우는 달빛을 벗 삼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앞으로 빠르게 나서지는 못했다. 한 걸음마다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것을 보고는 두부가 버럭 외쳤다.
-쫄았냐?
성우는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더 지체할 틈은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은 강화도의 북쪽 끝이었다. 민간인 통제 구역은 아니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바로 산 너머에 강화만을 건너면 북한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네가 지뢰의 무서움을 몰라서 그래.’
전방에 깔린 지뢰.
그것은 무려 108만 개를 넘어간다.
그 수치 역시 그저 추정치에 불과했다. 상대편에서 얼마나 깔아놨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전방 지역에서는 아직도 종종 지뢰 사고가 나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 그가 있는 곳.
그곳은 일반적인 길이 전혀 아니었다. 등산로라고 할 수도 없는 수풀 가득한 길이었다. 사람이 오가는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조바심이 났다. 어디에 눈먼 지뢰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땀이 주르륵 흐른다.
긴장해서인지 그의 신경은 무척 날카로웠다.
산속에서 들리는 온갖 소리가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 어두운 수풀 속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귀신이라도 나올까 겁나?
‘그런 거 아냐.’
-후딱 해치우고 라면 먹으러 가자. 역시 야식은 라면이지!
‘시끄러! 도대체 어디라는 거야? 벌써 1시간이나 지났어.’
-얘들도 급하게 숨겨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데. 오른쪽으로 가보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박윤군이 부탁이지만, 너무 힘들었다.
이렇게 힘들게 야밤에 뒤지는 이유는 분명 있었다. 나름 이곳도 다 산의 주인이 있는 곳이었다. 정식 절차를 밟으려니 물건이 제 주인을 찾아주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었다.
산에 묻힌 보물.
그것의 소유권은 참 애매했다.
만약 자신이 그것을 경찰서에 제출하면 유실물법에 의해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그 기간 동안 소유자가 나타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아야 자신이 소유권을 취득한다.
‘이름표가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동활 제약에 알린다?
그들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100년 전의 물건이다. 그걸 직접 본 사람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니 전혀 없을 거라고 봤다. 여러모로 생각해 본 결과가 지금의 이것이었다. 바로 아무도 몰래 처리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얼굴을 팔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 여기 근처래.
‘정말? 아까도 그랬거든.’
-진짜야. 저 옆에 두꺼운 나무 보이지? 그 너머.
성우는 재빨리 움직였다.
그의 몸놀림은 마치 흑표범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는 급히 몸을 숙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가 향하는 방향에서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막둥아! 망 잘 봐라.”
“네! 홍 상병님.”
“쉿. 기도비닉 유지 몰라?”
“시정하겠습니다!”
따악!
헬멧을 두드리는 소리.
그 너머에 군인이 있었다.
성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거수자(거동 수상자)로 의심받을 뻔했다. 지금은 간첩이라 오해받기 딱 생각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자신의 모습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너 그런 말 쓰지 말라고 했지. 쌍팔년도 군대도 아니고.”
“입에 붙어서... 죄송합니다.”
“하여간 밀덕(밀리터리 덕후)들이 들어오면 이래서 골치 아프다니까.”
선임병으로 보이는 군인.
그는 길게 하품을 하며 신세 한탄을 했다.
지금쯤이면 곤히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5분 대기조 훈련이라니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같이 온 녀석.
최 이병은 이제 막 자대배치 받은 녀석이다. 이런 핏덩이와 뭐하며 시간을 때울까? 그래서인지 벌써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른 분대원에 비하면 그나마 편하기는 했다.
야산 위에 설치한 박스.
그것은 화생방 경보기라 부르는 나무 박스였다. 물론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 안에 정말 들어 있어요?”
“그럴 리가 있냐. 진짜는 창고 안에 고이 모셔져 있겠지.”
“근데 뭐 이렇게 무거워요?”
“썅...조용하라고 했다.”
성우는 그 대화를 듣고 웃음이 났다.
자신의 군 생활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바로 그들이 있는 참호를 지나야 보물이 숨겨진 곳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길은 없었다.
워낙 작은 야산이라 우회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목적지가 이 근처이니 저들의 시야에 들어올 것이 뻔했다. 성우는 잠시 여러 방법을 고민했다. 그중의 하나는 확 제압해 버리는 것도 있었다. 그게 가장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마 내일 대서특필 되겠지?’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
분명 이런 훈련은 1~2시간이면 끝나기 마련이었다.
성우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아주 천천히 움직여 위치를 옮겼다. 혹시 제압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 몰라 준비해야 했다.
군인들의 바로 뒤.
수풀 너머에 자리 잡은 성우는 다리를 폈다.
이 상태로 잠깐 잘까 잠시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귀에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바스락!
커다랗게 울리는 소리.
그것을 들은 두 군인은 총을 들었다.
아마 그들 역시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성우는 목에 걸쳐 놓았던 마스크를 눈 밑까지 끌어 올렸다. 그나마 검은색의 옷을 입은 게 다행이라 여겼다.
정체불명의 소리.
그것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그것은 점점 더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군인들의 긴장감은 더 팽팽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둘은 조심스레 암구호를 외쳤다.
“멈춰! 움직이면 쏜다. 비키니.”
하지만 답은 없었다.
홍 상병은 안전장치를 풀고 싶었다.
혹시 자신이 생각한 최악의 상황이라면 그 작은 차이가 생사를 바꿔 놓을 수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괜히 민간인을 오인 사격하면... 그건 절대 생각하기도 싫었다.
바스락...
바스락.......
홍 상병이 다시 암구호를 할 무렵.
정체불명의 그것은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들의 참호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상당한 크기의 멧돼지였다.
“쉣!!!”
“허억···.”
문제는 따로 있었다.
멧돼지에 놀란 둘이 참호를 벗어난 것이었다.
총까지 버리고 순식간에 뛰어나온 둘은 그 우거진 수풀을 뚫고 성우의 앞으로 뛰어왔다.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성우가 피할 시간도 없었다. 서로 마주친 순간 세 사람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걸렸다! 잠입 실패!
‘야이씨! 이 상황에서 멧돼지는 뭐야!’
-뭐긴 X 된 거지.
특히 작대기 세 개.
홍 상병이라 불리던 이의 표정은 복잡했다. 엄청나게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에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당연히 거수자로 분류됐다.
하지만 뭐가 먼저일지 고민이 되었다.
거수자를 잡기에는 멧돼지가 날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총을 움켜쥐고 서서히 올렸다. 뭘 하더라도 틈을 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성우 역시 그 모습을 보았다.
총구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성우는 다급하게 둘을 함께 밀쳤다.
“조심해요.”
뒤로 밀린 군인들.
그들은 경사진 산기슭을 두어 바퀴 굴러 다시 원래 참호로 돌아갔다. 제법 심하게 구른 것 같아 보였지만, 그걸 보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와 그들 사이로 멧돼지가 다시금 꿰뚫고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달려드는 멧돼지.
그것은 검은 바위가 통째로 날아오는 기분 같았다. 성우는 그냥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혼자서 내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내일 뉴스 1면에서 ‘훈련 중이던 군인 멧돼지에 의해 사망’이라는 기사를 볼 것 같았다.
한숨밖에 안 나왔다.
성우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캠핑용으로 파는 것이라 날은 그리 길지도 또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나마 이것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원래 이 칼의 사용 목적은 넝쿨을 잘라내는 것이었다.
-오늘 통 멧돼지 구이 먹나요!
그 외에 삽도 있었다.
땅을 파야 할지 몰라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접이식 3단이라 믿음이 가지 않았다. 잘못 내리쳤다가 자신의 손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역시 손에 익은 칼이 더 편했다. 물론 평소에 쓰던 목검에 비하면 그 길이는 현저히 짧았다.
‘아오··· 장검을 가지고 다닐 수도 없고.’
성우는 자세를 잡았다.
목숨을 거는 실전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무섭기보다 흥분되었다. 마치 사냥꾼의 본능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멧돼지는 다시 그에게 달려들며 거대한 덩치로 밀어붙였다.
-올레~!
한 발자국.
그 옆으로 피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위례검을 배우며 수련했던 보법이 이제 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역수로 쥔 나이프로 등줄기를 찍었다.
하지만 야생의 최강자답게 쉽게 박히지 않았다. 워낙 두꺼운 껍질 때문이었다. 상처를 내는 데 성공은 했지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작전을 바꿔야 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조금 위험한 일이지만, 얼굴을 노려야 했다.
그나마 수컷은 아닌지 녀석의 얼굴에는 뿔처럼 자라는 어금니는 보이지 않았다. 성우는 슬슬 자리를 옮기며 녀석을 유인했다. 적어도 군인들한테 돌진하지 않게 해야 했다.
-또 온다. 조심해.
다시 이어지는 돌진.
하지만 성우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아슬아슬하게 피해야 했다. 그래야 얼굴을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눈이나 목을 찍어 눌러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성우는 치킨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서로 달려드는 차 안.
그중에 먼저 핸들을 트는 이가 지는 게임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피해야 했고 그게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자신의 육체가 가진 한계점에 도달한 찰나. 성우는 몸을 비틀며 옆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눈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눈치 좋은 녀석이었다.
목을 비틀며 주둥이로 막아냈다.
목덜미를 찌르려던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강철이 아닌 이상 녀석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주둥이는 가로로 길게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녀석은 광분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상처를 입은 적은 전혀 없을 것이다. 자존심에 금이 갔는지 멧돼지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동그란 눈으로 성우를 째려봤다. 마치 지옥까지 쫓아갈거라 다짐하는 것 같았다.
꾸우우!!!
거친 숨을 내쉬며 달려드는 녀석.
멧돼지의 저돌적인 돌진은 먹이사슬의 최강자다운 흉포함이 있었다. 하지만 거듭 상처가 늘어나자 녀석은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마 각을 재는 것 같았다.
-드루와~ 드루와!
이 자리에서 신난 것은 두부밖에 없었다.
얘는 뭘 믿고 저러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따지고 있을 틈은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 끝내면 조금 손을 봐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차례 더 칼질이 들어간 이후.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연달아 달려들던 멧돼지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덤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마침내 녀석은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러더니 이제껏 보았던 속도보다 더 빨리 도망쳤다.
순식간에 야산은 고요해졌다.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나 싶을 정도였다.
녀석이 달려나간 자리에 떨어진 핏방울만이 조금 전의 혈투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제야 성우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련할 때에 비하면 체력 소모는 많이 없었다. 하지만 심적인 피로감이 상당히 컸다. 확실히 실전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 하루였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러 왔나 싶었다.
하지만 이내 등 뒤에 차가운 감촉에 느껴졌다.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이었다. 성우는 잠시 난감해할 무렵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손들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쏜다.”
< 광끼 -7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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