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63 >
허겁지겁 아귀찜을 먹던 일한.
그의 눈에 여신 한 명이 다가왔다.
마치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성우의 집에서 이런 여인을 볼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금녀의 공간이 그의 집 아니던가.
“반가워요. 손혜리라고 해요.”
그 순간 그녀를 알아봤다.
성우와 같이 드라마를 찍는 배우였다.
일한도 그녀가 예전에 찍었던 ‘여우비’를 보았다. 하지만 화면에서 보았던 것보다 실물이 훨씬 예뻤다. 그는 입안에 든 아귀를 씹을 생각도 못 했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할 뿐이었다.
“오~ 아귀찜이다. 저도 이거 엄청 좋아해요.”
“어서 드세요.”
진수가 젓가락을 내줬다.
녀석도 그렇고 뒤에 성우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혹시 두 분?”
“안 사귀어요.”
“그런 사이 아냐.”
대답은 동시에 나왔다.
그 반응에 일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뭐라고 했냐는 듯한 그런 제스처였다. 하지만 은근히 기분이 좋긴 했다. 아직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일한은 자신의 옆에 자리를 내줬다.
그 모습에 하나가 눈을 부릅떴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동생의 모습에 코웃음을 쳐줄 뿐이었다. 쪼만한 것이 자신의 친구를 넘보고 있는 것은 일한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이 도움을 주는 것을 왜 모를까?
1시간 후.
음식에서 술로 저절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신 양은 상당했다. 거실 곳곳에는 와인 병과 함께 맥주캔이 제법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동안 손혜리가 멤버가 잘 녹아든 것이었다. 모두 그녀와 동갑이라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정말 오늘 갑자기 왜 이 녀석 집에 온 거야?”
“언니 그러다가 사진 찍히면 어쩌려고요?”
“아 몰라. 그냥 술이 고팠다니까. 그리고 나는 이 녀석보다 유부가 보고 싶었다고!”
“고양이 핑계는 비겁하다.”
다들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진수는 그렇지 못했다.
한동안 말없이 술만 들이켜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뭐라도 꺼내러 가는 듯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우는 그의 뒤를 쫓았다. 오늘따라 그의 기분이 무척 안 좋아 보였다. 더구나 비틀거리는 모습이 조금 우려되었다.
“너 오늘따라 왜 이래?”
“그냥 기분이 좀 그러네. 아까 주소 마음대로 보낸 거는 미안하다. 하도 보채서 어쩔 수 없었어.”
“뭐 됐어. 담부터 안 그러면 되지.”
“아니. 더는 그럴 일도 없을 거야.”
진수는 뭔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성우가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진수를 다급하게 앉히고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물어야 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내일 술 깨고 이야기하자.”
“지금 말해 봐.”
재촉하자 진수가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눈가는 어느덧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예상외의 반응에 성우는 무척 당황했다. 그와 오랜 기간 같이 지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니 두 번째였나? 자신이 군대 갈 때도 그랬던 것으로 기억났다. 한동안 묵비권을 지키던 진수는 마침내 입을 뗐다.
“나 오늘 조금 비참했다.”
“응?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 그런 거는 단 하나도 없었어. 그냥 나 때문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성우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 때문이 아니면 누군가와 트러블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런 걱정이 들 무렵에 진수가 말을 이어갔다.
“내 꿈이 뭔지 알지?”
“당연하지. 그래서 영화 공부는 계속하라고 권하고 있잖아.”
“그런데 이렇게는 안 될 거 같아. 오늘 영화제에 참석한 감독님들 보니 정신이 번뜩 들더라.”
“그래서 뭘 어떻게 하려고? 내가 너한테 말했잖아. 지금 당장은 너 아니면 안 되는 이유 알잖아!”
성우는 다급해졌다.
어렵게 부탁한 일이었다.
이기적이라 욕을 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이 앞에 있는 진수 단 하나밖에 없었다.
“벌써 1년이 넘었어. 그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니 미안하지만, 더는 이렇게 지내는 거는 아닌 것 같아. 나도 너희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동갑내기 친구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생각하면 진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반짝이는 그들과 달리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느낌이었다.
모두가 스물넷이라는 같은 나이이다.
그런데도 다들 자신보다 저만치 앞을 걷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매니저는 확실히 아니었다.
주방에서 울리는 목소리.
그것은 거실까지 닿기에 충분했다.
어느 순간 소란스럽게 웃고 떠들던 것이 뚝 끊겼다. 그것을 느낀 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분위기를 깨고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미안하다. 오늘같이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래서 이대로 가게?”
“먼저 간다. 일단 다른 매니저 구할 때까지 일은 봐줄 거야.”
“공진수!”
“내일 촬영 있으니 적당히 마셔.”
그렇게 말하며 진수는 거실로 향했다.
주방에서 빠져나온 그에게 모두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진수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겉옷을 챙겨 말없이 집을 나섰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그를 말리지는 못했다.
성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로서는 도저히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진수의 얼굴에서 굳은 다짐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을 잘 알듯이 자신 역시 녀석을 잘 알았다. 그런 표정을 한 이상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미 모든 다짐을 마친 것 같았다. 그때 일한이 성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진수 쟤 왜 저래?”
“아··· 별거 아냐. 미안한데 오늘은 어기까지 하자.”
“괜찮은 거야?”
“아무래도 진수가 내 일을 봐주던 거를 그만둘 거 같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지.”
성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한이 그런 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내색 없이 말을 이어갔다.
“저 녀석도 성우 너와 마찬가지로 내 친구야. 맞아 안 맞아?”
“맞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진수를 진정으로 위하는 게 맞아?”
무척 날카로운 말이었다.
그 말에는 여러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제야 성우는 미련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친구가 미래를 향해 험한 길을 떠나려 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응원을 해줘야지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진수는 그 정도의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성우는 다급하게 일한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오늘은 여기서 접자.
“그래.”
“근데 혜리는 어쩌지? 매니저도 떼어 놓고 온 것 같은데.”
“내가 데려다줄게.”
“대리 부르게?”
“아니 매니저가 오기로 했어.”
그 말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외투를 찾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진수가 사라지기 전에 따라잡아야 했다. 아직 못다 한 말이 너무 많았다. 그 역시 집에서 뛰어나가자 거실에 있던 두 여인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술을 잘 마시다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오빠들 왜 저런데요?”
“원래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 동생도 한잔해~”
혜리는 잔을 들었다.
그리고 하나의 잔에도 오렌지 주스를 채워줬다.
그녀의 얼굴에는 씁쓸한 느낌이 가득했다. 작은 목적 하나는 달성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친 기분이었다. 이러려고 큰맘 먹고 온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때 일한이 다가오며 말했다.
“우리끼리 2차 갈까?”
*
성우는 쏜살같이 달렸다.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한 질주였다.
이대로 보내면 내일 얼굴을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에게 매니저보다 중요한 것이 친구였다. 매니저는 당장이라도 바꿔도 되는 것이지만, 십년지기 친구는 잃을 수 없었다.
“야! 거기 서.”
멀리 진수가 보였다.
성우가 외치자 그제야 진수가 멈춰 뒤를 돌아봤다. 그의 표정에는 왜 쫓아 나왔냐는 책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성우는 미소지었다.
“불알친구끼리 맥주나 한잔 더 하자.”
“다른 얘들은 어쩌고?”
“뭐 알아서 집에 가겠지! 그게 중요한 거는 아니잖아.”
“무책임한 호스트 같으니.”
하지만 싫은 표정은 아닌듯했다.
마침 그들이 멈춘 곳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었다. 그곳을 본 성우는 고갯짓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진수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옛 생각이 났던 것 같았다.
“편의점 맥주는 오랜만이네.”
“가자!”
잠시 후.
맥주 캔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둘은 바로 앞에 테이블에 앉아 마시기로 했다. 다른 편의점에 비해 무척 깔끔한 상태인 것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거리를 걷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성우는 맥주캔을 따며 질문을 던졌다.
치이익!
“그래서 뭘 어쩌려고.”
“아직 잘 모르겠어.”
“솔직히 오늘 이러는 거는 너답지는 않다.”
그 말에 진수는 언짢은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성우는 말을 이어갔다.
“어떤 거를 하고 싶은지 정리해서 내일까지 가져와.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는 도와줄게.”
“하루아침에 그게 나오냐?”
“미리 생각해 놓은 게 있을 거 아냐.”
“글쎄.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지금 학교를 다시 다니는 거는 무리인 것 같고...”
성우 역시 동감이었다.
사실 지금의 감독들 가운데 연영과 출신이 아닌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경제학과, 철학과, 사회학과는 물론이고 공과 계열인 전기공학과 출신의 감독도 있었다.
“너는 어떤 감독이 되고 싶은데?”
“감동을 주는 감독.”
“좋아. 나랑 하나만 약속하자.”
“뭔데?”
진수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성우는 싱긋 웃었다.
“너 첫 영화는 내가 무조건 출연한다.”
“내가 왜?”
“하하하. 네가 날 거부하는 거야?”
“시나리오에 맞는 배우로 써야지. 어디서 감독 빽으로 무임승차야?”
진수는 바로 거절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웃긴지 키득거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었다.
아마 이번 드라마를 끝내면 성우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오를 것이 분명했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드라마의 시나리오와 촬영을 본 그였다. 그의 예감은 ‘저승에서 온 차사’는 무조건 대박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성우는 진심이었다.
“독립 영화라도 네가 부르면 나는 무조건 출연한다.”
“돈도 제대로 못 받는 걸 네가 왜 해?”
“친구가 영화를 만든다는데 그 정도도 못 해줄 거 같아? 언제든지 말만 해.”
“어이고~ 눈물 나게 고맙게.”
캔 맥주를 들었다.
알딸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둘의 등 뒤로는 일한의 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탄 이들은 편의점 앞에 있는 둘을 보지 못했다.
* * *
얼마 후.
성우는 결국 진수를 놓아줘야 했다.
그가 없는 빈 자리는 생각보다 매우 컸다.
새로운 매니저가 왔지만, 무척 거북했다. 그렇다고 그 매니저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마음가짐의 차이였다.
그러던 와중에.
성우는 진수를 통해 이상한 말을 들었다.
일한과 혜리의 관계가 묘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워낙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많은 곳이 연예계였다. 심지어 자신과 혜리의 연애설도 살짝 나왔다가 사라진 상태였다.
더구나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어느덧 드라마가 공개될 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당장 2주 후면 제작 발표회와 함께 방송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소문은 줄어들지 않았다.
심지어 기자들까지 냄새를 맡은 것으로 보였다. 결국, 성우는 유부를 보러 놀러 온 혜리에게 직접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 요즘 연애하냐?”
“나? 에~ 무슨 소리야. 맨날 촬영하느라 바쁜데.”
“이상한 소리 도는 거 알아?”
“뭔데?”
“너랑 일한이가 사귀다던데.”
그 말에 혜리의 표정은 굳어졌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밴 안에 누가 없는지 살폈다. 하지만 성우의 코디인 최정은 물론이고 그의 새로운 매니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혜리는 조심스레 고백하기 시작했다.
“맞아. 나 일한이랑 만나.”
“허~얼! 언제부터?”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거는 얼마 안 되었어. 다 너 때문이지!”
성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왜 자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이후에 그들끼리 자주 만나기는 했지만, 자신이 다리를 놓은 적은 기억에 없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은 그들이 야속했다.
“내가 왜?”
“너희 집에 놀러 갔다가 코 꿴 거 아냐.”
“그날?”
“너랑 진수랑 사라지고 일한이랑 3차까지 달리다가... 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 말에 묘한 여운이 있었다.
그러자 성우는 슬며시 야한 상상이 되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혜리는 그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아니라고 했다. 어찌 되었든 성우는 둘의 연애를 축하해줬다. 하지만 일한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지는 않았다. 솔로에서 지 혼자 탈출하다니 나쁜 녀석이었다.
“의리없는 새끼.”
< 광끼 -6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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