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62 >
한껏 멋을 부린 턱시도.
그것을 입은 성우는 조금 난감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모처럼 입은 정장과 꽉 조이는 나비넥타이 때문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극단 작두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보통의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복학하고 취직을 걱정하는 나날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 선택을 한 처음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최근 신인 가운데 가장 핫한 배우가 바로 성우였다.
“잘 어울리네. 시계는 이걸로 차 봐.”
마침 다가온 최정.
그의 손 위에는 시계가 올려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무척 무거워 보였고 생소한 브랜드였다. 그러나 그가 가져오는 것치고 싼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도저히 얼마냐고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브랜드에요?”
“율리세 나르딘.”
“가격은 묻지 않겠어요. 안 물어도 무척 비쌀 거 같네요.”
“그래 그게 마음은 편할 거야. 대여한 거니까 깔끔하게 알지?”
최정은 그렇게 말하며 시곗줄을 풀었다.
그리고는 성우의 왼쪽 손목에 감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오늘은 그가 가장 고대하던 날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영화제 시상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코디로서 가장 신경 써야 할 날이자 또 각자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호홍~ 확실히 남자 패션의 완성은 시계야.”
“조금 전에 행거 치프 넣으실 때도 똑같이 말했거든요?”
“치! 원래 다 그런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사라졌다.
준비한 뭔가 꺼내러 가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진수가 다가왔다.
“일한이 녀석이 저녁에 축하 파티 안 하냐고 묻던데?”
“축하파티는 무슨.”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고 하던데.”
“상 하나 못 받고 돌아오면 어쩌려고? 엄청 쪽팔릴 것 같은데.”
“친구끼리 그런 게 어딨어.”
사실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남우 주연은 거의 조강철로 확정된 분위기였다. 올해에 개봉된 영화 가운데 그를 제외하면 딱히 눈에 띄는 배우가 많지 않았다. 물론 뚜껑은 열어봐야 알겠지만, 성우는 조 선배가 탈 것이라 믿고 있었다.
문제는 자신이었다.
신인남우상과 남우조연상.
이번 영화제에서 두 곳에 후보로 오른 그였다.
하지만 그 경쟁 상대가 꽤 쟁쟁한 편이었다. 주연의 빈곤 속에 조연은 풍성한 한 해였다. 그 후보들 하나하나를 봤을 때 아무리 봐도 쉽게 상을 받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왈우 뒤풀이 있지 않을까?”
“글쎄. 다른 매니저 형들 이야기 들으니 조금 힘들 것 같던데.”
“그래?”
“다들 스케줄 때문에 바빠. 그리고 너 조 선배님이랑 대작하면 못 일어날걸.”
그 말에 성우는 급인정했다.
그와 술을 마셔서 제대로 집에 들어온 경험이 거의 없었다. 워낙 빨리 마시는 스타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나름 술에 대해서 적지 않은 주량인 자신이지만, 조강철 선배에게만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아쉽기는 했다.
오랜만에 왈우의 팀이 뭉칠 기회였다.
이번 드라마 촬영 전까지는 종종 얼굴을 보았지만, 요즘에는 그럴 틈도 없었다. 성우는 최근 한 달 이상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촬영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럼 일한이한테 저녁에 집으로 오라고 해.”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묻던데?”
“자기 먹고 싶은 것만 알아서 챙기라고 해. 우리는 우리 대로 먹거리 사면 되겠지. 너는 뭐 먹을래?”
“아직 시간도 많은데 조금 더 생각해보고.”
그때 최정이 다가왔다.
성우는 그에게도 오늘 저녁에 시간이 어떠냐고 물었다. 같은 식구인데 그만 빼놓고 뒤풀이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정은 손사래를 치며 그 제안을 사양했다. 오늘 대여한 것들을 바로 반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워낙 비싼 거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다음 날로 미루라고 해도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노 쌩유~ 미안하면 오늘 내가 완성한 이 멋진 패션이나 잘 소화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성우는 노력하겠다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보며 최정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성우 역시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서 체크하며 충분히 만족했다.
“좋아! 가자.”
*
제 38회 황룡영화상.
성우는 결국 수상했다.
그가 받은 것은 두 가지였다.
신인 남우상과 함께 남우 조연상까지 그의 몫이 되었다. 성우가 스스로 했던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결과였다.
행사장에서 나오는 차 안.
그곳에 올라탄 성우는 잠시 정신이 몽롱해졌다. 오늘 하루가 마치 긴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쿵쾅거리는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성우는 진수를 향해 물었다.
“나 크게 실수한 거는 없었지?”
“수상 소감은 별로였어.”
“휴우... 그건 나도 알아. 설마 내가 남우 조연까지 받을지는 몰랐지.”
두 번째 수상하러 오른 무대 위.
그곳에서 성우는 횡설수설하다 내려왔다.
첫 번째 신인 남우상과 달리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영화제에서 남우 조연은 어느 부문보다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신인 남우를 받고 나서 설마 그것마저 자신에게 올지 모르고 넋 놓고 있던 것이 문제였다.
물론 만회하면 되는 일이다.
다시 또 수상할 기회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황룡 영화제와 달리 다른 시상식은 출품작에 왈우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추석 전후로 개봉한 왈우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최정이 핸드폰을 보다 외쳤다.
“기사 떴다.”
“네?”
“너 오늘 수상한 거 기사 떴다고.”
성우는 그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러자 그가 오늘 한 말 역시 그대로 보였다.
자신이 봐도 이게 뭔 말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 아래는 왈우의 이번 영화제의 독식에 관련된 말도 나왔다. 당연히 그런 말이 나올 수준이기는 했다.
무려 6개 부문이었다.
조강철이 남우 주연을 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두 개를 제외하고도 감독상, 극본상, 편집상 마지막으로 미술상 등도 수상한 왈우였다. 하나 아쉬운 것은 같이 연기했던 최희선이 상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희선이 누나한테 미안하네.”
“뭐 나중에 전화라도 좀 드려.”
“그래야겠지?”
차는 곧 한 강남의 어느 곳에 정차해다.
그곳에서 최정을 내려주고 둘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내릴 때 본 최정의 표정은 무척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레드 카펫에서 성우는 꽤 많은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대부분 여자 배우가 주목받는 장소이기에 남자 배우치고 의례적인 일이었다.
[레드 카펫 압도하는 유성우, 최희선]
[유성우의 금빛 레드카펫 워킹]
[패션 센스가 넘치는 신인 배우 유성우]
[레드 카펫 위에서 한 편의 화보를 찍은 유성우]
그런 기사는 넘쳐났다.
코디로서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사진으로 보이는 성우의 사진은 그 누구보다 빛났다. 뻔해 보일 수 있는 정장 차림이지만, 성우의 남다른 옷태가 완벽하게 최정의 의도를 살려낼 수 있었다.
그때, 성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바라보니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그 전화를 받고 말았다. 누군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안 받아도 결국 나중에 자신이 전화할 것이 분명했다.
-오! 전화를 받네.
“누구세요?”
-나야~ 유부 엄마.
성우는 말문이 막혔다.
자칭 유부 엄마라 할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촬영장에서 그런 별명으로 불리는 이는 손혜리였다.
“혜리냐? 근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알려준 적도 없는데?”
-쳇! 축하해주려고 어렵게 알아냈는데. 이런 식으로 반응하기야?
“고마워.”
-그게 끝이야?
성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성격을 봤을 때 결코 쉬운 것은 아닐 것 같았다. 이 맹랑한 멜로퀸이 뭘 바라는지 은근 무서워졌다.
-오늘 축하 파티는 안 해?
“파티는 무슨. 내일 일찍 촬영도 있는데.
-이상하다. 진수 말로는 그게 아닌 거 같던데. 나 방금 촬영 끝났는데 놀러 가도 돼?
말문이 막혔다.
저 녀석은 언제 포섭된 것일까?
더구나 이 여자가 자신에게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유부를 보고 싶다는 거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구설에 오를만한 단초는 막아야 했다.
“다 큰 처자가 남자 집에 함부로 오는 거 아냐.”
-매니저 오빠도 같이 갈 건데.
“애꿎은 매니저 형 고생시키지 말고 어서 들어가서 쉬어.”
철벽이 따로 없었다.
진격의 거인마저 막아낼 수준이었다.
하지만 혜리는 좀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한동안 옥신각신하던 중에 결정타는 진수가 날렸다. 그의 말을 들은 성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미 카카톡으로 주소 보냈는데.”
“너!”
“오늘 같은 기분 좋은 날은 좀 즐겨 인마!”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사는 공간에 여자를 부르냐.”
결국, 성우는 항복하고 말았다.
거기에는 진수에게 걸려온 일한의 전화도 한몫을 했다. 여동생인 하나도 같이 온다고 했다. 어느 사이에 조촐하게 술 한잔하려던 자리는 점차 커지고 있었다.
30분 후.
성우는 집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첫 방문자는 일한과 그의 여동생 하나였다.
이미 그의 집에는 여러 번 와 본 경험이 있기에 둘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곧 하나는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처음 보는 생명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꺄아아~ 얘 뭐예요?”
“얼마 전에 구조한 길냥이.”
“오빠가 직접 키우는 거예요?”
“물론이지. 이 녀석 나보다 더 귀한 몸이야. 이번에 내가 출연하는 드라마에도 나온다고.”
“정말요?”
하나는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유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부는 무척 시크했다. 그녀의 손길은 단번에 무시고 작은 캣 타워 위로 올라갔다. 하나는 그런 녀석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히이잉···”
“저 녀석 오늘 혼자 놔두고 나갔다고 삐진 거야.”
“만져도 돼요?”
“지금 말고. 조금 있으면 개냥이라 금방 먼저 다가올 거야.”
하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제야 까먹은 것을 깨닫고 서둘러 축하의 인사를 했다. 참 빨리도 본론으로 들어가는 녀석이었다. 그만큼 유부는 언제나 여자아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오늘 수상하신 거 축하해요.”
“고마워.”
“오빠 그런데 말이에요.”
“응?”
“수상 소감은 정말 별로였어요.”
그 말에 성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정곡을 찌를 줄은 상상도 못 한 그였다. 좌절하는 성우를 토닥이며 하나는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발을 쫑긋 들어 어깨를 두드리는 그녀를 보며 유일한이 소리쳤다.
“동생아~ 그 녀석은 넘보지 마라.”
“쳇!”
“너희도 어서 와서 이거 포장이나 뜯어. 나 배고프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진수였다.
오늘 제대로 먹지도 못한 그였으니 당연했다. 어쩌면 성우보다 더 긴장한 것이 진수라고 볼 수도 있었다. 성우는 보지 못했으나 진수는 그가 상을 받을 때 울음마저 터트렸다. 물론 그것은 그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오~ 그건 뭔가?”
“내가 특별히 맛집에서 공수해온 아귀찜.”
“앗싸!”
진수는 만세를 불렀다.
아귀찜은 녀석의 최애 음식 가운데 하나였다. 포장이 막 뜯기 시작한 둘 사이로 성우도 합류했다. 그 역시 배고픔이 확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남자들을 보며 하나가 혀를 쯧쯧 찼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그녀는 곧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하나는 맥주잔이며 받쳐 먹을 접시, 수저 등을 잔뜩 챙겨왔다. 마치 자기 집처럼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맥주잔이 보이자 일한은 뭔가를 또 꺼냈다. 그의 가방에서 마법처럼 뭔가 계속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짜잔~ 이건 수제 맥주!”
“오~ 수제 맥주는 처음인데.”
“내 영혼의 고향인 홍대에서 요즘 핫한 녀석이라고 해서 사 왔지. 나도 처음 먹어 봐.”
“홍대에 그런 곳이 있어?”
모두의 잔에 맥주가 가득 찰 무렵.
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은 그쪽으로 향했다. 일한은 배달 음식이 온 것인지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시킨 거야?”
“안 시켰는데?”
“그런데 이 시간에 누가 와?”
“오늘의 초대 손님.”
진수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제야 성우는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자 그곳에는 손혜리가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서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함께 온다던 그녀의 매니저는 보이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모자를 살짝 올렸다. 잠시 성우가 당황하는 사이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짜잔~ 나 왔어.”
그날 밤.
이 자리에서 벌어진 일들.
그것은 그들의 인생에서 제법 큰 굴곡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스물넷 동갑내기 청춘스타들의 사교 모임 ’The Rabbit’이 만들어진 날이기도 했다.
< 광끼 -6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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