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재능의 탑스타-68화 (69/161)

< 광끼 -68 >

험준한 산세.

그 속을 뛰는 세 사람.

어둠 속을 헤치며 달려가는 그들은 속도를 절대 낮추지 않았다. 나뭇가지가 사정없이 얼굴을 긁어도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달리던 그들은 멈춰야 했다.

일행 가운데 한 명.

그들을 이끄는 이가 쓰러진 것이었다. 그 상처를 봤을 때 더는 무리인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거친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겨우 잠시의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포위망에서 겨우 벗어났나 봅니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러. 집결 장소까지 멀지 않으니 서두릅시다.”

“제기랄! 내가 뒤를 봐둘 테니 어서 가.”

배를 움켜쥔 한 사람.

거친 말투의 그는 연신 헐떡였다.

배 위에 올린 손가락 사이로 연신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총을 맞은 것 같았다.

“박윤군 동지! 절대 혼자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저는 아재와 끝까지 함께합니다.”

둘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들의 의리는 대단했다. 하지만 지금은 의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자신 때문에 잡힐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순간 그들의 목숨은 가볍지 않았다.

그들의 품에 숨겨져 있는 독립 자금은 무척 중요했다. 수많은 이들이 어려운 형편에서 모아준 피와 같은 돈이었다. 그것을 무사히 만주로 보내주는 것은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했다.

‘천산상회’와 ‘동활약방’

특히 두 곳에 면목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몰래 마련해준 금액은 상당히 컸다.

이 정도면 동지들의 숨통이 트일 정도였다. 배까지 곪으며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상황을 아는 그이기에 더 절박했다. 박윤군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둘을 재촉했다.

“임무가 더 중요한 거야. 어서 가라!”

멀리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횃불이 수풀 너머에서 간간이 보였다. 지금 이대로라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서둘러 이곳을 떠나 2차 집결지까지 가야 했다. 적어도 거기에 도착하면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재! 저는 결코 두고 갈 수 없어요.”

“힘내세요. 어서 가시죠.”

윤군은 두 남자를 바라봤다.

아직은 앳된 두 얼굴에 가슴이 아련해졌다. 총상을 입은 배때기보다 가슴이 더 찌릿했다. 이런 세상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요즘 인기 좋다던 설렁탕에 막걸리를 거하게 마시며 즐겼을 텐데...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더는 지체할 수 있을 틈이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집결지가 나올 것이다. 그곳에서 강화만을 건너면 그때부터는 추적이 쉽지 않을 테니 승산이 있었다. 생각을 바꾼 그는 두 청년을 데리고 서둘러 포위망을 뚫을 준비를 했다.

그로부터 2시간 후.

박윤군과 두 청년은 집결지에 도착했다.

아찔할 정도로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윤군의 재치로 간신히 빠져나온 그들이었다.

2차 집결지.

그곳은 강화만을 건널 나루터였다.

멀리서 그곳을 바라보던 셋은 조심스레 그곳으로 다가섰다. 일본군의 비열함을 알기에 더욱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다행히 여기는 안 들켰나 봅니다.”

“쉿!”

윤군은 주변을 살폈다.

느낌이 묘한 것이 계속 주저하게 했다.

그의 육감은 이곳이 불길하다며 계속 경고를 보냈다. 하지만 더는 방법이 없었다.

초승달이 뜬 늦은 밤.

세상은 온통 암흑에 휩싸여 있었다.

멀리서 찰랑거리는 물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밤이었다. 박윤군은 마침내 나루터에서 한 사람을 찾았다. 그는 약속대로 횃불 하나 켜지 않고 조용히 배에 숨어 있었다.

“가자.”

낮게 읊조린 그의 목소리.

그것을 시작으로 세 사람은 소리 없이 나루터까지 움직였다. 마침내 뱃사공이 바로 코앞에 보일 무렵. 끝내 사단이 나고 말았다.

“빌어먹을!”

멀리서 다가오는 일본군.

그들은 차를 타고 엄청난 속도로 나루터로 다가오고 있었다.

끝내 이곳까지 발각되고 만 것이었다. 세 남자가 서둘러 배에 타려고 할 때 또 다른 변수가 발생했다.

타아앙!

부지불식간에 울린 총소리.

그것을 듣고 윤군은 아연실색했다. 나루터에 숨어있던 자신의 편이라 여기던 뱃사공이 총을 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바로 우측에 있던 남자가 고꾸라졌다. 단번에 생을 마감한 듯 끈 끓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그 모습에 박윤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 잡아 들여!”

거칠게 울리는 일본어.

그것을 신호로 갈대숲 일렁였다.

갈대 사이에 숨어있던 일본군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잠깐의 틈을 타 윤군은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도저히 어디로도 도망칠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박윤군은 품에서 총 한 자루를 꺼냈다.

여기가 자신의 묫자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사정없이 총을 쏘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명이라도 더 저승길의 동지를 만들 셈이었다.

타앙! 탕탕 타아앙!

연달아 울리는 총소리.

그 격렬한 소음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알의 세례 속에서 피할 곳은 전혀 없었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벌집처럼 뚫렸다. 죽는 순간에도 윤군은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일본군 몇 명은 저승길에 앞세운 그였다.

그 모습에 일본군 장교는 발광했다.

이처럼 큰 피해가 나올 것은 예상하지 못한 그였다. 하지만 성과만 있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놈들을 뒤져!”

“아무것도 없습니다.”

“빠가야로! 그럴 리가 없어. 이번에는 꼭 후원금을 준 녀석이 누군지 찾아야 한다고!”

그나마 다행이었다.

박윤군은 끊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안도했다.

이곳에 오기 직전에 독립자금을 숨겨 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저들에게 흘러 들어갔다면 여러 사람이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그저 그 거금을 마련해줬던 그들과 집안 어르신께 맡긴 아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내가 죽어서도 그 고마움은 잊지 않겠소.’

*

성우는 눈을 떴다.

그의 눈가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매번 무사귀의 기억을 헤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사연 없는 죽음은 하나도 없었다.

특히 이번 환상은 더 그랬다.

아예 한 편의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물론 언제나 새드 앤딩이라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 세 사람이 보여준 의기는 대단했다.

“10분 후에 다시 촬영 들어갑니다.”

성우가 선택한 두 가지의 광고.

그 가운데 오늘은 동활제약의 소화제 광고를 찍는 날이었다. 오후 늦게 1차로 촬영을 마쳤고 새벽에 2차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한 번에 2가지 컨셉을 모두 찍고 싶다는 요청 때문이었다.

물론 그에 따른 보상은 충분히 있었다.

더구나 촬영 시간대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성우의 스케줄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투덜거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윤군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성우는 핸드폰을 꺼내 그 이름을 검색했다.

하지만 단번에 나오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 하나의 힌트를 발견했다. 바로 청도에서 모금한 자금을 운반한 이가 임시 정부의 특파원인 박윤군(朴允君)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언제인지 모를 밤늦은 시각.

강화도에서 죽은 그 사실을 담은 글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뒤져도 박윤군이라는 이름을 더는 발견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와 함께 최후를 맞이한 두 청년은 이름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그때 요한이 다가왔다.

그의 뒤에는 깔끔한 정장을 입은 두 명이 서 있었다.

“광고주분들이 인사 하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고 촬영 현장에서 광고주는 신에 버금가는 이들이었다. 이미 계약을 한 상태이기에 서로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반갑습니다. 배우 유성우입니다.”

“광고에 출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마케팅 부서장 윤장훈입니다.”

성우는 그를 보고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그 나이와 직위를 봤을 때 재벌 4세 정도는 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리 길게 하지 못했다. 바로 그의 뒤에 서 있는 한 청년의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어허! 저 녀석은··· 완전히 판박이 수준인데?

뒤편에 서 있던 남자.

그의 얼굴은 박윤군 그 자체였다.

조금 전에 환상을 보고 나온 성우가 그 얼굴을 잊을 리 없었다. 이건 비슷한 느낌이 아니라 그냥 빼다 박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윤장훈과 대화를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계속 그를 향해 있었다.

“저희는 촬영에 방해되지 않게 뒤에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윤장훈 부서장은 무척 서글서글했다.

광고주라는 권위도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성우는 그에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하고 뒤돌아섰다. 아직 그의 관심은 광고주가 아닌 그 뒤에 서 있는 청년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풀 수 있는 방법은 당장은 없었다. 무턱대고 다가가 증조할아버지의 성함을 묻는 것도 우스웠다.

“요한아.”

“네. 말씀하세요.”

“혹시 저기 저 분 명함 받은 거 있니?”

성우는 슬쩍 한곳을 가리켰다.

요한은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없다고 했다. 그가 받은 명함은 오늘만 십여 개 이상은 되었다. 하지만 성우가 짚은 이의 명함을 받은 기억은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슬쩍 가서 받아줄래?”

“동활제약 직원 같은데요. 부서장님 명함이 있는데 굳이 필요하나요?”

“그냥.”

성우의 말에 요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수행비서로 보이거나 신입 사원 수준의 관계자의 명함까지 받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성우가 직접 시킨 일이었다. 매니저인 그가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요한은 그의 명함을 받았다.

역시 예상대로 그는 마케팅 부서의 사원이었다. 이런 자리에 사원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 신기했지만, 그의 임무는 거기까지였다.

요한이 건넨 명함.

그곳에 적힌 그의 이름은 박형권이었다.

성우는 그 명함을 다시 요한에게 주고 잘 관리하라고 주의를 줬다. 언젠가 다시 한번 그를 따로 볼 일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지금 바로는 아니었다. 오늘은 광고 촬영 외에도 할 일이 제법 많았다.

“촬영 시작합니다!”

현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리고 감독의 목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속이 더부룩한 표정이요.”

“좋아요. 이번에는 조금 더 고통스럽게.”

“살짝 허리 숙여서 다시 한번 갈게요.”

“오른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한 번 더요.”

요구는 끝도 없었다.

차라리 연기하는 것이 더 편했다.

거의 비슷한 표정을 놓고 몇 번을 다시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불평 하나 없이 그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중에 결국 첫 컷을 광고에 사용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당장 뒤집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찍을 수 있을 때 여러 장면을 담아놔야 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재촬영을 할 수 없었다. 또 일정을 잡는다는 것은 예정되어 있던 광고 비용을 초과한다는 뜻과 같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시달린 이후.

겨우 그 장소에 풀려날 수 있었다. 성우는 광고 감독을 비롯해 광고 대행사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날은 이미 밝아 출근하는 이들이 오가고 있을 정도였다.

그때 요한이 차를 끌고 건물 앞으로 다가왔다. 성우는 곧바로 밴에 올라타 좌석에 반쯤 눕듯이 기댔다. 진이 쏙 빠진 기분이었다. 그가 타자 요한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집에서 조금 쉬었다가 나가실 거죠?”

“어차피 몇 시간도 못 자는데 그냥 바로 가도 될까?”

“네. 그렇게 하세요.”

전혀 문제없었다.

그곳은 이미 어제부터 빌려 놓은 상태였다. 요한은 차를 서서히 몰아 출발했다. 그제야 성우는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자신만 밤을 새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너는 안 졸려?”

“저는 촬영 중간에 쉬다 들어왔잖아요. 괜찮아요.”

“급할 거 없으니 졸리면 아무 데나 차 세워서 좀 자.”

“뭐 1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인데요.”

요한은 빨리 가서 잘 생각이었다.

어차피 성우만 내려주면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오늘 둘이 향하는 곳은 양주 부근의 어느 펜션이었다. 어느덧 주말이지만, 꽤 이른 아침이라 차가 막히지는 않았다.

“가다가 일찍 문 연 마트가 보이면 들릴까요?”

요한이 운전하며 물었다.

오늘은 마트에서 살 것들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공허하게 울릴 뿐 답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는 것 같았다.

요한은 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의 성우는 잠이 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불을 앞둔 한 남자와 대화 중이었다. 그 남자는 바로 박윤군이었다.

‘저한테 부탁하실 게 있다고요?’

예상외의 일이었다.

성불과 별개의 부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가 살아온 삶과 최후를 떠올리면 무슨 일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 광끼 -6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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