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56 >
쏴아아~!
거침없이 퍼붓는 빗줄기.
그 빗소리를 들으며 성우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온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고 신경이 한껏 곤두서 있었다. 누군가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피로 때문이라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어릴 때부터 그래왔다.
특히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더 심했다.
그런 날에는 절대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아마 공동묘지에서 홀로 밤을 보낸 그 공포 때문일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조금 꺼릴 뿐이지 못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확실히 맞았다.
쿠르릉!
때마침 울리는 천둥소리.
그것을 들으며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어느덧 늦은 가을이라 제법 싸늘한 기운이 집안 곳곳에 맴돌았다. 집에 돌아왔지만, 어둠만 가득할 뿐 그 누구도 반겨주는 이가 없었다. 갑자기 외로움이 확 밀려왔다.
-그럴 때는 연애를 하는 게 좋아.
두부의 말은 무시했다.
이제 겨우 신인 딱지를 뗐다.
그런데 스캔들로 검색어 순위에 오르기는 싫었다. 성우는 진수를 괜히 먼저 보냈다며 후회했다. 하지만 녀석도 거의 이틀 만에 집에 가는 것이었다. 광고와 방송 출연이 맞물려서 꽤 강행군한 요 며칠이었다. 그리고 곧 가방에서 몇 가지의 물건을 꺼냈다. 그것
은 전기면도기와 충전 스테이션이었다.
“마침 필요했는데 잘됐네.”
-확실히 편하긴 하지. 그래도 수염은 길러야 제 멋인데 말이야. 그나저나 광고 찍느라 수고했어.
“첫 광고가 면도기 광고일 줄은 몰랐어.”
-너는 수염도 그리 많이 안 나는 편인데.
“그러니까. 하여튼 좋은 경험 했지.”
EPL 리그에서 뛰고 있는 축구 선수.
그의 뒤를 이어 면도기 광고를 찍은 것이었다.
전기면도기는 남성용품의 대명사에 가까웠다. 왈우에서 보여준 성우의 액션이 광고주에게 크게 어필이 되었던 것 같았다.
광고 촬영은 무척 섬세했다.
미묘한 차이라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소비자에게 구매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걸 15초라는 짧은 순간 사이 해내야 했다. 그래도 한 번 정산될 때마다 두둑해지는 통장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꼬르르르~
갑자기 허기졌다.
이미 날은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잘 시간이기에 참으려 했다. 요즘같이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와중에 몸매를 그대로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배에서 울리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계속 거슬렸다.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하지만 그곳은 추수가 끝난 들판처럼 텅 비어 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맥주와 음료수 몇 개가 전부였다. 그 외에 특별히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것을 보고 두부가 혀를 차며 한 소리 했다.
-이게 사람 사는 곳이냐? 어떻게 냉장고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잔소리 좀 그만해.”
-그러지 말고 뭐라도 좀 시켜 봐.
“무사귀인지 알았더니 알고 보니 굶어 죽은 아귀였어. 그 먹성 어쩔 거야.”
성우는 잠시 고민했다.
뭘 시켜먹기에는 조금 모호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집 앞의 편의점이었다. 가볍게 먹을 것만 조금 사 오기로 했다. 일단 생각나는 것은 컵라면에 삼각 김밥이었다. 학교 다닐 때 무척 즐겨 먹던 조합이었다.
10분 후.
빗줄기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성우는 재빨리 편의점으로 향했다. 연극을 할 때만 해도 매번 술에 취해 숙취 음료를 사기 위해 자주 오던 곳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럴 틈도 없었다. 굳이 따져보니 몇 개월 만에 온 것이었다. 그가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친숙하게 울렸다.
딸랑~!
성우는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찾는 물건이 어디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양손 가득 먹거리를 들고 계산대 앞으로 다가서자 그제야 처음 보는 알바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것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아안..녕하세요.”
그녀의 반응은 조금 독특했다.
뭔가에 홀린 듯 성우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성우는 자신을 알아본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하긴 요즘에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공중파 방송에 몇 번 출연한 덕분이었다. 그 때문일까? 그의 사인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사인 해드릴까요? 이름이 뭐예요?”
성우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정작 알바인 이다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오히려 성우에게 물었다.
“누구신데 저한테 사인을 해줘요?”
“저 누군지 몰라요?”
“모르겠는데요.”
정작 당황한 것은 성우였다.
무척 민망한 상황이었다. 이런 걸 보고 연예인병이라고 하던데... 그것도 불치병에 속한다고 들었다. 난처해 하는 그를 앞에 두고 다인은 떨리는 손으로 계산을 했다.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저 사람 뭐야? 왜 귀신을 잔뜩 달고 다녀?’
두려웠다.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어린 시절부터 귀신을 보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렇게 심각한 상태인 사람은 처음 봤다. 그녀는 자신이 귀신을 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바코드는 계속 에러가 났다.
-저 여자. 내 존재를 알아차린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잖아.’
-아냐 저 아이도 신기가 있어. 잠재력은 전에 부적 줬던 그 무당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
그 말에 성우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보인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만약 귀신이 보인다면 자신을 보고 안 놀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 당장 도망치지 않을까? 그런데도 담담하게 계산하고 이 있는 이 여자가 대단해 보였다. 그때 약간 주눅 든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렸다.
“8천 900원입니다.”
카드를 내밀었다.
결재가 완료되자 성우는 쏜살같이 편의점에서 나와 사라졌다. 우산을 쓰고 멀리 사라지는 성우의 뒷모습이 투명한 문 너머로 보였다.
그제야 이다인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저승사자 앞에서 풀려난 가련한 영혼 같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녀는 온갖 귀신에게 적지 않게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더니 중얼거렸다.
“오늘 좋은 만남이 있겠어요.”
그 말은 예언이었을까?
성우는 집으로 향하던 길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귀에 들리는 묘한 소리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뚫고 들리는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양이 울음소리였다.
하지만 워낙 빗소리가 강해 희미했다.
더구나 가로등조차 고장 나서 주변은 너무 어두웠다.
야아옹~
애처롭게 울었다.
성우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골목길 구석에서 주먹만 한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흠뻑 비에 젖어 쓰러진 녀석.
그 녀석은 어둠 속에서 홀로 웅크리고 있었다. 무척 위태로워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성우는 그 새끼 냥이를 두고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손대지 말고 그냥 놔둬. 괜히 사람 손타면 어미가 저 녀석을 버릴 거야.
“그래도 저대로 두면 죽을 거 같은데.”
-아마 어미가 주변에 있을 거야.
“그전에 죽으면?”
-저 녀석의 운명이지.
성우는 그럴 수 없었다.
이대로 집에 가면 후회할 것 같았다.
잠들어도 꿈에서 내내 저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생의 마지막에 내지르는 절규 같았다. 하지만 쉽게 녀석을 안을 수 없었다. 여기서 구조한다고 해도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키우기에는 조금 망설여졌다.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쉬
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자신이 잘 키울 수 있을까?
냐아옹~냐옹~
다시금 들리는 울음소리.
그것을 듣고 성우는 고양이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정말 갓 태어난 고양이였다. 그리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성우는 곧바로 수건 하나를 꺼냈다. 바르르 떠는 것이 추워 보였다. 우선 물기를 닦아내야 할 것 같았다.
-고양이가 뭐 좋다고 집에 들여? 녀석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왜? 나는 강아지보다 고양이가 좋던데.”
-나중에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
“그나저나 이름은 뭐로 짓지?”
고민이 되었다.
작명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곧 성우는 하나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노란 털의 색을 보니 이처럼 잘 어울리는 것은 없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유부야.”
노란 새끼 고양이 유부.
녀석은 천둥이 치던 그 날.
성우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 * *
“유부야~”
성우가 부르는 목소리.
그 소리에 새끼 고양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사뿐히 뛰어왔다. 한눈에 봐도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 소리에 두부는 버럭 소리쳤다.
-너 일부러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거지?
“내가 뭘?”
-내 이름이랑 너무 비슷하잖아.
성우는 그의 항의를 일축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바꿀 마음은 없었다. 그저 유부초밥의 색이랑 비슷해서 지은 것이라 계속 우길 뿐이었다. 물론 두부가 그걸 믿을 리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유부는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다다다닥.
앙증맞은 다리로 뛰는 모습.
그것을 본 성우는 또 심쿵했다. 너무 귀여워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처음부터 유부가 건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녀석은 한동안 무척 아팠다.
차가운 비를 너무 많이 맞은 탓이었다. 더구나 길고양이 생활을 했었기에 어떤 병에 걸려 있을지 감이 안 왔다. 덕분에 성우는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동물병원을 찾아야 했다. 녀석은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며칠 쉬니 건강을 되찾았다. 수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유부는 쪼르르 그쪽을 향해 달렸다.
마치 누가 오는지 구경하러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녀석은 진수의 품에 안겨 성우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 녀석 완전 쌩쌩해졌네. 네가 말했던 용품은 다 샀어.”
“고맙다.”
“영수증은 봉투 안에 있으니 확인해.”
“그런 거 안 챙겨도 된다니까.”
“돈 관계는 확실히 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진수는 뭔가를 품에서 꺼냈다. 그것은 고양이 장난감이었다. 이미 자신의 것이라 눈치를 챘는지 유부는 곧장 그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 필요한 거는 다 산 거야?”
“얼추 그런 거 같아. 나중에 봐서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 사야지.”
“뭐 그건 알아서 하고 난 화장실 설치해주고 온다.”
진수는 모래를 들고 사라졌다.
깡마른 녀석이지만, 그래도 힘은 제법 좋았다.
제 몸통만 한 포대를 들고 녀석은 1층 화장실 쪽으로 사라졌다.
새로운 애완동물을 들이는 것.
그것은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야 하는 물품도 많았고 예방 접종도 3차까지 있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유부와 함께 있으면 뭔가 힐링 되는 기분이었다. 특히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반겨주는 녀석의 애교에 살살 녹았다.
물론 아직 너무 어렸다.
오랜 시간 혼자 두기는 어려웠다.
그때 고양이 화장실에 모래를 채워 넣고 진수가 돌아왔다. 녀석은 뭐가 그리 급한지 소파에 앉기도 전에 질문을 던졌다.
“시나리오는 다 읽었어?”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다음 작품을 들어가야 했다.
남들이 보면 이제 막 활동을 끝낸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연기를 한 것은 무척 오래되었다. 왈우의 크랭크업이 3월이었으니 벌써 반년 이상 태업을 한 것이었다. 중간에 U-Bro 활동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었다.
“아··· 그거? 그런데 장르가 전통 메디컬 드라마는 아니던데.”
“정확하게는 재난 메디컬 드라마라고 봐야지.”
전에 둘이 이야기했던 시나리오.
그것을 요 며칠 읽어보던 성우였다.
내용은 꽤 재미있는 편이었고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다. 더구나 3인의 주연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과연 이번에도 잘 될까?”
“소포모어 징크스인지 뭔지 그것 때문에 그래?”
“아니라면 거짓말이지. 솔직히 이거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딱히 끌리지는 않아.”
첫 영화 ‘왈우’는 이른바 대박이었다.
그 덕분에 성우는 올해 그 어느 배우보다 반짝였다. 물론 정상까지 오르려면 아직 멀었지만,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의미 있는 한 해였다. 그런데 과연 다음 작품도 연달아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이번 작품 선택이 가장 중요해.”
진수는 그 말에 수긍했다.
그 때문에 오만석 실장도 서두르지 않았다.
괜히 자신이 밀어붙여서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이면에는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더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진수 너는 이게 가장 마음에 든다고?”
“현재까지는 그래. 그런데 드라마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영화와는 또 다르잖아.”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그때 진수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을 건네며 그는 한번 읽어보길 권했다. 어제 새로 들어온 TCN 편성 예정인 드라마 시나리오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을 쓴 작가의 이름은 무척 생소했다.
“누구야?”
“글쎄. 필명을 쓰는 거 같은데 처음 들어봐.”
“하긴 우리가 아는 작가님이 몇 명 되지도 않지.”
“이건 나도 아직 못 읽어 봤는데 혹시 모르니 놔두고 갈게.”
“어차피 심심했는데 지금 보지 뭐.”
그렇게 말하며 첫 장을 펼쳤다.
어차피 오늘은 딱히 스케줄이 없었다.
표지를 펼쳐 천천히 읽기 시작한 성우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어찌나 집중해서 보는지 유부의 재롱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옆에서 알짱거리는 유부를 데리고 진수는 잠시 그 자리를 피해줬다.
얼마나 지났을까?
성우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리고는 그대로 눈을 감고 여운을 느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성우는 시나리오를 흔들며 소리쳤다. 성우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진수야! 이걸로 하자!”
< 광끼 -5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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