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59 >
예상외의 만남이었다.
설마 그를 이 장소에서 볼 줄은 몰랐다.
성우는 연빈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그대로 멈췄다. 그것은 심연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성우를 말해 비꼬듯 말했다.
“이제 선배를 보고 인사도 안 하냐?”
“음···”
“음? 그게 끝이야?”
성우는 사실 고민이 살짝 되었다.
연극계에서 경력은 확실히 연빈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성우는 순순히 선배 대우를 해주고 싶진 않았다. 한때 대학로에서 작두와 자신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성우는 그 헛소문의 근원이 심연빈이라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같은 단원도 아니었다.
극단 작두의 1기는 엄연히 자신과 다른 선배들의 몫이었다. 더블 캐스팅 등의 방법이 있음에도 공연 직전에 박차고 나간 그의 자리는 없었다. 이내 마음을 굳힌 성우는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연장자 우대 정도로 만족하시죠.”
그 말에 심연빈은 바르르 떨었다.
당장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으나 참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스태프 몇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리딩 첫날부터 험악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성우는 그들을 향해 별거 아니라며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그나마 그 대접이라도 받으시려면 웃으세요.”
“싸가지 없는 거는 여전하구나.”
“뭐 얼마나 보셨다고 그러세요.”
심연빈은 이를 갈았다.
작년에 이 녀석에게 당한 모멸감.
그것은 지금까지도 쉽게 잊히지 않고 있었다. 물론 악의가 큰 상을 받거나 엄청난 상업적인 성공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아쉬운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이상하게도 일이란 일은 모두 잘 안 풀렸다.
악몽과도 같았다.
지금까지 그런 적은 없었다.
잘나가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바닥까지 떨어진 적도 없었다. 덕분에 1년 가까이 제대로 무대 위에 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온갖 오디션은 다 보러 다닌 그였다.
그 노력의 결과가 이곳이었다.
그리 큰 배역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배역을 따냈다. 자신만 더 노력해서 PD의 눈에 들 수 있다면 이제 지긋지긋한 연극 무대도 안녕이었다. 그렇게 희망 가득한 상태로 온 그였다. 그런데 여기서 유성우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 이 자식!”
연빈은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에 성우가 들고있는 극본이 보였다. 그리고 그 표지에 적힌 글씨를 보고 잠시 당황했다.
[‘강림’ 유성우 배우님]
그 역시 대본을 받았다.
그리고 수차례 읽은 상태였다.
당연히 이 드라마에서 강림이 주인공인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앞에 이 망할 녀석을 당장 결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성이 그를 극구 만류하고 있었다. 어렵게 잡은 기회를 다툼으로 날려 보내기는 아쉬웠다.
“나중에 두고 보자.”
그렇게 말하며 연빈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의 자리는 성우의 위치에 비하면 완전 구석진 곳이었다. 그 의미는 간단했다. 이 드라마에서 그렇게 큰 배역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쟤는 뭐냐? 갑자기 꼬리만 강아지처럼?
‘나라고 알겠어?’
-하여튼 조심해라. 전에도 말했지만, 저런 녀석은 원한을 쉽게 포기하지 않아.
‘두고 보자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은 없더라.’
두부와 대화가 끝날 무렵.
갑자기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 드라마의 연출인 하태국 PD도 그들 사이에 있었다. 아직 홍근석 작가나 다른 주요 배역을 맡은 배우는 보이지 않았다.
“하 PD님. 잘 지내셨어요?”
“성우 씨도 잘 지냈죠? 전보다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요.”
“저 살이 좀 더 찐 것 같죠?”
“지금 모습이 더 좋은 데요. 왈우 때는 너무 말라서 인상이 조금 날카로웠거든요.”
“다행이네요.”
둘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계속해서 홍근석 작가를 비롯해 여러 배우가 들어왔다. 성우는 그런 그들을 향해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대부분 성우보다 몇 배 이상의 경력을 가진 배우였다. 심연빈처럼 자신에게 악의를 가진 이가 아니라면 충분히 대접을 받을 만한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 가
운데 누군가 성우에게 다가왔다.
“성우 씨. 같이 작품 해서 영광이에요.”
“아닙니다. 선배님. 제가 영광이죠. 지난 작품 정말 잘 봤어요.”
“정말요?”
성우에게 말을 건 남자.
그는 연기파 배우 하지웅이었다.
30대 중반의 그는 맡은 역할마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연기를 해내는 몇 안 되는 배우였다. 영화나 TV로 보던 것보다 덩치는 더 큰 것 같았고 이목구비는 확연한 것이 미남상이었다.
“선배님이 이번에 ‘과양생이’ 역을 맡으셨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데요.”
“아이고... 너무 기대가 크면 안 되는데. 하하.”
하지웅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성우의 말은 진심이었다.
특히 그가 연기할 과양생이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이번 드라마에서 그가 맡은 역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성공의 키는 그가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과양생이.
그 캐릭터는 악역이었다.
특히 강림과는 무척 악연이 깊었다.
강림 덕분에 지옥에 떨어진 그는 천년여 만에 저승에서 탈출했다. 그런 그를 재차 포박하려다 강림은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명이 아직 남은 엉뚱한 이가 죽으며 강림은 징계를 받게 된다. 그게 [저승에서 온 차사]의 1, 2화 스토리 전개였다.
그때.
웅성거림이 들렸다.
성우가 고개를 돌리자 한 여자가 들어왔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손혜리가 마침내 나타난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정확하게 정각이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바로 성우의 정면이기에 둘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도도함이 발끝까지 흐르는구나!
두부의 말에 성우도 동감했다.
확실히 손혜리의 첫인상은 무척 차가웠다.
하지만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던 성우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심연빈이었다. 하지만 성우가 바라보자 그는 곧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척을 했다.
‘더럽게 신경 쓰이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있었다.
심연빈의 앞에 적힌 배역을 봤을 때.
자신과 엮이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그가 아닌 과양생이를 맡은 하지웅과 함께 연기하는 장면이 많았다.
그때 하태경 PD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빈 자리가 없나 확인한 그는 이목을 집중시키며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 다들 모이신 것 같으니 첫 리딩을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 드라마의 연출을 맡은 하태경 PD입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앞으로 16부작을 이끌어나갈 수장이었다.
그 박수에는 잘 부탁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성우도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첫 드라마였기에 누구보다 도움이 많이 필요한 그였다. PD 다음으로는 주요 연출진과 홍근석 작가 등이 인사를 했고 그 이후에야 배우들이 저마다 인사했다.
“강림을 맡은 신인 배우 유성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설빈을 맡은 손혜리입니다.”
“과양생이를 맡은 하지웅입니다.”
.
.
.
“중합지옥의 옥지기를 맡은 심연빈입니다.”
각자의 소개를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카메라는 그 모습을 빠짐없이 담고 있었다. 영화를 하면서도 메이킹 필름 촬영을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리딩 직전이라 은근히 신경이 많이 쓰였다. 그런 그를 향해 하지웅이 웃으며 말했다.
“무조건 웃어. 그리고 친한 척이라도 해.”
“네?”
“서로 처음 보는 거라 낯설겠지만, 그래도 우리 친해요~ 잘 맞아요~ 이런 것도 좀 보여줘야지. 안 그래? 하하.”
그는 성우의 등을 두드렸다.
솥뚜껑만 한 손이 등에 닿자 제법 따가웠다.
하지만 성우는 인상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활짝 웃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오히려 하지웅이 은근히 놀랄 정도였다.
“지문은 막내 연출이 읽을 겁니다. 다들 준비되셨죠?”
“네.”
“시작하시죠.”
마침내 성우의 첫 드라마.
[저승에서 온 사자]의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
S#1. 중합지옥
불에 달궈진 거대한 철구.
그 안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영혼들.
벌겋게 녹아 흐르는 구리의 강을 따라 떠내려가는 영혼. 그들 사이로 한 남자가 절규한다.
과양생이 : 나..는... 꼭... 이...곳을... 빠져..나간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문지기.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절규하던 남자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S#2. 서울 (밤)
인적이 뜸한 밤늦은 시각.
지붕 위에 내려앉은 한 남자.
남색 바지에 백색 상의의 까만 전립을 쓴 그는 강림이다.
허리에 붉은 포승줄을 걸어 놓은 그는 집안을 살핀다. 그리고는 곧 명부를 확인하고 그것을 읽는다.
강림 : 허형탁 82세... 허형탁 82세... 허형탁 82세
세 번 나이와 이름을 읽는다.
명부를 던지자 불꽃으로 화하며 사라진다.
그것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강림은 육신에서 풀려난 영혼에 붉은 포승줄을 휘두른다.
강림 : 이승에서 수고하셨습니다. 저승으로 가는 길은 제가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허형탁 : 가시죠. 더는 여한이 없습니다.
강림 : (차량 리모컨을 누른다. 길 위에 고급 승용차에서 삑삑거리는 소리) 타시죠.
*
리딩은 생각보다 치열했다.
모두 성우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대본에 푹 빠져 있었다.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했고 또 열정적이었다. 그 때문인지 다들 리딩에 온 힘을 다했다.
[거기 너! 도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바보 아냐! 장사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실례지만, 이거 하나만 맛볼 수 있겠습니까?]
[돈은 있어?]
[돈? 그게 있어야 하는 겁니까?]
성우는 처량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다들 폭소가 터졌다. 덕분에 리딩은 잠시 멈췄지만, 하태경 PD가 손을 동그랗게 돌리며 계속하라고 사인을 보내왔다.
그 모습에 성우는 다행이라 여겼다.
남을 웃기는 데에는 조금 자신이 없던 그였다. 지금까지 했던 연기와 전혀 달랐다. 하지만 지금의 이 반응을 보니 자신감이 부쩍 생겼다.
특히 손혜리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처음과는 달리 무척 열정적으로 리딩에 임하고 있었다. 전에 진수와 보았던 그 영화에서 본 모습과 천지 차이였다. 왜 이런 연기력이 있으면서 그렇게 영화가 나왔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거 제가 내드릴게요.]
[누구십니까? 혹시 저를 아시는 분인가요?]
[아니요. 그냥 배고프신 것 같아서요.]
[저희 혹시 예전에 어디서 본 적이 있습니까? 굉장히 낯이 익습니다.]
[이름은 기억 못 하셔도 작업 멘트는 기억나시는 것 같네요.]
[처자! 이름이라도 알려주시오.]
성우는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혜리는 그의 손을 찰싹 쳤다.
그 순간 성우는 온갖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라면서도 막내 연출은 계속 지문을 읽어갔다. 이 장면은 그가 설빈과 옛 인연을 기억해내는 장면이었다.
[당신 도대체 뭐야! 왜... 여기서 우리가 다시 만난 거지?]
[이 남자 뭐야? 이거 놓고 말해요. 경찰 부를 거예요!]
[안 돼. 이번에는 이번만은 놓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첫 리딩은 마침내 끝날 수 있었다.
성우는 그제야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의 얼굴에는 땀이 가득했다. 그런 그를 향해 허지웅은 손수건 하나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선배님.”
“그냥 쓰고 버려.”
“네?”
“남자가 흘린 땀은 내 취향이 아니라.”
지웅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 모습은 충분히 익살스러웠고 성우는 한참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리딩 현장의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다들 생각 이상으로 연기가 출중했던 탓이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상당히 재미있게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손혜리도 진이 쏙 빠진 것 같았다.
그녀는 의자에 기대서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길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 앞으로 자신의 상대역이 될 유성우였다. 처음에는 이번에도 바이올렛 엔터 소속이라 하기에 정말 걱정했던 그녀였다.
또 지뢰를 밟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단 한 차례의 리딩으로 그녀는 그런 생각을 아예 걷어냈다. 오히려 연기는 이곳에 있는 이들 가운데 허지웅을 제외하면 가장 잘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호감이 절로 일어났다.
‘몇 살이라고 했더라?’
< 광끼 -5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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