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57 >
며칠 후.
TCN 방송국의 한 회의실.
오만석과 함께 성우는 그곳을 찾았다. 약속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탓에 그들은 담당자를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림은 생각보다 더디고 지루했다. 다만 성우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전에 왈우의 오디션을 봤던 때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비하면 성우의 인지도는 무척 높아졌다. 겸손은 잃지 말아야 하겠지만, 쓸데없이 떨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 그를 슬쩍 본 오만석 실장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긴장도 안 하네?”
“다른 배우도 아니고 저한테 들어온 대본이잖아요. 괜히 떨고 있을 필요는 없죠.”
“그렇지. 반쯤 먹고 들어가는 거라고 봐도 상관없어. 그래도 만약 조건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공중파로 가자.”
“그걸 더 바라시는 거 아니고요?”
“아니라고는 안 하겠어.”
너구리 같은 양반이었다.
성우가 하고 싶다고 극구 우기는 바람에 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는 케이블이나 종편보다 공중파를 선호했다. 제아무리 요즘 TCN이 도약하고 있다고 해도 아직 불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특히 지난해에 방송된 TCN 드라마는 대박이었다. 넘을 수 없다고 여기던 10%를 넘은 지 몇 해가 지났다. 결국, 마의 20%를 돌파하기도 했다. 이제 어지간한 공중파 드라마와 비교해도 차이가 없었다.
물론 주말 드라마는 제외였다.
30%를 넘는 그쪽 라인은 확실히 넘사벽이었다. 만약 그 기록마저 뛰어넘는 드라마가 나온다면 공중파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이번 작품은 엄청 잘 될 거예요.”
성우의 바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그가 보고 한눈에 반한 시나리오였다.
이 내용이라면 발로 만들어도 성공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확 꽂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예전에 대학로에서 보았던 연극 이후에 두 번째였다. 성우는 좋은 드라마는 좋은 각본에 의해 나온다고 여겼다.
그때 회의실로 누군가 들어왔다.
성우는 그를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이곳에서 몇 명 알지 못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 주호민 PD였다.
“아니 어떻게 제 구역에 오시면서 연락 한 통을 안 주세요?”
“주 PD님! 바쁘실 거 같아서 전화 못 드렸죠.”
“하하. 성우 씨가 온다는 첩보를 듣고 버선발로 내려왔어요. 아참! 퀴즈쇼에 나온 거 정말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성우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추격전을 연출한 주호민 PD는 남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을 기획하고 촬영하면서 그는 성우의 요청을 최대한 성의있게 받아줬다. 물론 모든 것이 오케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줬기에 불만은 전혀 없었다.
“성우 씨 요즘 아주 대세던데요. 이거 다음 예능에 섭외하려고 생각했었는데 힘들 거 같네요.”
“다른 분도 아니고 주 PD님이 부르시면 그곳이 어디든 가야죠.”
“저 지금 한 말 잊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치 해선 안 될 말을 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긴 그라면 연예인들 사이에 제법 악명(?) 높았다. 어느 배우를 촬영이 끝나자마자 납치해서 해외여행을 데리고 간 적도 있었고 외진 섬이며 산골에 보내 자급자족을 하는 모습을 찍기도 했다.
물론 그 결과는 모두 대박이었다.
적어도 그가 TCN에서 가지는 입지는 총괄 프로듀서인 CP 급에 가까웠다. 그의 나이가 아직 30대 초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혹시 이번 드라마 작가님 아세요?”
“글쎄요. 저도 처음 듣는 작가님이에요. 뭐 제가 예능 쪽만 해서 그쪽은 잘 몰라서요.”
“아···”
“대신 이번에 연출하는 친구는 잘 알죠. 전에 타임머신 시리즈 보셨죠?”
“물론이죠.”
성우가 모를 리 없었다.
군대 있을 때도 가능하면 챙겨보던 것이었다. 워낙 국민적인 열풍이 이어졌기에 벌써 시리즈만 세 번째가 나왔다. 각 시대를 여행하는 시간 여행자의 이야기는 또 다른 향수를 선물해줬다.
이제는 없어진 것들.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
물론 성우의 나잇대가 똑같이 느낄 수는 없었다. 서로 공감대는 다소 어긋날 수 있지만, 그래도 드라마는 재미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그때 주호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잠시 그것을 보더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그를 찾는 것 같았다.
“저는 급하게 회의가 있어서 가봐야겠어요.”
“어서 가보세요.”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오 실장님 저 성우 씨 섭외권 하나 딴 거 잊지 마세요. 하하.”
“물론이죠.”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사라졌다.
언제 봐도 웃는 모습이 남을 기분좋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에 오만석 실장은 조용히 웃었다.
“너 조만간에 아프리카나 남미 쪽으로 끌려가는 거 아냐?”
“설마요. 보통 4~5명이 한 팀으로 가잖아요.”
“하긴 그렇기는 하네.”
“그래도 가보고 싶기는 하네요. 특히 아프리카면 부모님도 계시는 곳이니...”
“그렇겠네. 내가 주 PD에게 소스 좀 흘려줄까? 그 친구는 그런 내용까지는 모르잖아.”
오만석은 설레발을 떨었다.
그가 즐겨보던 것이 바로 그 프로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곳에 나와서 인기가 폭등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오죽하면 방송계에서 주 PD의 별명이 CPR이었다. 완전 폭망했던 이조차 살려낸다는 뜻이었다. 특히 시간에 의해 잊힌 배우들을 살려내는 데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둘은 잠시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침내 회의 시간이 다 되어 두 명이 그곳에 들어왔다. 둘 다 일이 많았는지 얼굴에 피로감이 쌓여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이번 드라마의 연출을 맡은 하태국입니다.”
“아니요. 저희가 일찍 온 건데요.”
“이쪽은 이번 시나리오를 쓴 홍근석 씨.”
“반갑습니다.”
그들은 서로 명함을 나눴다.
물론 성우에게 따로 명함은 없었다.
대신 만석은 자신과 진수의 명함을 나눠줬다. 그는 자신의 바로 앞에 두 장의 명함을 놔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좋은 드라마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홍 작가님이 워낙 배우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감사합니다.”
홍근석 작가는 말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하태국 PD가 이야기를 주도했다.
성우와 오만석 실장은 그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대본은 보았지만 기획 의도는 처음 듣는 것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16부작 드라마
[저승에서 온 차사(差使)]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간단했다.
죽은 이의 영혼을 안내하는 주인공. 그가 하루아침에 대부분의 능력을 잃고 보통의 사람처럼 살아가며 벌어지는 해프닝이 담긴 로맨틱 코미디였다.
“상대 여배우는 정해졌나요?”
“시나리오는 보냈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요.”
“혹시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하 피디는 잠시 망설였다.
실제 캐스팅이 되기 전에 누구한테 연락했다는 그런 정보는 쉽게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괜히 나중에 누가 거절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하는 여배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배우에게 자존심은 무척 민감한 것이었다.
“그건 아직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혹시 꺼리는 여배우가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런 거는 아니고요. 그럼 촬영은 언제 들어가나요?”
“내년 봄에 올릴 예정이에요.”
“조금 일정이 빠듯하네요.”
“네. 가능하면 하루라도 빨리 일을 시작해야 하죠. 혹시 스케줄은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일이 있더라도 드라마 촬영이 언제나 0순위죠.”
대답은 만석이 대신했다.
그의 말은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 PD도 그것에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의 성우는 꽤 바쁘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네 명은 성우의 출연에 대한 문제를 계속 논의했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출연비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크게 문제없이 넘어갔다. 만석이 여기에 오기 전에 강훈 대표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은 배우만 오케이한다면 출연료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성우의 입장에서는 돈을 아예 받지 않더라도 이 작품을 놓치기 싫었다.
배우로서 욕심이 났다.
그만큼 드라마 대본이 마음에 들었다.
중간에 나오는 로맨스가 조금 부담되었지만, 그 정도는 용납할 수 있었다. 회의는 제법 길게 이어졌고 하 PD는 피곤한지 계속 눈을 비볐다. 결국, 버티다 못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흐아아~ 커피라도 한잔하실래요?”
“커피는 제가 뽑아 올게요. 그냥 앉아 계세요. 피디님. ”
“아이고 실장님에게 어떻게 그런 걸 시켜요. 제가 조금 졸려서 담배라도 피고 올 겸 다녀올게요.”
“저도 안 그래도 생각나던 참인데 같이 가시죠.”
둘은 그렇게 사라졌다.
흡연자끼리 진한 동지애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건물에서 담배를 피우려면 건물 밖이나 옥상에 정원까지 올라가야 했다. 이곳이 중층인 것을 생각하면 어디로 향하나 제법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사무실에 남은 두 사람.
성우와 홍근석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회의실에 내려앉은 적막함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그 어색함을 깬 것은 성우였다.
하지만 그 시도가 무색할 정도로 무산되었다.
성우는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척 짧은 단답형의 대답이었다. 사람의 맥을 빠지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적막함은 점점 숨통을 옥죄어 왔다. 이처럼 불편한 자리는 군대가기 직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지던 그 당시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성우는 회의실 곳곳을 구경했다.
방송국은 올 때마다 무척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곧 그의 시야는 탁자 위에 놓인 명함에 닿았다. 그것을 보자 진수가 은근히 부러웠다. 자신도 명함이나 하나 만들어 볼까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남자가 멋있을 때는 서로 명함을 나눌 때 같았다.
특히 TCN의 명함은 예뻤다.
그러나 곧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꽂혔다.
바로 홍근석의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였다. 특히 마지막 숫자 네 자리는 굉장히 눈에 익었다.
‘0310’
곧 그 숫자를 어디서 봤는지 깨달았다.
모두 무사귀 ‘돌팔이’가 성불하며 그에게 준 능력 덕택이었다. 다른 무사귀가 성불하며 성우에게 뭔가 주고 떠났듯이 그 역시 남긴 것이 있었다. 그는 그간 축적한 온갖 지식과 함께 엄청난 기억력을 주고 갔다. 사실 성불하기 전에도 그의 기억력에 의해 큰 도움을 받던 성우였다.
홍근석과 홍지석.
더구나 이름마저 무척 흡사했다.
어쨌든 그것을 깨달은 순간 홍근석을 다시 바라봤다. 잠시 망설이던 성우는 결국 그에게 묻기로 했다.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 아닐까 걱정됐지만, 호기심이 더 앞섰고 또 그 작가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더 컸다.
“작가님.”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뭐 하나 여쭤보고 싶은데요. 혹시 ‘더 룸’의 홍지석 작가님 아시나요?”
“···”
근석은 잠시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홍지석인데요.”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
성우는 크게 반기며 그의 두 손을 부여잡았다. 그토록 찾았던 그 작가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역시 인연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우연이 이어져야 인연이 되는 것이었다.
첫 눈에 반했던 ‘더 룸’.
그 작품 역시 대단했지만, 이번 드라마는 이를 갈고 만든 것이 눈에 보였다. 확실히 [저승에서 온 차사]까지 그는 성우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하고 있었다.
“완전 팬입니다!”
< 광끼 -5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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