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58 >
그 이후.
서먹하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일단 성우의 호감도는 극에 달했다.
그것을 제외하고 생각하더라도 이번 [저승에서 온 차사]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현대 배경의 고전 설화.
지난해부터 급격하게 유행을 타고 있는 내용이었다. 특히 한국의 고전 설화가 가진 매력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었다. 반면에 최근 비슷한 내용이 넘쳐나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그래도 성우는 그가 쓴 극본이 성공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에게 이 대본을 주실 생각을 했죠?”
“극단 작두의 ‘악의’를 봤거든요. 그때 이미지로 쓴 캐릭터라 성우 씨가 꼭 해주셨으면 해요.”
“네? 그때의 캐릭터와는 아주 다른데요?”
성우는 그걸 꼬집었다.
이번 드라마의 주인공은 ‘강림’이었다.
나졸 강림.
그는 원님의 지시로 저승까지 염라대왕을 잡으러 갔을 정도로 담대하고 똑똑했다. 그 덕분에 그는 오히려 염라대왕에게 스카우트가 되어 차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악의’에서 맡았던 사이코패스와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글쎄요. 왠지 유성우라는 배우에게 이 극본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그런데 왜 필명을 바꾸신 거예요?”
“···”
홍지석...
아니 홍근석은 말이 없었다.
딱 봐도 그 이유를 말해주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굉장히 불편한 기색이기에 성우는 급히 화제를 바꿨다. 괜히 말하기 싫은 것을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여주인공도 궁금하지만, 과연 ‘과양생이’ 역을 누가 맡을지 궁금하네요.”
“아직 조율 중이라 조만간에 정해질 거예요. 악역이라 쉽지 않네요.”
“하긴 그렇기는 하죠.”
“PD님 오시네요.”
담배를 피우러 나갔던 두 사람.
그들은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다시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들의 두 손에는 커피가 쥐어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피 향이 확 밀려 들어왔다.
“성우 너는 플랫 화이트 괜찮지?”
“오~! 오랜만에 마시네요.”
“플랫 화이트가 뭔데요?”
“아··· 커피 종류 중에 하나인데 카페 라테보다는 조금 진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커피에요.”
성우는 근석에게 설명해줬다.
하지만 그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만석은 성우를 처음 만난 날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그날 성우는 플랫 화이트를 시켜 놓고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성우와 어디를 다닐 때 커피를 마실 일이 있으면 그는 가장 처음 하는 일이 그 메뉴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시 시작된 회의.
그 진행은 거침이 없었다.
다소 더디게 조율하고 있던 출연료도 정리되었다.
회당 출연료 2천만 원.
1억이 넘어가는 탑 클래스의 배우와 비교하면 무척 저렴했다. 요즘에는 1.5억을 요구하는 배우도 나오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의 출연료만 거의 제작비의 25~33%를 차지할 정도다. 오죽하면 배우들의 출연료를 주고 나면 실제 촬영할 비용이 없다고 할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
적어도 너무 적었다.
오만석 실장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그가 노력한 결과로 인센티브가 따로 붙었다. 시청률에 따라 추가로 붙는 구조였다.
만약 25%를 넘는다면?
회차당 3천만 원은 되었기에 작게나마 위안은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TCN 드라마의 역대 기록이 20% 정도였으니 당연히 가능성은 0%로 보았다.
“저희가 많이 양보한 거 아시죠?”
“물론 알고 있죠.”
“그럼 성우 잘 좀 부탁드립니다. “
만석은 생색을 살짝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바이올렛 엔터의 소속 배우를 꽂는다거나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점이 더 PD의 마음에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성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번 드라마 잘 부탁드립니다.”
* * *
출연을 확정한 이후.
성우는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미 다 외웠지만, 촬영 전까지 캐릭터 분석에 열을 올렸다. 전에 출연했던 어떤 것보다 이번 드라마는 조금 난해했다. 그 이유는 강림의 캐릭터가 팔색조처럼 장면마다 느낌이 다 달랐다.
“아··· 이 연기는 어떻게 해야 하지?”
성우는 조금 난감했다.
언제나 진중한 캐릭터를 하던 그였다.
하지만 강림은 때로는 익살스러웠고 때로는 진중했다. 완벽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수도 많았다. 저승사자지만, 인간미가 느껴지는 요소였다. 그렇게 대본 속에 있던 캐릭터를 슬며시 꺼낼 찰나 유부가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옆구리에 얼굴을 비볐다.
“혼자 심심했어?”
유부를 배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정작 녀석은 딴청을 부렸다.
그런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유부는 개냥이에 가까웠다. 다른 고양이들은 도도하다던데 유부는 그렇지 않았다. 때론 자신이 개를 키우는 건지 고양이를 키우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때 진수에게 카카톡이 왔다.
그 소리에 놀란 유부는 성우의 배에서 폴짝 뛰어 소파 위에 내려갔다.
-10분 후 도착.
-오늘은 스케줄 없잖아?
-실장님도 같이 가고 있어.
어쩐지 카카톡이더라니...
운전은 오 실장님이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물으려다 성우는 참았다. 어차피 잠시 후면 알게 될 일이었다.
10분 후.
집 안으로 오만석 실장과 진수가 들어섰다.
둘의 표정에는 뭔가 일이 꼬여가고 있다는 징후가 보였다.
“저차사 여주 캐스팅 끝났다고 연락 왔어.”
“저차사?”
“저승에서 찾아온 차사. 줄임말이야.”
“별 걸 다 줄여서 말하네. 누가 캐스팅됐는데?”
성우는 진수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오만석 실장이 대신했다. 그는 무척이나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맨스에 미친 X.”
“네?”
“왜 하필 그 걔랑 또 같이 촬영하냐. 이것도 운명의 장난인가?”
“그러니까 누구냐고요.”
“손혜리.”
데뷔 4년 차의 손혜리.
그녀는 성우 못지않게 화려하게 데뷔한 여배우였다. 성우 역시 그녀가 나오는 드라마는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연기력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왜요? 연기 나쁘지 않던데요.”
“너. 이번에 촬영하면서 조심해라. 승우 말에 의하면 정말 사납다고 하더라.”
“사나워요?”
“승우 녀석이 아주 치를 떨고 있다. 저번에 걔랑 같이 작품 하다 말아 먹었잖아.”
같은 소속의 안승우.
그라면 성우가 모를 리 없었다.
왈우의 흑표 역은 사실 승우에게 먼저 들어왔던 것이었다. 성우가 나타나기 전까지 제법 잘 나가던 배우였다. 액션씬도 어느 정도 가능하기에 소화할 수 있는 배역도 꽤 넓었다.
“사실 그 녀석이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다. 왈우에 출연할 걸 괜히 그 영화를 했다고 말이야.”
“3백만 정도 나왔나요?”
“210만. 완전 쪽박이야.”
“에고···”
땅을 치고 후회할 만 했다.
왈우가 영화사에 족적을 남기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였다. 특히 안승우는 그 작품을 출연한 이후에 오히려 인기가 줄어들었다. 전에 비해 찾는 곳도 많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것을 가까이서 본 오만석이기에 더 치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안승우와 손혜리 주연의 [오빠야]
그 영화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였다.
특색없는 극본에 온갖 클리쉐만 버무린 느낌이었다. 그래도 별다른 이슈는 없었지만, 그래도 둘의 티켓 파워를 합치면 꽤 성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관객의 눈은 냉혹했고 개봉과 동시에 온갖 악평이 가득했다.
-전혀 설레지 않은 러브 라인.
-현실 남매를 보는 느낌.
-가장 열연을 했던 것은 강아지 ‘뽀미’
성우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선입견을 품을 필요는 없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성우는 말없이 TV 리모컨을 찾았다. 그리고는 그 둘이 출연한 그 영화를 검색했다.
“지금 그거 보게?”
“뭐 일단 보고 다시 이야기하죠.”
성우는 과감하게 결재까지 했다.
영화가 시작되자 주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마 진수가 팝콘을 튀기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은 성우의 집에서 영화를 볼 때면 꼭 팝콘을 준비했다. 마치 신성한 의식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덕분에 그의 집에는 언제나 전자 레인지에 돌리는 팝콘이 쌓여 있었다.
그로부터 2시간 후.
성우는 TV를 끄면서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후에 그는 가장 먼저 진수를 바라봤다. 혹시 자신이 보았던 것과 다른 시각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네가 봤을 때는 어때?”
“뭐 딱히 특별한 게 없네. 사실 시나리오부터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두 사람 연기만 봤을 때.”
“음··· 솔직히?”
진수는 살짝 오 실장의 눈치를 봤다.
마치 직장 상사 앞에서 회사를 욕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괘념치 말라며 계속 닦달했다. 오 실장은 잠시 자리를 비워줘야 했다. 성우가 계속 눈치를 줬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진수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이게 연기야? 똥이야? 정말 그지 같아. 시간만 날린 기분이야.”
“둘 중에 누가 더 똥인데?”
“굳이 하나를 뽑자면...”
“뽑자면?”
“그러면 나는 안승우.”
“동감!”
죽이 척척 맞았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고 했다.
제아무리 안승우가 선배라고 해도 그들 둘만 있는데 꺼릴 말은 없었다. 오히려 쌍욕이 나오지 않는 것은 오만석 실장을 배려한 것이다. 그만큼 진수의 기준은 상당히 높았다. 어쩌면 성우 역시 그 기준에 들지 않았으면 매니저를 해줄 의향도 없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안승우의 연기는 정말 별로였다.
아마 극장에서 봤다면 더 심한 말이 나올 뻔했다. 성우가 아직 연기 경력은 짧지만, 평가할 정도는 되었다. 해솔의 기준이라면 그는 당장 무대 밖으로 쫓겨날 수준이었다. 어떻게 인기를 모을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혜리는 어떤 거 같아?”
“글쎄. 별로 의욕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긴 나라도 상대방이 저러면 의욕이 안 날 것 같다.”
성우는 잠시 상상했다.
조강철 선배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저런 연기를 하는 선배였다면 답이 안 나왔을 것 같았다. 어쩌면 참다 못해서 들이 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배우는 얼굴이 아니라 연기로 성장해야 했다. 어찌 얻은 인기라도 금방 탄로 날 수밖에 없었다. CF만 죽어라 찍는 배우는 특히 의심쩍었다.
“유부야~ 가서 실장님 모셔와.”
“큭큭! 걔가 알아듣겠냐?”
“이거 왜 이래. 우리 유부가 얼마나 똑똑한데.”
“정말 알아들으면 내가 손에 장...”
진수의 말이 끝나기 전.
유부는 정말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식당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곧 약속이라도 한 듯이 유부와 함께 오만석 실장이 나왔다. 그것을 본 진수는 눈을 빠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성우 역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우리 유부가 천재인가 봐.’
* * *
첫 대본 리딩 당일.
성우는 다시 TCN을 찾았다.
캐스팅이 완료되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드라마 촬영을 할 시간은 꽤 빡빡하게 잡혔다. 정말 죽어라 촬영해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방송 일정이 이미 잡혀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대회의실 앞.
성우는 그곳에 서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처음 만나는 첫 리딩이기에 긴장한 것이다. 이미 주요 배역에 대한 정보는 받았지만, 첫인상이 중요했다. 이내 마음을 다잡은 성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신인 배우 유성우입니다.”
우렁찬 성우의 목소리.
그것은 공허하게 회의실에 울렸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내부에는 몇 명의 스태프만 있었고 정작 배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헉! 깜짝이야.”
“성우 씨. 아직 아무도 안 오셨어요.”
“어서 와요.”
리딩을 준비하던 스태프.
그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런 스태프의 반응에 성우는 멋쩍게 뒷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일찍와도 너무 일찍 온 것 같았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로 걸어갔다.
그런 그의 등에서 또 다른 누군가 소리쳤다.
성우가 낸 목소리의 배는 되는 것 같은 쩌렁쩌렁한 울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심연빈입니다!”
성우는 고개를 돌렸다.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극단 작두에서 올린 ‘악의’의 원래 주인공이었던 심연빈이 그곳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던 그 순간 그의 눈빛은 위험하게 번뜩였다.
“너···!”
< 광끼 -5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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