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69 >
다시 또 들어간 환상 속.
그 속에는 박윤군과 그의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 뒤로 보이는 배경은 그들의 아지트로 쓰던 어느 곳 같았다. 난데없이 끌려 온 성우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것도 한두 번이 아닌지라 성우는 두부를 먼저 찾았다.
‘두부!’
-그분은 이곳에 없네.
박윤군의 목소리였다.
그것을 듣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보통 이렇게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은 성불할 때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변 어느 곳에서도 성불할 때 그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가 떠나기 전에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맞아. 우리의 부탁을 좀 들어줘.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었네. 염치없는 것은 알지만, 부탁이야.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
그것을 듣고 성우는 자세를 바르게 잡았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박윤군과 그의 동료들이었다. 충분히 존경받을 이들이었다. 그들이 직접 하는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박윤군 선생님. 곁에 계신 분들의 성함부터 알 수 있을까요?’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
그들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기억하고 싶었다.
그런 성우의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두 남자는 웃으며 서슴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천만다행이었다.
일부 무사귀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황해도 출신의 김원려이라 하오.
-내 이름은 김재명. 광주 출신이야.
성우는 그 이름을 다시 되뇌었다.
환상 속에 있는 그가 어디 적어 놓을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잊을까 싶어 자신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박윤군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잃어버린 독립 자금을 찾아주게.
‘독립 자금을요?’
성우는 잠시 고민이 되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들이 죽은 정확한 날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70년에서 100년 정도는 지났다. 더구나 비바람을 맞으며 그대로 방치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상황에서 과연 아직 남아 있을지 의문이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네. 그러나 패물과 금붙이는 고스란히 남아 있을 걸세.
-맞습니다. 적어도 동활약방의 마님이 전해준 패물은 있을 겁니다.
-히히. 그 아주머니 정말 미인이셨는데... 그리고 물을 건널 예정이라 엄청 꼼꼼하게 밀봉을 해놨으니 걱정하지 마.
박윤군이 바라는 것.
그것은 적어도 패물이라도 돌려줬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가 받아온 대부분은 소중한 것들이었다. 동활약방의 집안 대대로 물려 내려오던 반지와 보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금이 부족한 것이 미안해 그마저 다 내어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강화도의 북쪽 지역.
그곳은 민간인이 들어가기 어려웠다.
아직도 나라는 반 토막이 나 있었고 그 지역은 군부대가 가득했다. 자칫 산속을 헤매다가 간첩이라 오해할 수 있었다. 아니면 최악의 경우 지뢰를 밟고 무사귀처럼 객사할 가능성도 적지 않게 있었다.
성우는 사뭇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그들이 숨겨놓은 장소는 꽤 내륙의 안쪽에 있었다. 그 장소는 강화도 북부의 봉천산 부근이라 했다. 그들이 숨진 나루터에서 걸어서 약 1시간 정도 거리였다.
-나중에라도 꼭 찾아주게나.
-정상 부근에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오래된 탑 하나가 있어. 그 부근을 찾아봐.
-다른 하나는 서쪽에 봉천대 주변에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환상은 사라졌다.
성우는 그와 동시에 본의 아니게 기절했다.
밤새워 광고 촬영하며 쌓아진 피로와 더불어 연달아 환상을 본 부작용이었다. 물론 차를 운전하는 요한은 그냥 잠이 든 것으로 여겼다.
*
양주의 어느 펜션.
그곳에 도착한 성우는 겨우 눈을 떴다.
아직도 반쯤 감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이곳이 어디인지 떠올렸다.
‘이번에는 아예 기절한 건가?’
기절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이런 기분은 무척 낯설었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을 지금 당장 들어주기는 어려웠다. 지금 상황에서 강화도까지 당장 다녀오기는 시간이 빠듯했다. 더구나 박윤군은 분명 ‘나중에’라는 말을 했다.
똑똑똑.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
그것을 듣고 성우는 고개를 돌려보자 요한이 서 있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응.”
“무슨 잠을 기절한 듯 자요?”
성우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사실대로 말한다고 믿어줄지도 의문이었다.
확실히 이럴 때는 진수가 일을 봐주는 게 편하기는 했다. 성우는 차에서 내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래도 한겨울은 지났기에 제법 햇볕이 따뜻했다.
“몇 시야?”
“11시 넘었어요.”
“벌써?”
“너무 죽은 듯이 주무시고 계셔서 못 깨웠어요.”
사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나름 열심히 흔들며 성우를 깨운 그였다. 차에서 자는 것보다 따뜻한 펜션 안에서 자는 것이 누가 봐도 더 숙면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119라도 불러야 될까 고민도 잠시 했던 그였다.
“혹시 마트는 다녀왔어?”
“잠시 들려서 적어두신 것들은 모두 사 왔어요.”
“고마워. 너도 피곤할 텐데 안에서 조금 쉬고 있어. 나는 몸 좀 풀고 들어갈게.”
그렇게 말한 이후.
성우는 차에서 검은 목검을 꺼냈다.
이미 손에 익을 대로 익어서 한 몸처럼 느껴지는 녀석이었다.
요한은 알겠다며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성우의 매니저를 맡은 지 벌써 2개월이 된 그였다. 이 정도의 모습은 이제 평범한 일상에 가까웠다.
부우웅!
성우는 모처럼 위례검을 펼쳤다.
언제나 그랬듯이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이게 가장 효과가 좋았다. 오랜만에 펼치니 불과 30분도 되지 않아 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때 펜션 안으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그곳에는 오만석 실장과 최정 코디가 타고 있었다. 최정은 차에서 내리며 유부를 품에 안았다. 유부는 멀미라도 했는지 축 늘어져 잠을 곤히 자고 있었다.
“오~ 여기 좋네!”
“당연하죠. 센스 쩌는 제가 예약한 곳인데요.”
“어떻게 두 분이 같이 오시네요?”
“내가 차가 없으니 당연하지. 광고는 잘 찍었어?”
최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그는 함께 광고 현장에 가지 않았다. 광고 대행사에서 의상까지 모조리 준비해준 탓이었다. 굳이 그가 함께할 필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하루 먼저 휴일을 가졌다. 그때 요한이 활짝 웃으며 문을 열고 나왔다.
“유성우 크루의 첫 워크숍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의 말에 다들 웃음꽃이 피었다.
오늘은 바로 그들이 가지는 첫 워크숍이었다.
사실 그것은 명목에 불과할 뿐이고 1박 2일의 휴가라 봐도 무방했다.
그간 고생했던 진수에게도 연락했었다.
그러나 녀석은 일이 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내심 성우는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만석은 문 앞에서 요상한 춤을 추며 오두방정을 떠는 요한에게 물었다.
“페르세우스 팬카페 운영자들은 언제쯤 도착한 데?”
“오후 4시 정도에는 도착할 것 같다고 하던데요.”
“알았어.”
만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때였다.
오늘 팬카페 운영자들을 초대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평소 성우가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다고 했던 말들 때문이었다.
성우는 문득 허기짐을 느꼈다.
대충 시간을 봤을 때 점심을 먹을 시간이기는 했다.
그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점심 메뉴를 제안했다.
“점심으로 김치볶음밥 어때요?”
“나야 좋지.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저도 콜이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요.”
성우는 웃으며 펜션 안으로 향했다.
안에 들어서자 성우는 살짝 놀랐다. 내부는 그의 예상보다 상당히 럭셔리했다. 사실 그가 이런 펜션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최정이 다가왔다.
“여기 좋지? 다음에는 여자친구랑 같이 와.”
“제가 아는 누구랑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누군데?”
“있어요. 그런 사람.”
성우는 그 순간 두부를 떠올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부는 잠자코 있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아까 깨어나고 난 이후부터 녀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오랜만의 침묵이라 무척 낯설게 여겨졌다. 하지만 종종 그럴 때가 있기에 굳이 녀석을 찾지는 않았다.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온갖 식재료가 가득했다.
요한이 마트를 아예 싹 쓸어온 것 같았다.
오늘과 내일 온종일 먹을 것이니 양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얼추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카페 운영진 두 명까지 다 합쳐서 여섯 명이나 되었다.
“저 혼자 해도 되니 가서 쉬고 계세요.”
성우의 말에 다들 재빨리 흩어졌다.
이제는 성우의 음식 솜씨에 의구심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오만석은 씻겠다며 잠시 화장실로 향했고 요한과 최정은 TV 앞에 앉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성우는 우선 재료부터 꺼냈다.
파와 양파 그리고 당근.
달걀과 가장 중요한 김치.
그리고 참치캔 하나를 꺼냈다.
오늘은 김치볶음밥에 참치를 넣을 셈이었다.
촤아아악.
오일을 넣고 달군 프라이팬에 파를 썰어 넣었다.
그렇게 약한 불에서 살짝 볶아대자 파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요즘 그의 요리에서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먹기 좋은 크기로 송송 썰은 김치를 넣어 볶았다.
‘음~ 향 좋다.’
참치 김치볶음밥.
그것이 만들어지는 시간은 무척 짧았다.
요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성우에게 이 정도의 요리는 쉬운 것에 속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사귀의 도움이 적지 않게 있었다. 두부의 말로는 과거에 제법 솜씨 좋았던 숙수였다고 했다.
볶음밥의 화룡점정.
그것은 역시 달걀 프라이였다.
반죽으로 익힌 그것은 각자의 그릇에 올려놓자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4인분의 식사 준비를 마친 성우는 거실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식사하세요.”
*
그로부터 4시간 후.
이하윤은 초조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폈다.
벌써 몇 번을 이 주변에서 헤매고 있었다. 내비는 계속 이상하게 안내하는 것이 아주 밉상이었다. 하지만 운전은 그녀가 아닌 다른 이가 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언니. 이쪽이 맞겠죠?”
“거기는 아까 갔던 곳 같은데.”
“그냥 전화해 볼까요?”
23살의 여대생 이애란.
운전대를 잡는 그녀는 울상이 되었다.
운전면허를 딴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였다. 더구나 이제껏 이렇게 멀리까지 온 것은 처음이라 했다. 그렇기에 애란은 초긴장 상태였다. 하윤은 묵묵히 토닥이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저기다!”
손가락으로 한 장소를 가리켰다.
그제야 애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유성우를 보는 것보다 사고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 더 기쁜 그녀였다.
그녀는 팬카페의 부운영자였다.
남자 친구와 함께 성우의 연극을 보고 카페의 초창기 때부터 활동하던 멤버였다. 그런 그녀가 카페의 운영진을 맡은 것은 당연한 일에 가까웠다. 그녀의 활동량은 모든 회원을 통틀어도 최상위권이었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은 놓지 말고.”
“알겠어요. 언니.”
애란은 차를 서서히 몰았다.
그리고 곧 하윤이 발견한 펜션 입구에 들어섰다. 하지만 곧장 그 안으로 들어서지는 못했다. 입구 근처에 차를 세운 그녀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언니 저 화장 괜찮아요?”
“물론이지.”
“아~ 왜 이렇게 떨릴까요? 언니도 오랜만에 보는 거죠?”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왈우의 촬영을 끝낸 이후에 처음이었다.
오디션 현장에서 봤던 그 풋풋한 배우는 어느덧 라이징 스타가 되었다. 그때는 조연출과 신인 배우라는 관계였지만, 지금은 스타와 그의 팬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다소 감정이 미묘했다.
“실물은 어때요?”
“궁금하면 직접 가서 보면 되지. 바로 저 앞에 있잖아.”
애란은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 심정을 이해하기에 하윤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그녀는 다시 핸들을 잡았다. 차는 펜션 안으로 들어가 다른 차 옆에 주차했다. 아직 어떤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둘은 짐은 그대로 놔두고 곧바로 현관문 앞으로 향했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몇 초 기다렸을까? 인기척이 들리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애란은 유리창이 깨질듯한 환호성을 질렸다. 그것은 하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꺄아아아~ 귀여워!”
문을 열고 나온 성우는 깜짝 놀랐다.
두 여인의 시선은 그에게 닿아있지 않았다. 그보다 품에 안긴 유부를 향해 하트 세례가 쏟아졌다. 그에게는 엄청 뻘쭘한 상황이었다.
‘네··· 저는 유부 아빠입니다.’
< 광끼 -6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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